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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423화 (423/500)

423화. 봉인 해제

‘막지 못했다고?’

나태의 장군 중 하나이자 마계 오크족의 대족장인 카이힐은 갑자기 환해지는 주변의 환경을 인식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어족 여왕의 일곱 봉인 중 하나를 푸는 일은 막대한 힘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에보니처럼 마법의 달인이 아닌 바에야, 그저 이렇게 무식하게 힘을 쏟아붓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거의 끝나 가는데. 젠장.’

그런 귀찮고 짜증 나는 작업의 와중에 방해를 받게 되었으니, 분노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중간계의 인간이 이 깊은 해저의 압력을 견뎌 가며 두 악마급 부관들을 피해서 이곳에 들어온다는 건, 설령 이 시대의 최강자라 해도 불가능하다.

그분께서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 오신 물 속성 데모닉 웨폰과 고도의 훈련이 없었다면, 이곳은 부관들에게조차 꽤 괴로울 만한 공간이었으니까.

또 어찌어찌 이곳에 들어온다 해도, 봉인지 특유의 감각 교란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다.

아무리 강자라 해도, 적응하려 발버둥 치는 사이에 이미 이곳에 익숙해진 부관들에게 박살이 나고 말 터.

카이힐은 자연히 부관들의 업무 태만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들이 또…….’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나태의 군세의 어쩔 수 없는 고질병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악센! 크랑! 뭐 하는 거냐!]

봉인에 쏟아 넣던 힘을 회수하며 한참 위쪽에 있을 부관들을 향해 분노한 영파를 내보낸 순간.

콰콰콰콰콰콰콰.

저 멀리에서 거대한 해저의 압력을 돌파해 가며 빠른 속도로 내리꽂혀 오는 유성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충격이나 에너지도 흡수해 버리는 이 해구의 어둠이 잠시나마 밀려날 정도로 찬란한 빛.

그리고 그 빛은 얼핏 보기에도 파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짜증과 분노만이 가득하던 가슴속에 불현듯 위기감이 차오르기에 충분할 정도로.

유성을 쫓아 하강해 오며 그 뒤를 노리는 부관들의 모습도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상황이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봉인에 쏟은 힘을 회수하고 적을 인식하는 짧은 순간, 그는 자신이 이 포인트를 찾아 작업을 시작할 때 즈음의 일을 떠올렸다.

봉인지로 이어지는 해구의 입구까지 살짝 들어왔던 돌고래 한 마리가, 아직 감각 교란에 익숙하지 않았던 악센의 블레이드 오러를 운 좋게 피해 내고 도망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동료 하톤이 물고기 같은 지성체를 보았다는 영파를 보내오기도 했다.

자연히,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신 그분의 말이 떠올랐다.

- 해양에서 활동이 가능한 수인족도 존재했으나, 그들은 2천 년 전에도 자체적으로 말살되고 있었다. 그러니 방해자는 없을 것이다.

‘설마……. 아니 맞아. 이 깊이에서는 마물이나 연체류는 몰라도 그런 형태의 생물을 본 적이 없어.’

머릿속에서 퍼즐이 짜 맞춰지는 순간.

전후 사정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빌어먹을! 귀찮아서 더 쫓지 말라고 했던 게…….’

그렇게 인과 관계가 인식되고 현 상황이 완전히 ‘파악’되고 나니, 그의 특성인 ‘전투 예지’가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힘이 완벽하게 돌아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발동된 전투 예지가 그의 두뇌를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넣어야 할 입력값은 적. 그리고 나. 그리고 봉인.’

- 정면으로 격돌하는 경우의 수, 열다섯 가지……. 결과, 모두 패퇴. 기각.

- 회피 기동, 열두 가지……. 결과, 봉인에 투자한 힘 소멸. 기각.

- 봉인을 지키면서 적을 패퇴시킬 수 있는 경우의 수 세 가지.

- 그중 가장 피해가 적은 쪽은…….

‘보인다.’

계산이 나오는 순간, 카이힐은 그대로 자신의 대검 데모닉 웨폰 아쿠아 칼립스(Aqua-Chalybs)를 휘둘렀다.

파지지지직.

복합 속성 ‘검은 번개’가 아쿠아 칼립스의 물 속성을 자극하고, 적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해류에 막대한 전류를 투사했다.

저주와 전격, 그리고 수압과 해류의 힘이 담긴 장벽이 적의 앞을 공격적으로 막아섰다.

쿠쿠쿠쿠쿵.

하지만 노을빛 유성은 그 물과 전격의 장벽을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잡았다.]

유성의 중심에서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검은 머리 남자의 영파가 와닿는 순간.

‘흐…….’

카이힐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잡았다.]

그리고.

콰콰콰콰콰.

노을빛 유성이 충돌과 함께 폭발하기 직전, 그가 남겨 놓은 여력이 대검의 끝에 급격히 집중되며 그 폭발의 핵을 찔렀다.

그것은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카이힐의 평생의 경험이 축적된 찌르기.

블랙 오크의 하층민으로 태어나 대족장이 되기까지 무수한 전사들을 쓰러트려 온 그를 승리의 길로 이끈 대검술의 기본이자 정수였다.

힘의 흐름을 꿰뚫고 본질을 흐트러트려 오히려 역류시키는, 마계 검술의 극의.

‘임팩트 포인트.’

그것이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갔다.

‘끝이다.’

이어질 결과는 진작에 전투 예지로 내다봤다.

임팩트 포인트가 적중한 순간 역류한 적의 힘이 당사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고, 그 틈을 타 자신의 검이 적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다.

그분과 함께 마계 최강을 자랑하는 나태의 군세. 그중에서도 제1 장군 그랜달을 제외하면 백병전에서 최강인 자신의 특성과 전투 경험이, 오늘 또다시 빛을 발했다.

……라고, 카이힐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공격에 미동도 하지 않는 유성이 코앞에서 터져 그 충격파에 전신이 찢겨 나가기 직전까지는.

‘어?’

아쿠아 칼립스가 뭉개지고 힘의 역류가 자신을 향할 때는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아앙!

‘저건……?’

노을빛을 뿜어내는 유성의 중심, 거대한 해머가 가진 묘한 존재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지만.

‘……뭐야?’

이미 모든 것은 늦은 뒤였다.

[어떻게!!!]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억울한 카이힐은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인가.

지가 무방비로 뛰어들어 놓고서는.

‘X신인가?’

의식이 극도로 가속되어 있던 타이니는 한순간에 온몸이 터져 나가는 오크의 모습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치열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변화를 캐치하며 대응하려고 발동한 고유의 시간 속에서, 타이니는 의문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놈의 마지막 일격이 그냥 찌르기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지만, 유성 떨구기의 압도적인 위력을 어찌하기에는 한없이 약한 한 수였다.

놈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렇게 쉽게?’

마치 자살을 하려는 듯 유성 떨구기 앞에 스스로 뛰어들어서 죽어 버리다니.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나 이상한 수를 써서 환상을 보여 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 컹!

- 그래 알아!

소울 사이트의 교차 검증은 확실했다.

놈이 러스트처럼 신의 권능을 가진 칠죄종이 아닌 이상, 환상을 썼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놈은 정말 그 찌르기로 유성 떨구기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저런 X신도 악마 군단의 장군이 될 수 있나?’

적을 깨부쉈는데 이렇게 찜찜한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그 찜찜함에 마냥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카이힐!]

[대족장!?]

애초부터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던 두 악마급 오크.

그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으니까.

[죽어!!]

[복수를!!!]

그리고 지금은 유성 떨구기를 사용한 직후였으니.

동대륙에 다녀오기 전의 그였다면 도저히 피할 수 없었을 완벽한 사망 플래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순간에 월랑의 현신이 사라지고는.

- 아우우우우!

우드드득.

이내 머릿속을 울리는 월랑의 울음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그의 육체가 부풀어 올랐다.

새하얗게 변해서 온몸을 뒤덮은 체모와, 조금 더 길어진 송곳니.

그리고.

‘권능 발동, 불굴.’

스스로만 알 수 있는 권능의 조각이 그의 몸에 깃들자.

꽈아아아아아아앙!

쾅! 쾅! 쾅!

원래대로라면 최소 중상을 입혔을 만한 거대하고 검푸른 얼음의 도끼도, 연달아 같은 곳을 찔러 온 검푸른 바람의 창도 그의 육체를 뚫지 못했다.

물론.

‘크……. 더럽게 아프네.’

아찔한 통증이 남기는 했지만.

콰콰콰콰콰콰콰.

그 충격에 여태까지 본 중 가장 강력한 해류가 해구 밑바닥을 휩쓸며 일대의 공간이 요동치는데.

그 와중에도 그의 몸은 이상한 문양이 가득한 거대한 석문 앞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2m가 훌쩍 넘게 커져 버린 근육질의 거한.

그가 온몸으로 은은하게 뿌려 대는 노을빛만이 해구의 바닥을 희미하게 비출 때.

[말도 안 돼!]

[군주들을 죽였다는 말이 진짜……?]

설령 칠죄종이라 해도 큰 상처를 입었을 만한 공격을 적중시킨 두 오크, 악센과 크랑은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전력을 쏟아 낸 직후의 탈력감보다도, 불가해한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의 절망과 공포가 더 컸다.

물론 그들 역시 생존 자체가 힘들다는 마계에서 악마급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오크.

정신을 차리는 데에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알려야……!]

[내가 뒤를 막는다!]

[악센!]

그러나.

얼어붙었던 그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

이미 사신은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도망치려고?]

살벌한 미소 속에서 드러난 새하얀 눈동자와 송곳니가 유난히 빛나는 듯했다.

그 생각이, 그들의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콰콰쾅!

‘이런 식의 활용도 괜찮네.’

타이니는 피 박살이 나 흩어지는 오크들의 시체를 보며 씩 웃었다.

격동하는 해류를 따라 몸 주변으로 흐르던 핏물이 잠깐 입에 들어온 것은 불쾌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 만했다.

‘권능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활용하기 따라서는…….’

이 물속에서 불굴을 발동한 채로 쓸 수 있는 기술은, 잘해야 폭발 속성을 활용한 이동기와 벼락 떨구기 정도일 뿐.

하지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쏟아 내는 적들을 공황 상태에 빠트리고 기습하기에는 꽤 괜찮은 조합 같았다.

그리고.

‘아차차. 이것들은 챙겨야지.’

타이니는 주인이 죽으면서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한 커다란 도끼와 그에 못지않은 크기의 창을 잡아챘다.

우우웅.

그러자 그 무구들이 반항하듯 짙은 마기와 전격을 뿌리기 시작했지만.

[닥쳐!]

우드드득.

거칠게 움켜쥐는 손에 담긴 힘과 영파가 그 반항을 무효화시켰다.

유성 떨구기에 칼 하나 들고 정면으로 맞서다가 가루가 된 놈의 데모닉 웨폰이 새삼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이것만 해도 어디냐.’

우우웅.

데모닉 웨폰들이 거듭 반항해 왔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마기를 정화해서 마나로 바꾸기만 하면, 꽤 쓸 만하겠어.’

당장 정화해도 되겠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뒤쪽의 문, 인어족 여왕의 봉인이라는 것을 살펴봐야 했으니까.

‘이게 그…….’

높이만 백여 미터, 폭도 50미터는 넘을 듯한 거대한 문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을 바라보는 순간.

우우우웅.

그 거대한 문에서 갑자기 찬란한 빛과 함께 스산한 기세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이내 그 거대한 문의 중심에 장식처럼 박혀 있던 구체의 표면에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눈알처럼 변한 구체.

그 안에 드러난 눈동자의 모양이 호선을 그렸다.

마치 웃는 것처럼.

그리고 주변에 흐르던 핏물들을 순식간에 쭉 빨아들였다.

‘헛?’

아차 싶은 순간.

[강한 제물들. 조건 충족.]

구체가 기분 나쁜 영파를 뿜어내더니, 한순간에 그 푸른 동공이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우우우우우웅.

그그그그긍.

해저를 뒤흔드는 격류와 함께, 그 거대한 석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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