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트러블
“저곳이네요.”
에스티나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섬에서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범선과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깃발을 가리키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 명의 마도사와 아르곤, 우란 누드, 그리고 웨폰 마스터 그리드까지. 카일룸에 타고 있는 이들이 모두 눈앞의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까닭이었다.
그들이 지나쳐 온 남부 산맥의 경치가 그랬듯, 넓은 바다에 햇살이 비치는 그 신비로운 풍경은 정말 넋을 놓고 볼 만한 것이었다.
“수호자께서도 인술라에 와 보신 적이 없나 보군요?”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가 뒤늦게 답을 한 후에야 다시금 일행의 시선이 모이는데.
“예. 그럴 기회가 없었네요.”
담담하기만 한 에스티나의 대답에 티네스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잠시간 여유는 가지십시오. 재앙을 맞은 바다라 해도, 저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액면가와는 달리 아마 자신의 반의반도 살지 않았을 인간의 말에, 에스티나는 일행의 시선이 향하는 바다 위로 새삼스레 눈길을 던졌다.
최근에 질리도록 대양 위를 비행해 왔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는 바다에서는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수면 위에 흩어지는 햇살이나, 간간이 그 위로 튀어 오르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나, 그때마다 부서져 나가는 햇빛과 그 파편까지도.
“……예. 확실히, 그렇네요.”
“카일룸이 있으니 원하신다면 언제든 보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역시 수호자의 책무가 막중하신가 봅니다.”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에 에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단조로운 엘프의 삶. 거기에 질린 자신의 실수. 그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님.
그 이후로 오직 수호자의 의무를 지키는 데에 매진하며 살아온 인생.
단 몇 줄로 정리되는 삶의 이력이었지만, 그녀는 여태껏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져 왔으니.
27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특별한 일 없이 바다를 보러 온 적은 없었다는 것이, 새삼 체감된 것이다.
그래도.
“그 답답한 삶이 차라리 나았을 텐데요. 마계 대전보다는요.”
“크흠. 물론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저는 큰일을 앞두고 여유를 갖자는 의미에서…….”
“그래도 지금이 나은 점도 있네요.”
“예?”
이 풍경을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아니, 아니에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심을 그저 미소로 얼버무리며, 에스티나는 다른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곧 도착합니다. 모두 준비하세요.”
“괜찮으십니까, 수호자님? 거의 쉬지도 못하고 오셨는데.”
일행 중 그나마 에스티나와 오랫동안 함께해 온 아르곤의 물음.
말을 아끼는 어른들을 대신하여 걱정스러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에스티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견딜 만해요. 그리고 여러분의 무게를 다 합쳐도 타이니와 녹턴보다는 가볍습니다.”
저 코끼리 수인, 우란 누드를 포함해도 말이다.
녹턴을 든 타이니는 아무리 중력 속성으로 몸을 가볍게 한다 해도 보통 사람 10명 이상의 무게는 나갔다.
즉 동대륙을 향해 갈 때, 동행이 타이니가 아니었다면 그만큼 다른 인원을 더 태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카일룸의 등판 넓이를 고려하면 그래 봐야 네다섯이 한계일 테고.
게다가.
‘그 누구를 더한다 해도 타이니의 전력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헤어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어지는 얼굴.
에스티나는 고개를 저어 그리운 이의 환영을 떨쳐 버리고는 카일룸의 활강 속도를 조절했다.
나름 마법으로 보호하고 있다지만 오러유저들에 비해서는 한참 허약한 마도사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배려한 움직임만으로도.
“오오오오.”
“빠, 빠르군.”
“조심합…….”
혹한의 마도사라 불리는 아프만의 표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카일룸에 처음 타 보는 인원 중에서 담담한 것은, 역시나 거대한 코끼리 수인인 우란 누드와 웨폰 마스터 그리드뿐.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진다는 진리를 극명히 보여주는 초인들의 행태에 에스티나가 슬쩍 미소를 짓는 동안, 카일룸은 지상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그럴수록 저 섬에서는.
“끼루루루루루루루!”
카일룸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릴 터이고.
그들이 도착할 것을 전해 받았을 어부연합의 인물들이 보여야…… 하는데?
“……왜 아무도 없죠?”
커다란 섬 위에 지어진 수많은 건물들.
조개껍질 같은 것으로 지붕을 엮고 고래 뼈 같은 것으로 기둥을 세운, 마치 오크의 그것 같은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 사이에서 정작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러게요?”
설마 벌써 재앙이 벌어진 것일까?
당황하던 아르곤이 황급히 손을 휘젓자.
[探索(탐색)]
푸른빛이 옅게 퍼져 나가더니, 잠시 후 아르곤이 헛웃음을 지었다.
“건물 안에 사람 많습니다. 그냥 일부러 밖에 안 나온 것 같은데요.”
“예?”
“그렇게 보셔도, 저야 이유는 모릅니다만.”
고개를 갸웃하는 일행.
에스티나는 섬에서 가장 큰 건물 앞에 그대로 착지했지만.
거대한 새의 정령이 마당에 내려앉았는데도 나와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손님을, 그것도 구원하기 위해 온 손님을 박대한다. 품위가 없는 이들이군요. 첫인상부터 실망입니다.”
여태 조용하던 웨폰 마스터 그리드조차 콧수염을 튕기며 불쾌한 감정을 표할 정도로 이상한 광경이었다.
“뭐죠……?”
생각지 못한 상황에 에스티나가 어리둥절해하는데, 바람에 흩어진 흰머리를 다시 단정히 빗어 넘긴 아프만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후. 남해 어부 연합은 대륙과 자신들을 별개로 생각하는 집단이라 들었습니다. 외부 물자를 구하기 위해 해산물 거래를 하기는 하지만, ‘내륙’과 ‘해양’, 즉 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자신들이 사는 곳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생각한다는 기록이 있었죠. 이리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래서요?”
“아무래도, 우리가 온 것이 달갑지 않은 듯합니다.”
“도우러 온 건데도요?”
“내륙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저도 오는 건 처음인지라…….”
아프만이 말끝을 흐릴 때, 그 뒤쪽에 선 우란 누드의 몸에서 검은 늑대의 환영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르신?”
- 남부 산맥 북쪽부터는 다른 세상……. 고대에 이들의 조상들도 그리 생각하며 마계 대전의 참전을 거부했었다. 그 대가를 이제는 후손이 치를 때인가.
“그 고대에 말입니까?”
에스티나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펜릴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당시에는 이 섬에 상주하는 오러유저만 셋이 있었다. 신화시대에도 인구 대비 전투력 수준은 최고였지. 지금 대륙에 유행하는 단체 스킬 비슷한 것도 그들은 당시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손을 내민 것이지만…….
펜릴이 그녀를 보며 말을 잇던 그때.
갑자기 하늘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한마디를 보탰다.
- 중립을 핑계로 싸움을 거부한 겁쟁이들이었지. 펜릴.
탁.
타다닥.
“크롬벨 경?”
“오!?”
허공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온 새하얀 갑옷의 기사. 그리고 그가 데려온 검제, 실버 팽, 저릭, 하이넨, 그리드가 연달아 일행에게 인사했다.
비로소 온전히 합류한 연합군의 초인들이 서로 반가운 표정을 지을 때, 크롬벨은 웃으며 에스티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조금 늦었군요. 역시 대정령은 다릅니다.”
현시대의 그가 계약한 정령 오투스(Otus)는 아무래도 카일룸에 비해 약간의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말이었는데, 에스티나의 반응이 조금 까칠했다.
“당신의 정령이 보는 데서 다른 정령을 칭찬하시는 겁니까? 저에게 말고, 당신이 모실 어르신께 예의를 지키셨으면 합니다만.”
일행을 내려 준 뒤 하늘 위를 맴돌고 있는 부엉이 정령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 말에 크롬벨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또 그러시는군요. 정령에게 어르신이라니, 대체 그동안 엘프들에게 무슨 일이…….”
에스티나가 다시 인상을 팍 찌푸리고 펜릴이 쓴웃음을 지을 때.
“그만, 그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꼭꼭 숨은 애들부터 끌어내자고.”
정령의 역사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릭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원군이 왔다! 이곳의 주민들은 다 겁쟁이냐! 왜 숨어 있는 거냐!!!”
- 냐아아아아!
우르르르릉.
사방의 건물들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저릭의 목소리.
이목이 밝은 초인들은 근처 건물들 안에서 ‘엄마!’ ‘괜찮아. 참아.’ ‘간부들이 어찌해 줄 거야.’ 등등의 작은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울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서 있는 마당 앞에 세워진 건물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쿵.
“불청객들이 목소리가 너무 크시구만.”
거의 2m 2~30cm는 될 법한 거인을 필두로 십수 명의 근육질 거한들이 쐐기 진형처럼 늘어선 채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렇게 뭉쳐진 이들의 기세는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환상이 떠오를 정도로 거칠었다.
“단체 스킬? 싸우자는 거냐?”
저릭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서려 할 때.
검제가 그 앞을 가로막으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저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어느 분이 연합장이신지?”
다소 투박해 보이는 검은 갑옷과 대검에 비해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그가, 엄숙한 시선으로 근육질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검제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그가 평소답지 않게 과하게 예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괜히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저릭에 대한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칫!”
저릭이 혀를 차며 돌아서는데.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앞마당에 찾아왔으면서, 싸우자는 게 아니면 뭐지?”
사내들의 가장 앞에서 남자, 테헤논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굳어질수록 파도의 환영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는데.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그 정도 기세에 움찔이라도 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크흠.”
“우리는 잠시 뒤에 있겠네.”
“그럽시다.”
……마도사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돌아가라. 이곳은 내륙인을 반기지 않으니. 우리가 내륙인을 만날 때는 거래를 할 때뿐이다.”
초인들 대다수가 태연한 표정을 짓자 안색이 더 굳어진 테헤논이 더 크게 기세를 일으켰다.
그러던 그때.
“오러유저 하나에, 챌린저급 열넷. 오, 저기 뒤쪽 여자도 챌린저급이네? 유후, 이 섬 하나에 이런 강자들이 몰려 있어?”
“재밌는 동네네. 진작 와 볼걸.”
저릭과 실버 팽.
솔직히 같은 인류로 보기 힘든 거대한 덩치의 오크족과 수인족의 초인이, 오히려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거칠게 기세를 내뿜는 테헤논의 태도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기꺼운 것이다.
“품위 없는 것들.”
“가만히 있어 주시죠, 두 분.”
웨폰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고 검제가 뒤쪽으로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
거기다 그들의 행동을 도발로 받아들인 테헤논과 어부 연합의 간부들은 단체 스킬 ‘파도의 힘’의 기세를 훨씬 더 증폭시켰다.
우르르릉.
“당장 꺼져라. 아니면 힘으로 꺼지게 해 줄 테니까.”
“여러분의 기상은 존중합니다만, 마족의 강림은 어부 연합 전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저희가 힘을 합쳐야…….”
검제가 다시 중재해 보려 했지만.
“웃기지 마라! 우리의 자존은 우리가 지킨다!”
“바다 사나이들은 내륙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한평생을 마물과 싸워 온 우리다. 그게 좀 심해진다고 한들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테헤논의 뒤에서 어부 연합의 간부들이 거친 고함을 질렀다.
“거보시오, 공작. 쟤네 우리 과라니까?”
실버 팽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앞으로 나서자.
“강림 전에 몸이나 풀자고.”
저릭 역시 삐죽 튀어나온 어금니를 드러내며 바로 그 뒤를 따랐다.
“하…….”
검제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초인들 역시 흥미진진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꼴을 보니, 혼자 늙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중상은 없게, 다만 확실하게 제압하시길.”
“물론!”
“조금 다치게 해도 되지 않……? 알았어. 조절할게. 칫.”
다만 그렇게 나서는 것이 저릭과 실버 팽 둘 뿐이자, 오히려 어부 연합 사내들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겨우 둘?”
“우리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내륙에서나 무슨 무슨 기사지, 그 이름이 여기서도 통할 줄 아나!”
콰콰콰콰.
사내들이 일으킨 파도의 환영이 실체화되며 그런 그들의 전신을 뒤덮었고.
“재밌겠네. 나 먼저.”
“아니지. 이건 나 먼저.”
정작 저릭과 실버 팽은 그 앞에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 사람.
“요즘 가는 곳마다 왜 이러지.”
에스티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