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후셀?
“인어족? 봉인?”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놀란 내색을 굳이 감추지 않았으니, 표정만으로도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을 터였다.
그런데도 통신구 너머의 우란 누드는 타이니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타이니 경은 물속에서도 싸울 수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전생의 경험 관련해서 그런 얘기를 하셨다면서요? 물을 폭발시키면 공기가 생긴다느니……. 솔직히 황당무계합니다만.]
대체 그걸 누가 말한 걸까.
“아니, 그건 전생에 그랬다는 거고요. 지금은…….”
어라, 가만?
[지금은?]
“……지금도 되긴 하겠네요. 씁.”
중력 속성을 주력으로 써 오는 동안 폭발 속성은 부가적으로만 활용하다 보니, 순수하게 폭발 속성만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다.
뭐, 굳이 그렇게 물을 터트려서 공기를 만들지 않아도, 블랙홀로 흡수하고 분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게다가 불굴도 있고.’
움직임이 느려지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물속에서 싸우는 것에 문제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근데 전 이곳 균열을 지켜야 하지 않나요? 잊으셨습니까?”
[방금 본인 입으로 그 겁쟁이 칠죄종은 한동안 안 나올 거 같다고 하셨습니다! 확률 높은 직감이라면서요!?]
……대제사장이라는 양반이,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무데뽀였다.
하지만 솔직히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거기다 블루윙과 연계되는 그 제나스의 영역과 성물의 힘, 그리고 에스티나와 루나까지 있다면 부하도 없는 하위 서열의 칠죄종 하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랑켄 평야의 시체는 전부 치웠으니까.’
서열 1위라는 나태면 몰라도 언데드 군주, 질투가 휴브리스만큼 강하진 않을 테니.
“검제는 뭐랍니까?”
[이 건에 관련해서는 대장군께 전권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대장군께선 이번에 발견된 포인트 한곳에 다른 초인들을 모두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포인트요?”
[어인족들이 최근에 한 포인트에서 괴물 같은 시어 드워프 셋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하, 사림답다.
그런데.
“제사장님은요?”
무심결에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 말에 통신구 속 코끼리 수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우울해졌다.
[제 몸이 자꾸 가라앉기만 해서, 저는……. 동대륙의 코끼리들은 수영도 한다던데, 저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
아…….
그 표정이 더 우울해지기 전에, 타이니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바닷속인데 괜찮을까요? 적들은 추적에 대비하고 있을 텐데요.”
[괜찮을 겁니다. 거기 있는 적은 고작 셋이고, 이쪽에서는 8대 기사가 갔으니까요. 아르곤 경의 마법도 있고, 파도의 세례도…….]
“파도의 세례?”
[아, 여기서 만든 단체 스킬입니다.]
“거기서 만들었다고요? 단체 스킬을?”
[어부 연합에서 쓰던 스킬을 개량한 겁니다. 꽤 훌륭하지요. 군단 스킬로써 대규모 활용도 가능하고요.]
“호오…….”
그 군단 스킬이라는 거,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다.
아니, 뭐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그랬는데도 코앞에서 놓쳤단 말이네요.”
[큭……. 그렇습니다. 젠장, 전 그때도 느려서 아무런 도움이 못…….]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에 거대한 코끼리 수인의 표정이 다시 급격히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농을 던졌는데.
“혹시나 일 잘못되면 사림이 책임지는 겁니까?”
[예? 어, 어째서요? 그, 그건…….]
파도가 치는 듯 흔들리는 커다란 눈동자를 보니, 괜스레 죄책감이 차올랐다.
‘이 사람한테는 농담도 하지 말아야겠구나.’
웨어비스트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그 흉포한 느낌이 온데간데없는 새로운 모습.
타이니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주워 담으려 할 때.
[……제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어인족들에게 합류해 주십시오. 대장군님들이 떠난 후에 커럽티드 오크 셋이 발견된 포인트가 있습니다.]
무언가 괜한 각오를 다진 듯한 표정의 우란 누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타이니는, 왜 그가 자신에게 통신을 한 건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거, 어인족이라는 사람들은 능력도 좋군요.”
[적들이 셋씩 나뉘어 흩어진 거라면, 다섯 포인트가 더 있을 겁니다. 아직 발견된 건 둘뿐이라 규칙성을 찾지 못해서 나머지 위치는 특정 못 합니다. 그러니…….]
커다란 코끼리 수인의 얼굴이 이제는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뭐, 좋습니다. 가지요. 확인된 놈들만 잡고 돌아오는 거라면 문제야 없을 테고요.”
우란 누드의 심신 안정을 위해 빠르게 대답하고 바로 일어서려는데.
그 뒤로 또 이어진 말이 발목을 잡았다.
[저기, 그런데…….]
“……??”
[제가 말씀드린 포인트에 가시면, 타이니 경에게 익숙한 얼굴이 있을 겁니다. 그도 일단은 아군이니, 다짜고짜 때려죽이는 것은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거, 사람을 무슨 망치 살인마로 보십니까? 하하.”
어울리지도 않게 실없는 소리를.
타이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통신을 끝마쳤고.
“티나, 나 배달 좀 해 줘!!”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주일이 넘어가던 강제 칩거를 깨트렸다.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후.
“타이니 경! 여기, 여기입니다!”
해상의 작은 무인도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금발의 중년인을 내려다본 순간.
“호오?”
타이니는 탄성과 함께 자연스레 녹턴을 꺼내 들었다.
“살아 있었네? 후……머시기.”
그 섬을 가득 채울 정도의 흉악한 살기는 덤.
카일룸의 등 뒤에서 뛰어내리며 놈을 향해 그대로 돌진하는데.
한순간에 지옥문에 한 발짝 걸쳤음을 직감한 후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 다급히 고함쳤다.
“자, 잠깐! 우란 누드 님이 전달 안 해 주셨습니까!!!?”
“……응?”
파아아아아앙.
“컥!”
후셀의 머리 바로 앞에서 멈춘 녹턴.
하지만 이미 그 충격파에 휩쓸린 후셀은, 종잇장처럼 휘날리며 십여 미터를 굴러 나가떨어진 후였다.
잠시 후.
“커헉!”
녹턴에 제대로 맞지 않았음에도 후셀의 몸에 스며든 멸살의 권능을 수거하자, 그는 그제서야 막힌 숨을 토해 내며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타이니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최근에 생긴 듯한 옆구리의 큰 상처를 봤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놈이 숨을 다 돌리기가 무섭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명해 봐. 최대한 간단하게.”
코앞에서 서슬 퍼런 미소를 지은 사신 앞에서, 후셀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 사신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손짓과 발짓을 동원해 가며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았다.
“……납득은 했어. 했는데 말이지. 네놈은…….”
이야기를 끝마친 직후, 타이니의 가늘게 떠진 검은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그제야 조금씩 이성이 돌아온 후셀이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죄는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한마디를 토해 내면서,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방금 자신은 일격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죽을 뻔했다.
‘나도 이제 챌린저급인데.’
몇 년간 생사를 오가는 중상을 치유하며 벽을 넘은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예전의 그 애송이 꼬마가 이젠 진짜 넘볼 수 없는 괴물이 되었음을 처절하게 실감한 것이다.
‘이게 대륙 최강의 기사…….’
그렇기에 그 순간 눈까지 질끈 감았는데.
돌아온 반응이 허무했다.
“……뭐,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예?”
“사림이 용서했으면 나도 용서한 거야. 쯧, 안내나 해.”
사림이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차마 반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어색한 분위기는 풀고 싶었다.
“어, 엄청 잘…… 자라셨군요. 그때의 애송이가…… 허업!”
이런 젠장!
말실수를 직감한 순간, 다행히도 괴물이 피식 웃었다.
“그 애송이한테 맞아 죽을 뻔한 놈이 참…….”
……팩트 폭행에 가슴이 뜨끔해졌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물속에서는 제가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범고래 형태로 몸짓해 봐야 잘 안 보이실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잘 따라만 오시면 됩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지금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아냐. 그때그때 물어보면 되지, 뭐.”
“……예?”
뭔 헛소리지?
내 말을 듣긴 한 걸까 싶은데.
“뭐 해? 안내해. 한시가 급하다며?”
……네가 날 패지만 않았으면 30분 전에 이미 출발했을 텐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당장은 가슴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은 괜한 경쟁심을 자극했다.
‘과연 네가 바닷속에서 어찌 움직일지 보자고. 절대 안 도와준다!’
이 애송이, 아니 광휘의 기사가 나름 바닷속에서의 생존 수단과 전투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이 범고래족인 자신만 할까.
후셀은 잠시간 그렇게 착각했다.
애초에 우란 누드가 이 포인트에 광휘의 기사를 혼자 보냈을 때부터, 거기에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고.
입수 후 5초 만에,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진실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파아아아아앙.
펑. 펑.
파아아아앙.
‘저거 뭐야?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발밑에서 연신 폭발을 일으키는 타이니의 몸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쏜살같이 해저로 나아가는 광경.
앞서 나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본 범고래 후셀이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그때, 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뭐 해? 안가?]
타이니의 목소리가, 그의 귀가 아닌 뇌리에 직접 전해져 온 것이다.
뽀그르르르르.
놀란 범고래의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온 순간, 또 다른 말이 전해졌다.
[어디 아프냐? 그럼 방향이랑 지형만 말해. 알아서 찾을 테니.]
뭐야, 대체!?
‘저거 어떻게 하는 건데?’
바닷속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태평해 보이는 타이니의 영파에, 후셀은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저건 리베르타스에 있는 돌고래족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음파와 비슷한 것일 거라고, 그렇게 억지로 납득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절대 옛날 얘기는 꺼내지 말자. 개기지 말자…….’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정체가 짐작도 안 가는 저 괴물에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왜 느려지지?]
흡!
솔직한 마음으로.
‘너무 무섭다.’
풍압으로 자신을 날려 버린 그 일격보다 지금이 더.
그랬기에 후셀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 악마급 마족, 커럽티드 오크들에게서 간신히 도망쳤던 장소로 타이니를 안내하는 자신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음, 조금씩 답답해지네.’
타이니는 점차 묵직해지는 압력을 느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대략 10m 정도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느껴지는 압력의 단위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쾅!
“끄르르르.”
눈치 없이 자신들에게 달려들던 크고 작은 해양 마물들은, 범고래 후셀의 이빨에 찢겨 나가거나 녹턴에 손쉽게 분쇄되었다.
그마저도 수중의 압력이 어느 지점을 넘어선 순간부터는 마물들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앞서 나가는 후셀도 이미 전신에 푸른 마나를 둘러서 버텨 가며 억지로 전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힘내. 도와줄까?]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한마디 보탰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 범고래의 전신에 둘러진 푸른 마나가 진해지더니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뽀그르르르.
범고래가 입가에 거품을 일으키며 앞 지느러미로 해저의 검은 구멍을 가리켰다.
그리고 후셀이 그곳을 지목하기도 전부터, 타이니의 감각은 이미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마치 뇌 속에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
자신의 시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검은 구멍 안에, 무언가 굉장히 위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 안에서는 악마급 세 개체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는데, 그 셋의 강력한 존재감이 비교적 흐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위험한 무언가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체 뭐지?’
물속에 있는데 식은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수고했다. 넌 돌아가.]
뽀그르르.
짧은 앞지느러미를 무슨 경례라도 하는 것처럼 세로로 세운 범고래가 빠르게 수면을 향해 상승하는 것을 지켜본 뒤.
‘가자.’
타이니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물속에서 다시 한번 빠르게 가속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저 검고 어두운 구멍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