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희망과 자유
[인어족의 봉인에 관련된 고대의 자료를 전부 뒤져라! 봉인의 위치를 확인해!]
황실 마탑과 현자의 탑에 마도사들의 전언이 전해지자, 마법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젠장, 갑자기 또 무슨 인어족이래? 그게 언제 적 얘기야?”
“신화시대의 전설이잖아? 고대 마계 대전보다 한참 전이야!”
“X발, 그런 자료가 지금 남아 있겠어?”
“나도 몰라, X발! 일단 찾아. 없어도 찾아!”
“제엔장!”
“지급이다. 서둘러! 탑에 남은 모든 사람 동원령이야!”
“그건 전부터 그랬거든…….”
“입 털 시간에 움직여!”
우당탕탕.
대륙의 2대 마탑이 동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막연하게 고대의 자료를 모두 조사하라는 것보다야, 그나마 이렇게 지표가 있는 명령이 더 수월했을 테니.
나태의 균열이 열린 지 5일, 그리고 갓 핸드가 신탁을 받은 지 2일 만에, 황실 마탑에서 한 가지 자료가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에게 전달되었다.
“인어족의 여왕. 스스로 신성을 획득해 신을 자청했던 반역자……. 고대의 마계 대전이 시작되기 몇백 년 전에 일어났던 인어족의 반역 전쟁이 신화시대의 끝을 가속시킨 것으로 추정. 전설에 따르면 여왕은 일곱 조각으로 나뉘어 해저 깊은 곳에 봉인되었다고 하며, 장소는 불명…….”
보고서를 읽어 내리는 티네스의 말에,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랑켄 평야로 돌아간 에스티나를 제외한 8대 기사와 세 명의 마도사, 그리고 우란 누드와 펜릴. 거기에 남해 어부 연합의 간부들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가운데,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이 말을 보탰다.
“현자의 탑에서 올라온 보고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여왕의 봉인지는 불명. 선인들이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를 조합해 보면, 마족들이 그 반역자의 봉인을 풀려 한다는 것 같습니다만…….”
흐려지는 검제의 말꼬리가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대변했다.
“우리 기록에도 남지 않은 봉인지를 마족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놈들이 정말 알고 있는 게 맞을까? 내 직감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하이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보태자, 갓 핸드가 전신으로 서슬 퍼런 기세를 뿌렸다.
“여신께서 하신 경고를 의심하지 마시오.”
“……거, 의심하는 건 아니고. 킁. 젠장.”
하이넨이 투덜거리다가 입을 다무는 것을 모두가 모른 척할 때.
입술을 질끈 깨문 검제가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마족들이 그걸 어찌 알았는지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지금 알아야 할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하냐는 건데…….”
그의 답답한 시선은 다시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향할 뿐이었다.
그러자 내내 어두운 기색이던 크롬벨이 불쑥 나섰다.
“솜누스, 그러니까 지금의 나태로 추정되는 칠죄종이 과거에 인어족의 역사를 추적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위험 요소를 확인해 보는 임무였던 걸로 아는데, 그게 이렇게 후환으로 남을 줄은 몰랐군요.”
“크롬벨 경도 그 위치를 모르시는 겁니까?”
“예. 유감이지만, 그것은 당시에도 천계에서 직접 관리하는 극비였습니다.”
“하……. 봉인지를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게 바닷속이라는 게 문제군요.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따져 봅시다. 티네스 님, 마법으로 바닷속에서의 호흡을 조절하는 게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흠흠. 비전투 분야는 내 전공이 아니라…….”
티네스의 겸연쩍은 시선이 아프만에게 향하자, 혹한의 마도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현존하는 마법을 제가 쓴다고 가정할 때, 며칠 동안 바닷속에서 숨 쉬게 하는 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오러까지 동원된 전투를 치른다면 솔직히 어려워질 것 같…….”
“그 문제는 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아르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아프만의 눈이 커졌지만, 아르곤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오러 마법으로 옥시전 버블을 시전하면, 설령 오러유저 간의 전투에서도 마법이 깨지지 않을 겁니다. 머리에 오러를 적중당하지만 않는다면요.”
아프만이 제자의 성장을 느끼며 대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 저릭이 삐죽 튀어나온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머리를 맞는 거라면 평상시에도 치명적인 건 마찬가지지. 바닷속에선 좀 더 주의하면 된다. 흠. 그 정도면 충분해.”
모두의 표정이 조금 가벼워지는가 싶을 때.
어부 연합장 테헤논이 그 분위기에 다시 찬물을 뿌렸다.
“숨 쉬는 것만 문제일 것 같습니까? 이래서 내륙인들이란…….”
혀를 차는 모습에 다시금 시선이 몰리자, 아내 로엘이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억!”
억울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던 그는, 모여드는 시선을 보며 이내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해저라 했잖습니까, 해저! 그곳의 압력은 지상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
“일반인이라면, 해수면에서부터 일정한 깊이까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단숨에 혈액 순환에 이상이 생기고 병에 걸릴 정도란 말입니다.”
테헤론의 설명에도, 듣고 있던 내륙인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들에겐 그 말이 확실히 와닿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무슨 전설의 봉인지 같은 경우라면, 훨씬 깊은 해저에 있겠죠. 오러유저라 해도 견디기 힘든 압력이 존재할 겁니다.”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아무리 마법으로 호흡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전투는커녕 그냥 살아남는 데도 급급한 환경일 확률이 농후합니다!”
“하…….”
“거기다 바다는 대륙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 넓은 바다에 봉인지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다 뒤집니까? 설령 호흡과 압력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우리 연합의 주민 전부를 투입해도 무립니다.”
테헤논의 말은 그나마 좋아지려던 분위기를 다시금 침묵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놈들은 하필 왜 여기에 균열을 열었을까?”
웨폰 마스터 그리드가 하늘색 콧수염을 튕기며 꺼낸 한마디가 그 침묵을 깨트렸다.
“음?”
“만약 봉인지가 머나먼 바다 한가운데의 어딘가였다면, 그 근처 섬에다 균열을 열지 않았을까? 아무리 대양이라도 섬은 드문드문 있잖아.”
“허…….”
검제의 감탄 어린 시선에 그리드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부터 라이벌이라 부르지도 못할 만큼 성장해 연합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지게 된 악우의 감탄이, 그에겐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뭐, 그마저도 놈들이 강림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거란 가정부터 들어맞아야 하겠지만 말이야…….”
“아니, 일리가 있어. 적어도 봉인지가 인술라에 가까울 확률이 높아.”
그 말에 다시 연합군 초인들의 시선이 테헤논 쪽으로 몰렸다.
“아니, 이 근처 바다는 안 넓어 보입니까? 남부 대양 쪽은 깊이도 알 수 없는…….”
모두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쏟아지자, 난감해하던 그가 결국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오케이, 오케이. 뭐, 바다 전체를 뒤지는 것보다야 말은 되지요. 수색 영역이 대폭 줄어들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문제는 해결 가능하겠습니까? 특히 해저 압력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오러유저들은 몸으로 때우고, 다른 수색 인원들은 마법으로…….”
“거기다 해저 마물도 문제입니다.”
“음?”
“여기 바닷속 전투에 익숙한 인원이 있습니까? 저희도 배 타고 싸우는 건 모두가 익숙해도, 바닷속에서 마물과 전투할 수 있는 인원은 몇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나마도 육상에서의 전투력과는 까마득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요.”
“…….”
테헤논이 거듭 정곡을 찌르자, 다시금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다.
“수인족 중에 있지 않을까?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이넨이 불쑥 꺼낸 말에, 실버 팽이 이번엔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에 당황하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소이다. 다 추방되거나 어릴 때 죽으니.”
“공식적으로는 없다? 그럼 비공식적으로는요?”
갑자기 나온 로엘의 지적에 실버 팽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소문은 들은 적이 있는데. 확실하진 않소이다.”
그 순간.
“그건 제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장군.”
여태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코끼리 수인, 우란 누드가 붉은 눈을 들어 실버 팽을 바라보았다.
그에 실버 팽이 놀란 표정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볼 때.
검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찾아봐 주시오. 문나이트, 우리가 지금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소? 관련된 전권을 맡기겠습니다.”
“……알겠소.”
썩 내키지 않은 표정.
하지만 실버 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대륙 동남부의 해상.
카룬의 남쪽, 인술라의 동쪽 먼바다에 존재하는 작은 도시만 한 섬.
멀리서 보면 그곳은 짙은 밀림이 가득한 독특한 섬일 뿐이었다.
대륙의 어떤 나라의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인도.
다만 이곳에서 지내는 이들 사이에서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이젠 아예 이 리베르타스에서 눌러살 생각인가, 후셀? 부상이 다 회복된 지 1년은 넘은 거 같은데.”
짙은 수풀 사이로 해안가가 보이는 절벽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 후셀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 말에 담담하게 대꾸했다.
“또 신경을 긁으러 왔나, 출루?”
“그럴 리가. 난 네 선견지명에 감탄하고 있을 뿐이야.”
“음?”
의외의 대답에 후셀이 뒤돌아보자, 인상이 거친 푸른 머리의 사내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믿어 마지않던, 세상을 바꿔 준다던 악마추종자들이 바라고 바라던 재앙. 그 소식이 또 들어왔거든. 세상이 확실하게 바뀌고 있어. 뭐, 네 말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좀 더 들어 보겠어?”
그 말에 후셀의 각진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성년이 된 후부터 2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쳐 왔던 조직의 몰락.
그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출루 이 녀석은 줄곧 이런 식으로 자신의 속을 긁어 대곤 했다.
더구나 마계 대전이 벌어졌다는 소식 후에는 더욱.
“매번 말하지만, 그때 내 선택을 너도 존중했었다.”
“그들이 만들어 줄 혼란이 우리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한 거였지, 이런 재앙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
“정말 몰랐나? 그놈들이 하던 짓거리가 있을 텐데?”
버럭 고함을 지르던 후셀은 이내 깊게 가라앉은 출루의 눈동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알아. 알지만…….’
이곳 리베르타스, 고대어로 자유라는 뜻을 가진 섬은 웨어비스트에서 버려진 수인족들의 삶터였다.
정확히는 스스로 어인족이라 이름 붙인, 해양 생물의 태를 가진 수인족들의 삶터.
‘그렇게 과격한 수를 써서라도, 우리를 세상 밖에 당당히 끌어내 줄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슴속에 가득한 진심.
후셀은 그 말을 굳이 꺼내지도 않았다. 중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니까.
그 마음을 짐작했을까, 출루는 그제야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 아. 그래, 그만하지. 근데 오늘 내가 널 찾아온 목적은 그게 다가 아니야. 비선을 통해 이상한 정보가 들어왔거든.”
“이상한 정보?”
“웨어비스트 대장군, 그 문나이트가 우리를 찾는다는 정보다.”
“뭐!?”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후셀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드디어 꼬리가 잡혔나?’
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어진 출루의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 꽤 신빙성 높은 비선을 통해 전해 온 정보라서, 사실 나로서도 솔깃하거든.”
그리고 그 말은,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후셀의 안색을 확 굳어지게 만들었다.
“……필요? 이제 와서? 우리를?”
버릴 때는 언제고?
후셀의 반문에는 수많은 감정이 깔려 있었지만, 그중 가장 진한 것은 아무래도 분노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대장군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 명예 살인, 해양 생물의 태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을 처단하는 그 치가 떨리는 악습을 근절시키겠다고.”
“……우리 색출해서 처단하려는 수작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네게 부탁하려는 거다.”
“날?”
“아무래도 네가 외부에 가장 오래 있었으니까, 대표로 가 줘야겠다. 진위 여부도 확인할 겸.”
하지만 그로선 아무리 그래도 미덥지가 않았다.
“……날 죽일 셈이냐, 출루?”
“내가? 아니지. 우리 동족 전부를 죽일 뻔한 건 너였지. 이번 일로 퉁 치자고, 후셀.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될 테니까. 그래도 싫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어인족 전부를 악마추종자에 가입시키려 했던 과거까지 들추는 그의 말에, 후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나야 할 상대는?”
“몰라. 12대 기사 중 한 명이라는데, 대장군이 직접 올지도.”
“흐. 진짜 함정이면 바로 죽겠군.”
그 말을 하는 순간, 몸통 박치기 한 방으로 자신의 전신의 뼈를 으스러트렸던 그 꼬마가 떠올랐다.
이제는 광휘의 기사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다던가?
또 다른 이름으로는.
‘인류 최강의 기사.’
후셀은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차라리 그놈이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응징한다면, 차라리 그리 큰 이름이었으면 했다.
동족이라기보다 원수 같은 수인족, 문나이트가 아니라.
“……가지.”
“좋은 선택이야. 아, 최대한 빨리 보자고 하더라고. 인술라 알지?”
“남해 어부 연합?”
“그래.”
“죽기 딱 좋은 곳이군.”
역시 함정일까.
후셀이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 출루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살아 돌아와라. 희망을 가지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후셀이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출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후셀, 난 여전히 가끔 궁금하다.”
“뭐가?”
“네 이름인 후셀은 희망, 내 이름인 출루는 자유……. 우리 부모는 대체 우리가 버려진 후에 어찌 될 거라 생각했을까?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글쎄.”
“적어도 우리 애들만큼은 희망을 갖고 자유롭게 살게 하자, 후셀.”
“…….”
“알잖아? 우리 애들 절반 이상이 육지 짐승의 태를 가지고 있는 거. 단지 부모가 우리라는 게 문제지. 일이 꼬여도 그 애들은…….”
“알아, 그만해! 간다고!”
뒷말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후셀은 그 즉시, 절벽 밑의 바다를 향해 그대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