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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417화 (417/500)

417화. 나태의 군세

쾅!

사람의 주먹과 얇은 장검이 부딪치는데, 사방을 떨쳐 울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둘 중 주르륵 밀려나는 것은 푸르스름한 빛을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장검의 주인.

“과연, 타이니 군. 아니, 이제 군이라 부르는 것도 웃기는군요. 타이니 경, 잘 배웠습니다.”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을 털어 낸 제나스가 정중히 예를 표하자.

“실력이 많이 느셨, 아. 이건 실례죠. 흐.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말이 꼬인 타이니 역시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련을 마무리했다.

강림 예정일 하루 전.

비록 이곳 랑켄 평야는 지정된 포인트가 아니라고는 하나, 필요 이상으로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강자의 충고는 언제나 힘이 되지요.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타이니 경.”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겸양을 표하는 타이니를 보며 제나스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래도 됩니다.”

“예? 제가요?”

“타이니 경의 전생에는 제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즉, 경이 절 살려 낸 거죠.”

“아…….”

“그 은혜, 갚을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제나스의 과분한 말에 할 말이 없어 그저 웃어넘기려는데.

옆에서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럼, 내 차례는?”

“오늘은 쉬자. 혹시 모르잖아. 안 나올 것 같긴 한데…….”

루나의 투정을 가볍게 받아넘긴 타이니는 근처에 자리한 검은 균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동대륙으로 떠날 때와 똑같은, 전혀 변함이 없는 균열.

‘이대로 질투가 강림하지 않는다면, 저건 영원히 남아 있는 건가? 내가 들어가 봐? 그럼 마계가 나오려나?’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조금의 변화도 없는 상황.

12대 기사 중 자신과 루나, 제나스가 이곳에 남았다.

게다가 블루윙을 비롯한 인류 연합의 최정예 병력, 드워프의 엘로랑 전사단과 수인족의 근위 기사단, 그리고 오크의 바토르 전사중 일부까지 함께 차원 균열 앞을 지키고 있다.

언제든 질투가 강림한다면 성물의 가호 안에서 전투에 임할 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타이니로선 왜인지 단기간에 질투가 강림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감만 믿고 움직이기에는 너무 중대한 사안인 만큼 다수의 결정을 따르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다 보니 왠지 찜찜했다.

“여전히 같은 생각입니까, 타이니 경?”

이마의 땀을 적당히 닦아 낸 제나스가 그리 물어 오자,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좀 더 강하게 주장해 보지 그랬습니까? 신성을 반쯤 얻으며 직감도 더 정확해졌다면서요.”

“그래도 타인을 설득할 근거가 없으니까요.”

“지금 동생 말이면, 웬만하면 믿어 줄 듯.”

불쑥 끼어든 루나의 말에 헛웃음을 짓는데, 제나스 역시 같은 말을 보탰다.

“적어도 고려는 해 보겠지요. 아무리 각하라도.”

“……그랬어야 했을까요.”

쓴웃음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경험상 정확성이 높다곤 해도, 직감만으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전술 운용을 바꾼다?

누가 그러라고 해도, 자신이 용납하지 못할 짓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 균열을 만든 놈을 생각하게 되었고, 또 짜증이 일었다.

“질투라는 놈, 칠죄종이 겁쟁이인가? 부하가 전멸했는데 여태 기어 나오지도 않고. 나라면 부하들이 불쌍해서라도 튀어나왔겠다.”

“그리고 경한테 맞아 죽었겠지요.”

“맞아. 맞아.”

왜인지 제나스와 루나의 쿵짝이 잘 맞는 듯했는데, 그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곧바로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은 상황이다 보니 긴장이 풀려 있던 그는, 이내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흠……?’

제나스와 루나, 그리고 아르곤과 루나.

두 가지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 가며 비교해 보는데.

아무리 봐도, 누구에게나 존대를 하고 예의 바른 은발의 미남이 톡톡 튀는 루나에게는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역시 아르곤 그 새끼는 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아르곤이? 뭐?”

갑자기 눈앞의 그림자에서 루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 씁! 퉤퉤퉤.”

깜짝 놀라 혀를 깨문 타이니가 인상을 쓰는데.

루나가 그 앞에서 연신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아르곤이 뭐? 왜? 무슨 연락 왔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녀의 물음에 답하다 보니, 어째 쎄한 기분이 들었지만.

“……에이, 설마.”

괜한 상상이려니 하고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설마? 뭐? 걱정되는 게 있어? 아르곤한테?”

이내 질문을 퍼붓는 루나의 호기심 어린 표정이 다시 타이니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허, 허허허…….”

그는 애써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결심했다.

역시.

‘아르곤 녀석을 죽여야겠다.’

아니, 반쯤 죽여 놓거나 적어도 루나한테 수작을 못 부리게 해야…….

“왜 뭔데? 동생, 지금 표정 무서웠는데?”

“아, 아냐. 별일 없어.”

둘러대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제 이렇게…….’

전생에는 몰랐던 핏줄.

가까운 혈연관계도 아닐 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살갑게 느끼게 되었을까.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몇 년의 시간이, 그 먼 핏줄을 이렇게 가깝게 당기게 한 것 같았다.

“별일,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없어.”

“윽! 뭐야?”

그가 루나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돌아설 때.

이번에는 제나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남쪽으로 간 분들에 대한 직감 같은 것은 안 듭니까?”

“……음, 예. 뭐, 직감이라는 게 원한다고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뭐, 그 인원이 갔다면 크게 걱정은 안 됩니다만.”

“남해 어부 연합의 전력이 변수겠죠.”

“뭔가 잘못된다 해도 그 한 몸 빼낼 정도의 실력은 되는 분들이니까요.”

“뭐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당장 나태가 강림할 것도 아닌데, 그 형편없다는 군단 정도야……. 변수가 생긴다면 그때 통신을 받고 움직여도 될 겁니다.”

눈앞의 균열을 응시하며 타이니는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꼬박 하루 뒤.

그들의 짐작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남해 인술라에 벌어졌다.

* * *

“이제 곧…….”

검제가 나직이 흘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1km쯤 남쪽.

해안가에 검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기다!”

“모두 준비!”

“해안가에서 멀어져!”

우르르르.

한곳에 모여 있던 인술라의 주민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고.

쿵.

테헤논이 발을 구르는 순간, 집 밖에 나와 있던 주민들 중 성인, 달리 말하면 용맹한 어부이자 전투원들 모두의 몸에서 옅은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섬의 중심에 있던 아르곤이 마기아를 뽑아 들고 허공에 거대한 동대륙 문자를 그렸다.

[調律(조율)]

[增幅(증폭)]

[合一(합일)]

그러자 어부들의 몸에서 솟구치던 마나가 섬에 있는 초인들 모두의 기운과 합쳐지며 그들의 기세를 크게 증폭시켰다.

군단 스킬, 파도의 세례.

무려 5만에 가까운 대인원의 마나가 균열 근처에 대열을 갖추고 선 이들에게 한순간에 집중되고.

“우오오오오!”

“이거 멋진데!”

“어떤 마물이라도 와라!”

끓어오르는 힘의 세례에 바다 사나이들이 호기 어린 외침을 토해 낼 때.

쩌저저적.

파아아앙.

검은 균열이 일순간 터져 나가며, 허공에 거대한 타원형의 포탈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쏴!!”

파바바바박.

며칠간 합을 맞춘 대로, 마나를 실은 화살이 균열을 향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

균열이 열리고 튀어나올 마물들을 노린 총공세.

그런데.

마치 그에 응답하듯, 균열 안에서 마물이 아닌 검은 기운을 실은 화살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포물선이 아닌 직선으로, 섬뜩한 빛살처럼 쏘아지는 무수한 화살들.

“헙!?”

“뭐야!?”

타다다다당!

“아악!”

9대 기사와 남해 어부 연합의 간부들이 앞을 막아서 봤지만, 예상치 못한 공세에 희생자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고대 마계 대전을 겪은 용사의 경험담을 들은 연합군은 살찐 곰이나 거북이 형태의 마물 등에 대비했었으니.

예상을 빗나간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크롬벨을 향하는 순간.

시선을 받은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균열 안에서부터 날아오는 화살.

마치 화살에 눈이 달린 것처럼 타깃을 확인하지 않고도 적중시키는 고도의 궁술을 쓰는 족속이라면, 그가 알기론 하나뿐이었다.

엘프.

“설마……?”

그의 머릿속에서 한때의 동료이자 인류 최악의 배반자, 솜누스와 함께 하던 이들 중 일부가 떠오른 순간.

쩌어어어엉!

한창 크게 벌어져 가던 균열 안에서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흐아압!”

콰아아아앙!

크롬벨의 성검, 포이나가 빛의 보호막을 정면에 둘러 그 충격파를 막아 내는 순간.

화살 세례가 그친 균열의 안쪽에서, 스무 명 안팎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성들.

“아으, 정말 지겨@!$웠꽈.”

“여기가 중간계@!$임꽈.”

“진짜 허약한 [email protected]#네.”

마물의 포효 소리가 아닌, 분명히 공용어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말소리’.

그런 말들을 뱉어 내는 이들의 외양은 전투를 대비하던 인류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엘프?”

“드워프?”

“인간족과 수인, 그리고 오크까지?”

“뭐야 이거?”

조금 피부가 까맣기는 하지만 분명히 현생 인류와 닮은 생물들이 차원 균열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당황하는 그들 사이에서.

[네놈들! 변절자들의 후손인가!?]

일그러진 크롬벨의 분노한 영파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말에, 균열에서 나온 이들 가운데 선두에 선 자가 똑같이 영파로 응답했다.

[변절자라니? 순리를 따른 이들의 후손이지. 근데 현생 인류가 어찌 그걸 알지?]

짙은 갈색빛을 띠는 거무스름한 피부.

재질을 알 수 없는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가, 피부색에 비해 유난히 새하얗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다.

[그 빌어먹을 쓰레기들이 주제에 후손까지 낳았다!?]

이어지는 크롬벨의 폭언에 그 미소는 굳어졌지만.

[이거, 우리를 제대로 아는 자가 있군. 그분의 말씀과는 좀 다른데?]

남자의 영파에서 묻어나는 여유는 여전했다.

그리고 그에 다시 크롬벨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작 스물하나? 이게 군단이라? 흥, 썰어 버려!”

“우와아아아!”

차가운 검제의 목소리와 함께, 연합군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선두에 선 자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초인, 문나이트 실버 팽이었다.

파지직.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어느새 노란색 전격의 오러가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고.

붉게 달아오른 온몸의 근육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위로 새로운 군단 스킬, ‘파도의 세례’까지 덧씌워졌으니.

여태껏 없었던 최상의 속도로 달려 나간 그가 선두의 남자를 향해 할버드, 라이트닝 로드를 휘두르려는데.

[어어, 지금은 아니야.]

조롱하는 듯한 영파와 함께 스물한 개체 검은 인류, 마인족들의 전신에서 섬뜩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더니, 실버 팽을 앞세워 돌진하던 연합군 선봉들의 움직임을 갑자기 느리게 만들었다.

아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을 뿐 실상은 마인족들이 극도로 가속한 것이었다.

놀라 부릅뜬 실버 팽의 눈을 보며, 마인족의 장군이 다시금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런 그의 얼굴 근육조차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가 군단 특성상 좀 느리거든, 그래서 그분께서 빠른 단체 스킬을 개발해 주셨지.]

무려 오러익시더급 스물한 개체가 동시에 사용하는 단체 스킬.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순리를 거부한 자들아.]

오직 속도만을 폭발적으로 높이는 극단적인 스킬이 발동된 순간, 그들은 인류의 가장 빠른 초인을 뒤로한 채 후방으로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 나태의 군세, 귀족들아. 귀찮더라도, 다들 임무는 잊지 않았겠지?]

그리고 마치 오해 없이 들으라는 듯이, 실버 팽의 뒤쪽에서 아주 느리게 다가오는 인류의 초인들을 향해서도 영파를 보냈다.

[나 마인 장군 그랜달이 그분의 이름을 대신해 명한다. 가라! 명령을 수행하라!]

동시에.

퍼버버벙.

놈을 비롯한 스물한 개체의 마인족들은 그대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저 스물한 명이 다이빙하는 것만으로도 폭음이 일어나고, 거세게 솟구친 물보라가 수만 명의 시선을 가로막는데.

[우리, 좀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붙어 보자고! 아하하하하하!]

스스로 그랜달이라 칭한 이의 웃음소리만이, 해안가에서 한없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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