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내 손에 죽은 칠죄종이 이미 셋이다
우우웅.
‘음?’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어두운 구멍에 들어선 순간, 타이니는 감각이 교란되기 시작했다.
시각이 아무 역할도 못 하는 가운데 그나마 물의 흐름을 느끼던 촉각도 이젠 말을 듣지 않았고, 구멍 밖에서는 멀쩡하게 통용되던 기감마저 이상한 기운에 가까이 휩쓸린 뒤로 혼동이 온 것이다.
‘흥!’
하지만 타이니는 불규칙하게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그 기운에 금세 적응했다.
쿠웅.
다시 발밑에서 폭발 속성을 터트리는 순간, 더 깊은 곳을 향해 쭉 나아가는 몸.
구멍의 입구를 지날 때부터 갑자기 두 배는 높아진 듯한 압력은 웬만한 마수의 몸은 단숨에 찌그러트릴 정도였지만, 그의 육체와 마나바디에는 큰 부담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기감만으로 사방의 지형을 훑으며 쏜살같이 내려가던 어느 순간.
[웬 놈이냐?]
강력한 기운을 품은 두 인영이 자신을 향해 쏘아지듯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쿠르르르르.
바닷물을 진동시켜 해류를 일으키는 듯한 거친 기세.
빛이 없기에 정확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기감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체구와 온몸에 알알이 박힌 근육, 입 밖으로 삐져나온 어금니 등은 익숙한 종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정말 오크……?’
[날파리가 귀찮은 물고기를 끌고 왔구나.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뭐 하는 놈이지?]
[뭘 물어? 그냥 죽여!]
대놓고 영파를 뿌리면서 기세등등하게 돌진해 오는 무식함도 오크와 비슷한 것 같았다.
‘타락한(Corrupted) 오크라더니…….’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야나 감각에 제약이 있는 이 공간에서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서슴없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뭐, 애초에 깊은 바닷속에서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니 이 정도야 예상했던 바이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앙!
막강한 해저의 압력 속에서도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는 살기와 함께, 진득한 마기가 쏟아져 왔다.
[타락한 인류라……. 재밌네.]
타이니는 그 즉시 녹턴을 꺼내 들어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뿜어진 노을빛이 어두운 해구를 한순간 밝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적들의 공격과 충돌했다.
쩌어어어어엉!
쿠르르르르릉.
충돌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기에, 타이니의 몸은 일순간 위로 쭉 밀려났다.
각기 커다란 도끼와 창을 꺼내든 적들의 공격이 생각보다 강력했다는데.
‘씁! 소리가…….’
그 와중에, 물속이라 잘 안 들릴 줄 알았던 충돌음이 이상할 정도로 증폭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 소리가 물리력으로 변해 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기까지 하는 것 같았는데.
다행이라면 적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제법……!]
[순리를 거부한 자들 중에 물건이 있구나!!]
충돌의 여파 탓에 해저로 밀려가서 비틀거리던 타락한 오크들은, 감탄사를 토해 내며 다시금 저돌적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돌진, 또 돌진.
그 습성마저도 이 세상의 오크와 별다른 것이 없는 듯했다.
문제라면 두 오크가 모두 저릭이 떠오를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고, 놈들이 손에 든 도끼와 창은 모두 마족의 초월무구, 데모닉 웨폰으로 보인다는 것.
거기다 물속을 거침없이 가르며 쏘아져 오는 놈들의 움직임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봤거나 연습한 것처럼 부드럽기까지 했다.
스르륵.
한 놈이 유연한 움직임으로 휘두른 도끼가 물결을 가르자, 서늘한 기운을 품은 물살이 자신의 근처까지 밀려와서 충격파와 냉기를 터트렸다.
쩌저저정.
푸슉.
그와 동시에 돌진해 오던 다른 한 놈이 멀리서부터 창을 내지르자, 그 앞에 작은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는데.
콰콰콰콰콰.
창끝에서 만들어진 그 소용돌이는 이내 타이니의 주변을 휘감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고, 도끼에서 쏘아진 냉기와 합쳐져 기세가 증폭되었다.
그러나.
‘나한테 범위 공격이라……? 흥.’
우웅.
콰아아아아앙!
한순간 노을빛 유성으로 변한 타이니의 몸이 지저의 어둠을 밝히더니, 막대한 냉기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돌파하며 점점 더 밝은 빛을 발했다.
그러자 해저에 고여 있던 무거운 바닷물이 그 유성의 궤적을 따라 거세게 휘몰아쳐 흐르기 시작하니.
콰콰콰콰콰콰.
[미친……!]
두 오크가 보기엔, 그것은 거대한 유성이 주변의 모든 해류를 끌어모아 자신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막아! 아직 시간이 필요……!]
그 와중에도 두 오크의 무기가 빠르게 교차하더니.
거대한 검은 십자가가 생성되어, 떨어져 내려오는 타이니를 향해 쏘아졌다.
번쩍.
스각.
직전의 공격과는 달리 마치 해저의 막대한 수압을 무시하듯 물결을 가르는 암흑 오러의 십자가가 순식간에 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흡?!’
콰아아앙!
다행히 그 검은 십자가는 물결은 갈라도 노을빛 유성은 뚫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타이니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어찌 당사자들만 할까.
[어떻게……!]
[젠장……!]
공세를 뚫어 내고 적들의 코앞까지 하강하자, 검녹색 피부의 두 오크가 놀라 눈을 부릅뜨는 게 보였다.
‘늦었다!’
꽈아아아아앙!
타이니의 살벌한 미소 속에서, 유성 떨구기가 그대로 폭발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놈들이 저마다 도끼와 창에서 검은 빛을 발하더니.
스륵.
콰콰콰콰콰.
‘어!?’
유성 떨구기가 만들어 낸 충격파의 방향으로 막대한 물의 흐름을 일으키며, 밀려나듯 좌우로 흩어져 버렸다.
꽈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콰.
사라져 가는 노을빛과 함께 다시 어두워지는 시야.
충돌의 후폭풍이 연이어 거친 물결을 만들어 내는데.
타이니로선, 순식간에 몇 번이나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음에도 돌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는 이 해구의 특이성보다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다.
‘물을 이렇게까지 자유롭게 움직이게 만들어 주는 데모닉 웨폰이라고? 그것도 두 개 다?’
이성이 있고 마력까지 넘쳐나는 마족들이 즐비한 악마 군단에, 왜 데모닉 웨폰은 많아 봐야 한둘밖에 없는가.
그에 대한 의문에는, 마도사들이 내어놓은 대답이 있었다.
- 난폭하고 충동적인 성질을 가진 마기는, 마나에 비해 한곳에 고여 있기가 훨씬 어렵다. 자연히 그것으로 아티팩트를 만들기 힘든 것이다.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나태의 군세가 가진 데모닉 웨폰도 저 둘이 전부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대체 저놈들은, 나태는 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준비한 걸까.
[재미있는 무구들을 들고 있군. 데모닉 웨폰은 초월무구보다 훨씬 만들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타이니는 적들을 단번에 끝장내는 것보다 그 의문을 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 판단했다.
뭐 그래 봤자…….
[그분의 혜안은 과거와 미래 모두에 미치니.]
[너희 같은 하등한, 순리를 거부한 한심한 것들이 측량할 수는 없다!]
……이렇게 나올 것은 예상했지만.
한숨이 나왔다.
‘에이씨, 내가 무슨 떠보기냐.’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는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물속에서 오러를 쓰면서 움직이고 싸우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으니.
[그래? 그럼 그대로 죽어라.]
우웅.
적들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월랑을 소환했는데.
- 아우…….
“꾸르르륵!?”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물속 환경에 놀란 녀석이 거품을 뿜어내며 허우적거렸다.
젠장.
- 침착해! 적염갑 활용! 물을 분해하고 공기를 흡수해!
- ……컹!
불타오르는 노을빛 오러를 온몸에 두른 월랑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는 그 잠깐 동안.
[묶어라!]
[그대로 짓눌러 주마!]
콰콰콰콰콰콰콰!
진득한 암흑 오러와 냉기를 품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어느새 그 주변의 모든 물결을 통제에 넣고 타이니의 전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다만 놈들의 살기등등한 영파가 무색하게도, 그 거대한 물결은 그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압박하는 데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끌겠다는 것 같은데……?’
더 깊은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저놈을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밑에 있는 놈부터 처리해 주지.]
쾅!!
타이니가 녹턴을 휘둘러 물결의 압박을 걷어 내며 몸을 아래로 트는 순간.
주인과 완벽하게 일체화된 월랑의 네발 밑에서 동시에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다시금 어둠을 밝히는 노을빛 유성이, 주변에서 휘도는 소용돌이를 헤치고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목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악마급 오크.
그 순간, 압박하던 물살의 흐름이 바뀌었다.
[어림없다!]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물살을 이용해서 잡아 두긴 어렵다고 느낀 것일까.
다시금 노을빛에 비치는 거리까지 다가온 두 오크의 무기에, 무시무시한 암흑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 무기가 직접 통제하는 물 속성에 더해 각기 바람과 냉기, 그리고 암흑의 속성까지.
사실상 저마다 세 가지 속성을 동시에 다루는 악마급 마족 둘이, 타이니를 압박하던 소용돌이의 기세를 서서히 줄여 가며 무기에 파괴력을 응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보란 듯이 가까이 다가와서.
피식.
‘이것도 시간을 끄는 거로군.’
위협을 느끼고 자신들한테 집중하라는 의도가 담긴, 일종의 무력시위다.
그리고 전투에서 가장 신나는 건, 바로 적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였다.
압박이 약해진 만큼, 타이니는 아래쪽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너희들이 나를?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크하하하하!]
그러면서 도발하듯 영파를 보내고, 더욱더 가속에 힘썼다.
권능의 조각을 손에 넣어 일시적이나마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보면서, 확실히 자각하게 된 사실이 있었다.
격이 오른다는 것은, 오러를 터득하는 것처럼 생물로서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
그 한계는 경지가 높을수록 넘기 어려워지기 마련이지만, 또한 그것은 태생과도 관련이 있다.
‘세상의 이치는 궁극적으로 보면 공평하다.’
몸이 약할수록 영혼이 한계를 넘기 쉽고, 반대로 강력한 생물일수록 승격이 어려워진다는 진실.
물론 너무 약한 생물은 한계를 넘을 도전조차 할 수 없고, 신화시대의 용은 예외적으로 그저 태어나 자라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이치를 일그러트리며 한계를 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대다수의 생물은 그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의문이 생겼다.
- 강력한 마족들이 어떻게 쉽게 경지를 올린 거지?
물론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짐작하지 못할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이니의 직감은 아니라고 말했다.
대다수가 폭급하고 난폭한 성정의 마족들이 그런 고행을 자청할 리가 없으니까.
그들이 다루는 에너지, 마기의 본질적인 특성 역시 그러하고.
‘오만의 장군, 케틀락을 사냥할 때 확실히 느꼈지.’
칠죄종 군단의 악마급 마족들은 어딘가 약간씩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실제로 군단마다 일곱의 장군과 열넷의 부관, 도합 스물하나의 악마급이 딱 맞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했었다.
그전에는 그저 이 세상을 근원을 관통하는 ‘일곱의 법칙’에 얽매인 것뿐이라고 여겼지만.
그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죄악의 권능을 부여받아 억지로 경지를 끌어올린 반쪽짜리들!]
인간과 비교할 수도 없는 막강한 육체로 오러익시더급 경지에 오른 마족들이 휘두르는 힘은 물론 강력하다. 동일한 경지의 인간은 초월무구나 다른 수단의 도움 없이는 대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하지만 잠깐이나마 오러마스터에 올라 봤던 그는, 놈들의 영혼과 육체의 괴리를 확실하게 확인했다.
그 자신감이, 자신을 압박하던 두 오크의 눈빛에 극한의 살기를 돌게 만들었다.
[웃기지 마라!]
[감히 하등한 중간계의 인간들이!]
[왜 그 말 안 하나 했다.]
역시 인간의 형상을 한 마족일 뿐인가.
자신을 압박하는 힘이 급격히 줄어드는 대신, 머리 위쪽에서는 놈들의 무구가 점차 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게 느껴졌다.
타이니는 그런 기세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더 아래쪽에 정신을 집중했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 봐라! 그런데 너희들, 그거 아냐?]
해구의 밑바닥에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오크…… 아니, 마족.
이제는 놈도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 듯, 무언가에 쏟아 넣던 힘을 급히 수습하고 있었다.
[내 손에 죽은 칠죄종이 이미 셋이다.]
타이니가 살벌한 미소를 짓는 순간.
번쩍.
노을빛 유성이 마지막 압박을 흩어내며, 더욱 깊은 해저의 거대한 문과 그 앞에 있는 오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