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여왕의 봉인
인어족의 부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버 팽은 가장 먼저 고향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명예 살인이라 포장되면서 아직도 암암리에 자행되는 악습을.
‘확실히 없어져야 할 악습이지.’
실버 팽은 웨어비스트에 남아 있는 그 최악의 전통을 이 기회에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그럴 만한 근거도 생겼다.
대제사장, 우란 누드가 슬며시 말해 준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인어족은 아가미로 호흡했지만, 해양 생물의 태를 가지고 태어나는 수인족은 허파를 가지고 있습니다. 숨 쉬는 방법부터 다르다는 겁니다. 아예 종이 다른 거죠.”
고대 정령 펜릴 역시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 내가 연구에 힌트를 주었지. 인어족 때문에 억울한 희생이 생겼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태 그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녀석이 없었는데……. 이 녀석, 이번 대 우란은 관심이 많더군.
당대의 우란 누드는 코끼리 수인. 그 역시 남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기에 그 악습의 희생자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던가.
그런 그가 타의로 자식을 떠나보내야 했던 수인족들과 함께 수십 년간 몰래 연구한 결과라 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본디 다음 대 국왕 즉위식에서 꺼낼 안건이었습니다.”
다만 문제라면, 웨어비스트 왕국에서 문제 삼는 다른 통계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져서 살아온 이들 대다수가 범죄자가 된다는 건데 말입니다…….”
“그 또한 사실이기도 하지요.”
태생적인 불행 때문에 버려진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살면서 저지른 죄를 그것으로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해 지은 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만약 그런 선을 넘은 이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수인족의 대장군으로서 새로운 고민이 생기긴 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지요. 일단,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다 동원하고 봅시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현명한 결정입니다, 대장군.”
“뭐, 대제사장이 숨어 사는 이들의 비선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만 말이죠.”
“불행한 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네 녀석이 오지랖이 넓은 것뿐이다.
펜릴까지 끼어들어 괜한 타박을 줬지만 우란 누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실버 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금세 가까워졌다.
파아아앙!
바닷물이 수십 미터 가까이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매끈한 유선형의 몸체를 자랑하는 범고래 수인이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그가 유연한 동작으로 해안가의 착지한 순간, 그 모습은 어느새 멀쩡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놀랍군.’
다만 조금 보기 흉한 알몸이었지만.
“쯧.”
이미 이럴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실버 팽이 곧바로 준비했던 옷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그것을 잡아챈 금발 머리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빠르게 옷을 걸쳤다.
훨씬 덩치가 클 경우를 대비했던 탓에 옷소매가 축 늘어진 꼴이 보기 좋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인사가 돌아왔다.
“별말씀을. 그런데 약속 시간보다 상당히 빨리 오셨군요.”
실버 팽을 대신해 대답한 우란 누드의 말에 움찔하는 중년인.
“……급히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리 나쁜 이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으니.
‘과거 따위 조사할 시간도 없다.’
실버 팽의 시선이 우란 누드를 향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인 코끼리 수인이 범고래족 남자를 이끌고 마련된 자리로 향했다.
“……리트만?”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말한 이름에, 실버 팽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말 이름이 있을 텐데?”
“버려졌을 때 바구니에 새겨져 있던 이름 같은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말에 실버 팽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질 때, 우란 누드가 끼어들었다.
“어인족 중에는 가명으로 살아온 이들이 많습니다, 장군. 저들이 장군처럼 크로스 폼으로 생활하는 것도 아니니, 위장하기에는 공용어 이름이 좋지요.”
“그…… 꽤 친하신 모양입니다.”
“아니요, 저도 처음 뵙는 분입니다. 저는 그냥 출루 공의 소개를 믿을 뿐이지요.”
코끼리 수인의 자상한 눈빛 때문일까.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다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진짜 이름을 꺼냈다.
“후셀. 그게 제 아기 바구니에 새겨진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후셀(희망)이라. 아명으로는 흔하긴 하군.”
“버려 놓고 그런 이름을 짓는 것은 웃기긴 합니다만 말이죠.”
후셀의 냉소적인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자, 실버 팽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이젠 그런 일이 없도록 할 걸세. 명예 살인이니 뭐니 하는 악습을 없앨 만한 연구 결과도 있고.”
“연구…… 결과라니요?”
“그건 여기 대제사장이 말해 줄 걸세.”
“최근에 나온 결론이라 아직 출루 공에게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실버 팽의 눈짓을 받은 우란 누드가 이른바 ‘허파 생물’이라는 이론을 설명해 주고 나자.
후셀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우, 우리가…… 다, 다르지 않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허파도 그렇고, 젖을 먹는다는 것부터 체내에 새끼를 배는 것까지 모두 같습니다. 우리 연구원들은, 그런 개체들을 포유류라는 말로 같이 묶을 수 있다더군요.”
“포유류…….”
“그 명칭을 제안한 이는 젖을 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아이의 어미였습니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수인족을 모두 동물로 뭉뚱그리지만, 적어도 우리 왕국에서는 그 기준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지요.”
우란 누드의 설명이 끝나고.
“그리고 차후에 누가 왕이 되건, 이 재앙을 극복한 후에는 그 명예 살인이라는 악습이 웨어비스트에서 없어질 걸세.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지.”
실버 팽이 그 말을 보태는 순간, 눈물을 흘리던 후셀이 더욱 격한 감정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 흐. 흐……윽. 가, 감사합니다, 제사장님.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중년의 사내가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 내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실버 팽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후셀이 그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었을 때, 예상 밖의 문제가 생겨났다.
“악마추종자!?”
실버 팽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순간, 후셀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한때 몸담았었습니다. 수많은 악행을 돕거나, 알면서도 방관했었지요. 그 죄를 청합니다.”
무릎을 꿇고 목을 내미는 후셀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기에, 실버 팽은 오히려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죽여 달라고 그리 말하는 건가?”
“모든 것은 저와 같은 이들이 양지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게 이뤄진다면, 저의 죄는 죄대로 대가를 받아야겠지요. 죽여 주십시오, 대장군.”
그를 만나기로 했을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
실버 팽은 고개를 숙인 후셀을 내려다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다행히 그때 우란 누드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줬다.
“대장군, 지금 여기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당장은 리베르타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 아 그렇지요. 흠. 좋다, 후셀. 네 죄는 이번 일의 공을 봐서 처분을 결정하겠다. 우리, 아니 인류의 뜻을 너와 리베르……?”
“리베르타스. 고대어로 자유라는 뜻입니다, 대장군.”
우란 누드의 말에 헛기침을 한 실버 팽이 다시금 후셀을 바라보았고.
“크흠, 그 리베르타스에 있는 동족들에 전하라. 이 일과 상관없이, 죄가 없는 모든 어인족들은 이제 수인족에 통합될 것이라고. 내 이름을 걸고, 명예 살인이라는 악습을 근절시킬 것이라고 알려라.”
단어 하나에 모양이 좀 빠지기는 했지만, 후셀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감사, 감사합니다. 대장군.”
다시금 그의 눈가에 감동의 눈물이 흐르려던 찰나.
“너희들은 바닷속에 숨어들어 인어족의 봉인을 풀려는 악마급 마족들을 수색해야 한다.”
“……예?”
“이것은 인류의 존망을 다투는 임무이니, 최대한의 전력을 동원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저기요……?”
충격적인 임무에, 터져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 * *
[제1봉인 클리어.]
나태의 군세 서열 2위, 다크 엘프(Dark Elf) 에보니가 전해 온 영파에 그랜달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역시 에보니. 일주일 만이라니 빠르군. 이쪽으로 합류해!]
[접수.]
자연스레 미소를 짓는 순간 입에서 공기가 새어 나가며 부글부글 기포가 일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은 산소가 부족하다고 생존에 지장을 받을 경지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곳도 서둘러라. 귀찮은 일은 빨리 끝내자고.]
[예. 진행 중입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하고 있다고. 보채지 마, 대장.]
깊은 바닷속에서 아득한 거리를 뚫고 전해지는 영파들.
하나하나가 믿음직한 목소리들이었지만, 정작 그런 그들의 보고를 받고 중계하는 그랜달은 한곳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한참 아래쪽 해저에 뻥 뚫린 검은 구멍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의 빛마저 빨아들여 검게 보이는 그 구멍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케 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그랜달의 푸른 눈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은 그저 지루함뿐.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옆에 있는 두 부관, 티론과 로이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겹네요, 대장.]
[차라리 저게 움직여 줬으면 좋겠다.]
그들의 역할은 이 최종 봉인지를 지키는 ‘가디언’이 혹시나 ‘작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서라. 막상 움직이면 상당히 귀찮아져. 다들 모여서 한 번에 끝내야 한다.]
그러니 지루해도 참아야 했다.
‘육지라면 혼자서도 처리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지.’
바닷속에서도 생존에는 무리가 없긴 하지만, 그것은 전투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
나태의 군세 특유의 귀찮음과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아 내며 주군의 말씀을 떠올렸다.
- 여왕의 봉인을 풀면 인어족이 부활한다. 그렇게 되면…….
- 강력한 칠죄종 하나와 무수한 수륙 양용 군대가 우리의 힘이 될 것이다.
‘그래, 참아야 한다.’
당장은 귀찮고 짜증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혹스러운 영파가 그랜달에게 전해졌다.
[대장, 이상한 것들이 뒤를 밟았어. 처리하려 했더니 바로 튀어 버리네? 이거, 물고기가 아니라 지성체 같아.]
[뭐?]
중간계에 바닷속에서 움직이는 지성체가 있던가?
찜찜했지만,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는데.
[따질 게 뭐 있어? 죽여.]
[그게, 죽이려 했는데 그새 도망가 버렸어. 그래서 보고한 거야.]
동료인 시어 드워프(Sear Dwarf) 하톤의 말에 한순간에 혈압이 치솟았다.
[야, 이 한심한 놈……!!]
[아, 이게 물속이라 움직임이 조금 어색해. 나 마법 약하잖아. 미안.]
[야 이 자식아!! 그걸 말이라고!!]
뽀그르르르.
한순간 그랜달의 입가로 거품이 일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해제 작업을 마무리해. 그리고 혹시나 방해가 들어오면 말하고! 다른 녀석들도 혹시 모르니 주의해!]
[알았어.]
[듣고 있어, 대장.]
[하톤이 어설픈 거지. 흥.]
[내가 사고 칠 줄 알았다.]
영파로 모두에게 호통을 쳐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들은 느슨하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죄악의 힘, 나태의 굴레.
최강의 마족 직속으로서 엄청난 무력을 자랑하는 그들이었지만, 나태라는 죄악의 힘을 받아들여 악마급에 올라선 만큼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 그러니 우리에겐 복수심에 불타는 인어족이 필요하다.
그랜달은 주군의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어차피 시간문제다.’
다른 곳의 봉인을 다 풀고 동료들이 이곳에 모이면, 저 가디언을 처리하고 여왕의 마지막 봉인을 푼다.
그랜달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 지옥의 입구 같은 검은 구멍의 끝에는, 거대한 생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 아니 감각이 닿는 범위만으로는 그 크기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거대한 생물.
신화시대에도 공포의 존재로 알려졌던, 거대한 문어를 닮은 생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