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413화 (413/500)

413화. 돌아왔다

“……가야지.”

“그래.”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타이니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짧은 기간에 비해 얻은 것도 많고, 목표도 최소치 이상은 달성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우리는 고향을 먼저 지켜야 해.”

“남은 분노와 오만, 그리고 잔당 정도는, 동대륙의 저력으로, 처리할 수 있어. 충분히.”

에스티나와 루나가 기어코 한마디 더 보태고 나서야, 타이니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렇게 일행이 남양을 떠나 서대륙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할 때.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타이니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거대한 마물들에게 초토화된 동대륙의 모습이 가는 곳마다 눈에 들어왔으니까.

“크롸롸롸롸!”

- 오만의 군주에게 경배를!

쾅!

우르르르릉.

산을 통째로 뚫어 버리고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세 개의 뿔을 가진 동산만 한 거대 파충류부터.

“뀨루루루륙!”

- 진정한 정복자에게 경의를 표하라!!

콰아아아아앙.

땅을 거침없이 뚫고 나오는 수십 미터 길이의 뿔 달린 거대 뱀.

“끼에에에엑!”

- 기분 나쁜 기운. 뭐냐!?

그리고 그들을 향해 번개 같은 속도로 다가오는, 뱀같이 길쭉한 머리를 가진 날개 달린 파충류까지.

놈들을 보는 순간, 타이니의 얼굴에 살기가 스쳤다.

“오만도 아니고, 이놈들을 상대하는 정도는 괜찮지? 우리한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타이니의 그 말에, 망설이던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 정도야 뭐.”

“잡자!”

“떠나기 전에 걸리적거리는 것들 처리하는 정도는.”

“좋아, 가자!”

“아우우우우우!”

대답을 듣자마자 카일룸의 등판에서 뛰어올라 허공을 내달리기 시작한 월랑과 타이니.

그리고 그런 그의 뒤쪽으로.

[捕縛(포박)][重壓(중압)][封鎖(봉쇄)]

“끼엑!?”

- 무슨?

아르곤의 검이 7가지 색깔의 오러로 거대한 동대륙 문자를 연달아 그려 내면서, 달려들던 비행 파충류를 그대로 추락시켰고.

“나도, 한 손.”

파바바바박.

“꾸어어억?”

“크롸?”

루나는 지상에 있는 괴물들의 그림자에 수십 자루 뼈 칼을 박아 넣는 것만으로 그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옆에서, 카일룸을 유지한 채로 정령 합신을 이뤄 낸 에스티나는 일대를 뒤덮는 널따란 녹색 오러의 그물을 만들어 내며 거대 파충류 세 마리를 동시에 묶어 버렸다.

동대륙에서 보낸 짧은 기간 동안 일행 모두가 극단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그 단발적인 격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지금!”

“타이니!”

“끝장내!!”

그런 셋의 시선이 동시에 향하는 곳.

꽈아아아앙!

노을빛 유성이 된 늑대와 기수가, 거대한 파충류들의 몸을 연달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본 에스티나가 씁쓸한 미소로 정령 합신을 풀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쪽으로 날아가는 내내, 마주한 모든 오만의 군세를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크아아아아악!”

- 어, 어떻게 인간이…….

쿵.

우르르르르릉.

지면을 뚫고 땅으로 솟구쳐 오른 길이만 100m가 넘어가는 거대한 뱀 같은 형태의 마족, 스스로 오만의 장군 중 하나라 칭한 케틀락까지 처리하고 나서야.

타이니는 비로소 홀가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덕분에 하루의 시간을 더 소비했지만, 누가 뭐래도 스스로 홀가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터였다.

타이니는 웃으며 뒤를 돌아보다가, 조금 창백한 안색의 에스티나를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 덜려는 생각이 앞섰던 탓에, 서대륙으로 돌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에스티나의 마나 회복력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카일룸을 타지 못한다면, 불굴의 권능을 ‘온(on)’한 채로 혼자 달려야 할까?

입술을 질끈 깨물며 순간적으로 온갖 상상을 떠올리는데.

에스티나가 쓴웃음으로 그런 그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스피릿액셀을 달성한 뒤로, 카일룸에 저장할 수 있는 마나의 용량도 늘었어. 네가 좀 도와주면, 대양을 건너는 건 무리 없을 거야. 아, 나 3, 4시간 정도만 좀 자고.”

“……미안.”

“뭐가 미안해? 어차피 이놈들도 결국은 우리가 처리해야 할 마족들인데.”

에스티나의 말과 그 뒤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곤과 루나의 모습이 타이니를 다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제 4일 하고 반나절 정도 더 남았으니까…….”

“잘 시간 정도는 충분해.”

“그래. 쉬자.”

격이 다운된 오만과 놈의 장군 여섯, 그리고 강림할 분노와 그 휘하 마충 군단의 일부가 동대륙에 남아 있지만.

‘아냐. 더는 그런 생각하지 말자. 스승님을 믿자.’

서대륙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휴식.

조금은 후련하고,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일행은 동대륙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꼬박 하루 뒤.

아침이 밝자마자 출발한 그들은, 석양이 채 지기도 전에 서대륙의 동부 해안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 * *

“……거의 다 왔어.”

“훨씬 빨라졌어, 티나.”

“당연하지. 경지가 올랐으니까.”

내려다보이는 서대륙의 경관.

이제 곧 연합군의 정예들이 있을 랑켄 평야가 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타이니는 빠르게 지나가는 지상의 풍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뭐야? 저기 연합군 병력 아냐?”

일정한 속도로 동쪽으로 이동 중인 십수 만의 병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각양각색의 종족, 그리고 다양한 깃발을 세운 군대가 서로 싸우지 않고 같은 목표를 향하는 모습.

“맞는 거 같은데?”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만큼 베테랑이 된 병사들부터, 이번에 새로 충원된 듯 조금 긴장한 표정의 병사들까지.

“뭐야? 다음 강림이 설마 카룬이나 동부 해안 쪽이야?”

“그럴지도…….”

여러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근데 조금 이상한데?”

인류 연합군의 압도적인 위용은 변함이 없어 보였지만.

그중에서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블루윙을 비롯한 인간족의 최고 기사단 몇과 수인족 근위 군단, 오크족 바토르 수비군, 드워프족의 엘로랑 전사단이 보이지 않았다.

“최정예는 따로 이동했나? 우리가 지나친 건가?”

“랑켄 평야에 있겠지. 질투의 균열은 그대로일 테니까.”

“아…….”

그 말을 듣고서야 타이니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서대륙을 떠난 지 40여 일 정도 됐나?’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동대륙으로 떠났던 일행 모두는 그 전에 비해 실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적은 성장을 이뤄 낸 루나조차, ‘그림자 진법’이라는 독특한 기예를 모르스 비전에 접목하며 오러익시더의 극에 가까워졌을 정도니.

동대륙에서 마족 군단을 처리한 전과 외에도 일행은 얻은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러다 보니, 타이니의 가슴속엔 염려하는 마음보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질투 하나. 그리고 나태와 그 군단.’

마왕 강림 전에 위협이 될 요소들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만큼, 랑켄 평야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끼루루루루!”

- 카일룸!?

- 수호자가! 광휘의 기사가 돌아왔다!

- 어디? 어디!?

- 우와아아아아!

랑켄 평야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인류 연합군 최정예들의 함성이 점차 커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다시금 장시간의 비행을 끝낸 카일룸이, 수뇌부들이 모인 지점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타이니!”

“왔구나!”

“동대륙은 어떻게 됐나!?”

“지금 이쪽 상황이……!”

우당탕탕!

“야 이씨, 할배! 내가 먼저……!”

“누가 할 소리!? 어린놈의 새끼가!”

“땅꼬마 할배나 털북숭이는 닥쳐!”

“뭐라!?”

저릭과 실버 팽, 그리고 하이넨. 12대 기사 중 가장 성질 급한 셋이 미친 듯이 내달려 오며 서로 엉겨 붙는 꼴이 웃기면서도 정겹게 느껴지는데.

“한심하긴…….”

그들보다 한발 늦게 다가온 검제가 타이니의 전신을 쓱 훑더니, 눈가에 잠깐 경련을 일으켰다.

“거기서 더 나아갈 길이 있었나? 허…….”

잠시 어이없다는 듯 한탄하다가도,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특유의 냉엄한 푸른 눈으로 타이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의 성과는?”

“그…….”

그에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답을 하려다가.

“아니, 너한테 물어 봤자지. 수호자님, 어떻게 됐습니까?”

“아. 일단…….”

면전에서 개무시를 당했다.

우드득.

쌍.

‘저딴 인간을 내가…….’

검선을 스승이라 칭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 잠시 떠올랐던 다른 얼굴.

검제의 얼굴에 마음속으로 백 번쯤 ‘X’ 표를 칠 때쯤.

에스티나가 간략한 보고를 끝냈다.

색욕을 잡았고, 오만을 약화시켰으며, 분노의 장군급들을 다수 처리한 상태라는 말.

그 말을 들은 검제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최상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군요. 일단 시간이 급하니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타이니, 저기 세 명…… 크흠. 세 종족장들 좀 떼어 내라!”

“이래라저래라, 킁. 칫, 내가 지 부한가…….”

투덜거리면서도, 타이니는 아직도 서로의 멱살을 쥐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 오크와 수인, 그리고 강철 거인을 탄 드워프를 억지로 떼어 냈다.

툭. 툭. 툭.

“어?”

“어어?”

“헐?”

타이니가 살짝 건드리는 순간 서로를 붙잡고 있던 손이 금방 풀려 버리자, 실버 팽과 하이넨, 저릭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정말 오러를 동원해서 죽기 살기로 싸운 것은 아니라지만, 자존심상 적당히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동대륙 기술인가?”

“허허, 허…….”

대뜸 호기심을 내보이는 실버 팽과 저릭. 그리고 황당한 듯 테그멘의 강철 손아귀를 바라만 보는 하이넨.

그중에서도 드워프의 첫 번째 망치가 느낀 충격이 가장 컸다.

하이넨의 전투 기갑 테그멘(tegmen)은 정말로 육체와 신경이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타이니가 그 강철 손을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잠시간 끊겨 버린 것이다.

“이거 관련해서 설명 듣고 싶으면, 그만하고 들어갑시다. 나도 듣고 싶은 말이 많으니.”

타이니가 그들을 지나치며 손가락을 까닥였지만, 그런 태도마저 더는 건방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12대 기사와 인류 수뇌부가 모인 막사 안에서.

타이니는 일곱 번째 강림 예정지를 듣고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술라(Insula)? 남해 어부 연합?”

“그래. 거기가 일곱 번째 강림지로 예정되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래서 일단 연합군 전체가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을 내렸다. 정예만 가는 것도 어려울 거고. 그래서 동부 해안과 카룬의 전략적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동대륙이 재앙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나. 아직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일반 병력을 해산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끙.”

동대륙이 검선의 주도하에 남은 재앙을 자체적으로 극복하길 내심 바라고 있던 타이니로서는 달갑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검제의 말은 그것으로 끝도 아니었다.

“……일단 남해 어부 연합의 전력에 자네들을 제외한 나머지 12대 기사가 가기로 했다.”

“엑? 왜 우릴 빼고?”

타이니가 반발해 봤지만.

“이곳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지 않나.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칠죄종을 상대할 사람. 적어도 확실히 하려면 너와 크롬벨 경 둘 중 하나는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해.”

검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기도 중이었다가 뒤늦게 나타나 관련된 이야기를 늦게 들은 크롬벨은 보기 드물게 열을 내고 있었다.

“남은 것이 나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절대 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절대로!”

“아니, 그래도…….”

“제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분노를 남겨 놓고 왔으면서, 지금 더 할 말이 있다는 겁니까?”

……네가 동대륙을 가 봤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끙. 알겠다.”

그 크롬벨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니 그 결정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검제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만 생각보다 자네들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으니, 제나스보다는 아르곤 경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수호자님도 모시고 가야겠어.”

“엥?”

“수호자님은 대정령 카일룸 때문이다. 그게…….”

“카일룸이 있다면, 우리 마도사들 셋도 인술라로 사흘 안에 가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네. 타이니 경.”

검제의 시선을 받은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가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과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를 돌아보며 말을 보탰다.

“솔레인 님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르곤이 우리의 힘을 극대화시켜 줄 걸세.”

“뭐, 그러시죠.”

“저기, 왜 제 합류를 타이니한테 허락받는 거죠?”

아르곤의 소심한 반항은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거기다 제나스가 각성한 영역의 힘은 블루윙과 함께할 때 가장 커진다. 그러니 제나스가 여기 남는 게 맞아. 그게 아르곤 경과 제나스의 힘을 서로 극대화시키는 조합이야.”

“그 정도입니까? 아르곤은 이번에 오러익시더로 경지가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오러로 마법을 쓰기까지 하는데…….”

제나스의 무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언데드 군단과의 전투에서 스치듯 봤던 제나스의 전력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호오? 그래도 블루윙과 함께하는 제나스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지.”

“예?”

“제나스의 영역은 정말 특이한 케이스야. 변이된 영역이 악마급 마족의 것과 상쇄되더라도 블루윙 전체에 희미한 오러를 덧씌우는 게 가능하네. 뭐, 대신 본인의 무력이 오러유저 수준으로 제약되는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효과를 생각하면…….”

“확실히, 대단하군요.”

타이니의 시선을 받은 제나스가 자신감 어린 미소로 고개를 끄덕일 때.

아르곤이 다시 소심한 반항을 덧붙였다.

“아니, 다 좋은데. 여러분, 왜 내 행보를 가지고 타이니가 거래하는 느낌이 드는 거죠?”

그 말이 주목을 끌려고 하던 그때.

더 특이한 목소리가 그 이목을 다시 가져갔다.

- 우란과 나도 가겠네. 그곳에 강림할 이가 솜누스라면 나 역시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

고대의 정령 펜릴이 계약자인 코끼리 수인 우란 누드의 머리 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

- 타이니 경. 지금 그대의 실력이라면, 우리까지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은데. 내 착각은 아니지 않나?

자신의 상승한 격을 확연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고대 정령의 붉은 눈동자에,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아니, 쯧. 그러시죠.”

그렇게 12대 기사 중 9명과 마도사 셋, 그리고 스피릿유저와 고대 정령이 남해로 향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