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파도의 힘
남해 어부 연합 간부들 vs 저릭&실버 팽.
남해 어부 연합의 생각이야 어쨌건, 일행이 보기엔 애초에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쾅!
“컥!”
털썩.
실버 팽의 주먹질에 테헤논이 거품을 물고 쓰러짐으로써 증명이 되었다.
다만.
“호오? 생각보다 제법인데. 안 그래, 살힌?”
“그래. 초월무구도 저 장갑 하나뿐인 거 같은데, 꽤 오래 버텼어. 그런데…….”
실버 팽과 저릭은 생각 이상으로 분전한 어부 연합의 간부들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저릭. 너는 내 이름 부르지 말랬지.”
“헤. 또 그 소리냐.”
“뭐가 또야! 너, 죽은 늑대 형제 이름이 나랑 똑같다며?! 기분이 이상하다고! 게다가 너 방금 또 내 머리 쓰다듬으려고 했지?!”
“킁. 그럼 네가 이름을 바꾸든가.”
“뭐 인마?”
……그들의 대화는 엉뚱한 말다툼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저치들은 또 저러는군. 하아……. 이상한 방향으로 친해졌어. 타이니의 전생에도 저랬다고 했던가? 아주 셋이 붙여 놓으면……. 아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어쨌거나 어부 연합의 단체 스킬, 파도의 힘은 싸움을 지켜보던 검제의 눈에도 인상적이었다.
아니, 일행 중에서도 어쩌면 그가 가장 놀라고 있을 터였다.
‘간부들이 하나가 되어서 끊임없이 파도처럼 몰아치는 스킬. 일체화된 힘의 효율도 블루윙 이상이고, 지구력은 비교도 안 된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 상대는 오러익시더 둘, 심지어 안 그래도 인간을 압도할 신체 능력을 가진 오크족과 수인족 가운데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으니.
고작 오러유저 하나와 챌린저급 십수 명이 힘을 합쳐서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단체 스킬은 존재할 리가 없었다.
‘존재했으면 더 좋겠지만. 그럼 희망이 더 커질 테니.’
검제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을 때.
바닥에 널브러진 어부 연합의 간부들은 그야말로 참담한 표정으로 이를 갈며 실버 팽과 저릭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윽. 분하다.”
테헤논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키고.
그 뒤의 간부들 역시 파랗게, 혹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일어서고 있었다.
“대장……. 그러니까, 더 불러오자고 해, 했잖아. 끅.”
“빌어먹을. 아직, 아직 안 끝났다!”
“육지 것들한테 비웃음당하고 끝낼 수는 없지. 끄으응.”
한번 박살이 났으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는 모습.
그 모습에, 그들을 상대하던 저릭과 실버 팽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번졌다.
투쟁심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종족의 수장인 그들의 눈에는 그런 어부 연합의 모습이 멋지게만 보였으니까.
“제법인데.”
“크크크크. 마음에 들어.”
다만, 종족 특성 탓에 유독 삐져나온 어금니와 송곳니가 도드라지는 그 미소가 상대에게 다소 살벌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크윽. 저것들.”
“우릴 죽일 셈인가.”
“끝까지, 버텨!”
“바다 사나이의 기개를, 크흠, 보여 주자!”
“우와압!”
어부 연합 간부들이 후들거리는 상태로 전투태세를 취하자, 검제는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우위는 증명이 된 듯한데.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도우러 온 겁니다.”
그 말에 근육질 거한들의 살기 어린 시선이 이번엔 그에게 쏠렸다.
‘하…….’
제국의 공작인 내가 계속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검제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차.
“……그래요, 테헤논. 그만해요. 이런 강자들이 직접 찾아왔다면 우리 생각보다 큰일인 것 같으니까.”
어부 연합 간부들의 뒤에서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2m에 가까운 장신의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묘하게도 그 순간 바다 사나이들의 기세가 확 꺾이는 것이 느껴지다 보니, 검제의 눈도 자연히 그녀에게 돌아갔다.
“거기, 그쪽이 그 소드 엠퍼러? 맞죠? 통신으로 본 얼굴 같은데. 목소리도 익숙하고.”
저쪽이 실세인가?
그녀가 빙긋 웃으며 나서는 동안 아무도 반항하지 않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그쪽은?”
그런데.
“로엘은 내 여자다! 넘보지 마라, 내륙인!”
이건 또 뭔…….
“하아…….”
오늘따라 한숨 쉴 일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마물들이 강림할 포인트를 아는 상태에서 당신들 같은 초인들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막았는데도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그런 게 지금 우리 앞바다에 열릴 예정이다?”
로엘의 말에 검제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제 사흘 남았군요.”
섬 도시 인술라의 중심지, 그들이 내려앉았던 건물 길다(Gilda)의 내부를 둘러보는 검제의 말투는 내용과는 달리 담담하기만 했다.
최대한 담백하게 사실만을 전하려는 느낌.
“더구나 마지막 강림은 마계의 서열 1위 군단이라고 하니, 여태까지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태의 군단은 별 볼 일 없으니 칠죄종만 견제하면 될 거라는 크롬벨의 말은 일부러 전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태가 서열 1위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크게 놀라던 고대 용사의 표정을 생각하면, 그간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흠. 내륙의 소식은 건너 건너 듣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심각했을 줄은 몰랐군요.”
로엘은 안색을 굳히며 생각에 잠겼지만, 그 뒤에 시립하듯, 혹은 감시하듯 서 있던 테헤논의 반응은 반대로 적극적이었다.
“흥. 아까의 대련만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마라. ‘파도의 힘’은 인술라의 주민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의 힘은 더 강력하다! 어부 연합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 내륙과 달라!”
그 말은 검제의 눈을 번뜩이게 만들었다.
“주민 전부를? 저 말 사실입니까?”
그 말에 로엘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좀 과장되었죠. 아무리 그래도, 모두를 아우르진 못합니다.”
“하. 역시…….”
검제가 쓴웃음을 짓는 순간.
“마나는 다룰 수 있어야지요. 뭐, 우리 연합의 성인이라면 적어도 마나유저 정도는 되는 게 정상이긴 합니다만.”
“예!?”
이어진 로엘의 말은 검제의 눈을 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들었나. 아르곤 경?”
뒤를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놀란 눈의 아르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놀란 포인트에 솔레인의 후계자가 호응한 것이다.
“탐색해 본 결과, 여긴 얼추 인구 10만에 가까운 큰 섬입니다. 성인만 해도 그 절반은 되는 듯한데요.”
“허, 그럼?”
“솔레인 님이 남기신 군단 스킬과 비교해서 장점을 취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초인들의 표정에 일순간 화색이 번졌다.
질투의 강림에 대비하느라, 남은 다섯 개의 성물 중 세 개를 랑켄 평야에 남기고 온 그들이었다.
그 와중에 이미 위력이 입증된 군단 스킬을 한층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큰 호재였다.
“가능성이 있겠어.”
“그럼…….”
“허…….”
다만 그 대화들이 남해 어부 연합장, 테헤논의 눈에 불똥이 튀게 만들었다.
“무슨 스킬? 취합? 누구 마음대로! 내륙인이 무슨 권리로 우리의 보물을……!”
성질 급한 남편을 대신해 검제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협상을 하던 로엘조차 그 말은 막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 저희 쪽 보물부터 먼저 풀어 드리죠.”
덩치 큰 초인들의 틈에서 혼자 홀쭉한 체격의 갈색 머리 푸른 눈의 청년이 입을 여는 순간, 분노하던 테헤논도 그녀도 동시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이게 대마도사 솔레인 님이 남기신 유산, 군단 스킬의 요체입니다. 파도의 힘과 비교할 만한 점이 있겠습니까?”
“으음…….”
아르곤의 말이 끝났을 때, 테헤논과 로엘 그리고 남해 어부 연합의 간부들은 일제히 짧은 신음을 토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은 결국 그들의 대표인 테헤논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지. 그 군단 스킬이라는 것. 솔직히 대인원을 아우르는 측면에서는 파도의 힘보다 뛰어나다. 더구나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이들을 포용하는 부분까지 있으니…….”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어부 연합의 저력. 그 근간이 된 파도의 힘은 동대륙에서 기인한 내륙의 단체 스킬들과는 시초부터 다르다.
그런데 지금 내륙의 초인들이 구술해 준 군단 스킬이라는 것에는 놀랍게도 파도의 힘과 유사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테헤논은 그 이유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파도의 힘은 신화시대에 반신급 경지에 올랐다던 마도 군주가 남긴 유산인데……. 하. 현세의 마법사가 그에 버금가는, 혹은 더 뛰어난 스킬을 만들었다니 솔직히 놀라울 뿐이군.”
다소 적대적이었던 테헤논의 말투가 유순해진 만큼, 그는 정말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오러유저들의 뒤에 서 있기만 하던 마도사들의 눈시울을 붉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도 군주의 유산…….”
“솔레인 님이 그 정도로…….”
“역시……. 그분이 좀 더 살아 계셨어야…….”
물론 그의 말만 듣고 솔레인과 마도 군주를 단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파도의 힘이 마도 군주의 정수를 담은 건 아닐 수도 있고, 온갖 단체 스킬이 범람하는 현세에 다른 기술들을 참고한 솔레인의 환경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누구보다 이성적이어야 할 마도사들은 그저 ‘더 뛰어난 스킬’이라는 말 한마디에 온갖 감정을 쏟아 내고 있었다.
“어, 저기 왜들 그러시는……?”
테헤논이 당황할 정도.
그때 마도사들과 함께 눈시울을 붉히던 아르곤이 테헤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높은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전력을 다한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군단 스킬을 만드신 분이 마계 대전 중에 사망하셨습니다. 끝까지 인류가 이 위난을 극복하길 바라셨지요.”
“아. 유산이라 했었지……요. 하. 허. 하……. 이건 참…….”
테헤논은 난감했다.
‘이를 어쩐다…….’
상대가 모든 패를 다 까고 나온다.
심지어 자신들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파도의 힘 이상의 비전을 아무런 대가도 약속도 없이 구술해 주면서.
‘그게 또 효과가 없으면 모르겠는데.’
군단 스킬이라는 것의 요지는 파도의 힘과 비슷했기에, 그 비전의 핵심을 알고 있는 테헤논의 머릿속에 이미 파도의 힘을 개선할 방법이 몇 가지나 떠오를 정도였다.
그는 내륙인들이 자신의 삶에 간섭하지 않길 바라는 남해 어부 연합의 대표였지만, 동시에 은혜를 받았으면 갚을 줄 아는 사나이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럽시다.”
“여보!?”
“대장!?”
“뭐야. 왜 그래!”
“시끄러워! 단물만 빨아먹고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함께 싸운다!!!”
테헤논의 말에 멍해 있던 간부들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우리가 도와주러 온 거 아닌가? 왜 저치들이 생색을 내지?”
“그러게.”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듯했지만, 일행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
검제는 저릭과 실버 팽의 타박을 한 귀로 흘려듣고는 웃으며 일어나서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흘 남았습니다. 그동안, 최대한 준비를 해 보죠.”
“……예. 주민들에게 그리 공지하겠습니다.”
“저기, 여보. 대장은 난데…….”
테헤논의 작은 불평을 뒤로한 그녀가 검제의 손을 맞잡은 순간.
그로부터 강림이 예정된 날까지, 사흘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