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갓 핸드 (2)
본디 신전은 고달픈 삶에 지친 민초들의 휴식처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타락하게 만든 신전은, 도움이 필요한 민초들에게서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 갔다.
자식의 병을 치유하고자 찾아온 아비에게 전 재산을 요구했고.
가난한 이들에게 매주 헌금을 강요했으며, 기준에 미달한 자는 논밭을 바치거나 가족을 팔아먹게 만들었다.
따지고 드는 이는 파문하고, 이단으로 몰아 자살하게 만들었다.
신전의 모든 악행은 결국 돈을 뜯어내기 위한 것이었고, 돈이 없다면 사람으로 받기까지 했다.
급기야 일부 지방 신전은 아예 인신매매를 일삼는 범죄 집단의 주축이 되었다.
- 아이고오…….
- 쓰레기 같은 사제 놈들이……!
- 하늘도 무심하시지…….
- 여신이 대체 뭐냐!? 개 같은 것들……!
신권(神權)의 약화를 위해, 신전의 타락을 방치하려던 세속의 권력들이 신전의 범죄 행위를 발각해 내고 처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보니 여신교의 권위는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 아이고, 파문이요? 감사합니다, 더러운 사제 새끼들아!
일부 지역에서는 파문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며 신권을 조롱하는 이들까지 나타났고, 왕국은 그런 무도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그가 교황이 된 지 고작 이십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들어라. 이것이 네놈이 저지른 죄다!
- 신이 원망스럽다.
- 대체 왜 저런 사제들을 벌하지 않는가!
각지에서 신을 원망하고 부정하는 소리가 형벌의 투구 안쪽에서 끝도 없이 메아리쳤다.
- 그만, 그만!
고통스러웠다.
그저 버려진 한을 풀고 싶었을 뿐인데.
고행의 끝에서 이제 좀 쉬면서 사소한 욕망을 챙기려 했을 뿐인데.
그게 왜 세상의 재앙이 되었을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참상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는.
- 신앙을 부흥시킬 그릇이 될 거라 여겨 살폈거늘, 오히려 일을 망치다니! 네놈의 죄가 너무나도 깊고 크다!
천사의 명에 따라 세상을 종횡하며, 신전이 벌인 참사를 갓 핸드의 이름으로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 기간 내내 매일 밤 꿈속에 찾아온 천사들은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요구했다.
- 신앙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다시 카르마가 신께 올바르게 모일 때까지 네 형벌은 끝나지 않는다. 반성하라! 속죄하라! 그리고 여신교를 지켜라!
49일씩 7번, 343일의 생지옥의 시간이 끝난 뒤로, 천사들은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영혼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에겐 이제 신을 향한 맹종밖에 남지 않았다.
- 모든 것은 여신의 뜻대로.
그러던 중, 신전의 타락을 두고 보지 못한 일부 왕국은 서로 연합하여 중앙 신전 솔을 폐쇄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군대까지 동원하니.
성령 기사, 갓 핸드의 이름은 그때 처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신전을 지키는 검으로서 확실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신전에 심어 놓은 타락의 씨앗은 쉽게 제거되지 않았으니.
신벌을 받을 수 있는 교황의 자리에는 신실한 사제가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추기경들의 자리에는 여전히 과거 그의 측근 중 일부, 타락한 사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의 역할은 중앙 신전의 멸망을 막아 내는 방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그와 그가 지배하는 성기사단은 신전 내부의 인사나 규율에 간섭하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후로 이백 년간, 신전의 수뇌부는 잠시 깨끗해졌다가 타락하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그 타락의 정도가 조금씩 덜해진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으니.
솔직히 갓 핸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에 현 교황이 타락한 추기경을 쓸어버렸을 때 오히려 기꺼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신전이 순수하던 시절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내 형벌의 시간도 이제 끝나 가지 않을까?’
마계 대전이라는 새로운 재앙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는 그런 희망까지 품었었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
동대륙의 무구로 만들어진 성물이, 그가 오랜 기간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을 전해 왔다.
- 속죄자에게 마지막 임무를 전한다.
왜, 이제서야……?
그 작은 의문은 뇌리를 울리는 성스러운 음성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 죄인은 이백 년간 쌓아 온 카르마의 일부로 그 보상을 받게 되리라. 그리고 이 성물에 담긴 신성을 활용할 권한을 얻게 되리라. 형벌, 멈춰진 시간이 풀리는 것은 마지막 임무를 완성한 뒤가 되리니. 명심하라! 그대는……!
우우우웅.
콰드드득.
“흐읍!”
거대한 신성력이 그의 몸에 깃들며, 이백 년간 변함이 없었던 영혼이 한순간 한계를 넘어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었다.
“후으읍.”
콰득.
자신의 온몸에서 피어오른 성광이 입고 있는 갑옷 바깥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하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7단계 대사제급 신성력을 넘어서서, 8단계 성자(Saint)급 신성력이 그의 몸에 깃든 것이다.
그것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으며 발휘할 수 있는 무력이 한 단계 상승했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주변에 있는, 신성력에 누구보다 민감한 이들 역시 그의 승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
“성자급!”
“새로운 성자의 탄생이다!!”
“놀랍습니다. 갓 핸드 경!”
“여신께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성스럽고, 또 거룩한 순간입니다. 아아…….”
교황과 그 곁을 지키던 추기경들은 숫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갓 핸드는 몸 안에 깃든 충만한 힘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럴 수가…….”
우드득.
심지어 오른손에 건틀릿 대신 장착한 권갑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런 그로서도 측량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 기나긴 형벌의 시간이 곧 끝나 간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같은 의문이 들었다.
‘왜 지금일까.’
이미 마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이었다.
이런 힘을 내려 줄 수 있었다면, 좀 더 일찍 내려 주었다면 희생자를 훨씬 줄일 수 있을 터였는데.
다시금 의문이 솟구쳐 올랐지만.
- 의심치 말고 따르라!
오른손 권갑을 통해 다시금 뇌에 울려 퍼지는 신성한 음성은 그 의문을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 명심하라. 죄인의 마지막 임무는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 것.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 하지만 만약 그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여의치 않다 여겨진다면, 그대가 무엇보다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은 [email protected]$#…….
멈칫.
다시 이어진 목소리가 투구 속 그의 얼굴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제물?’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신성한 음성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음성이 알려 준 마지막 수단에 자신의 영혼까지 갈아 넣어야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죄인인 나야 그렇다 치고, 어찌 다른 이들을……? 이게 정녕 여신의 뜻인가?’
또 혼란스러워졌다.
충만한 성스러움에 고양되던 영혼이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갓 핸드 경?”
“세인트 갓…… 아니, 이건 이상한데.”
“이제 뭐라 불러야 할지…….”
주변의 소란이 그를 상념에서 강제로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냥 갓 핸드로 족합니다.”
아직 형벌은 끝나지 않았으니.
‘판단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갓 핸드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여신의 뜻을 마음에 되새겼다.
신의 행사를 감히 자신의 머리로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이백 년 전,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 절망하는 민초들의 비명과 원망의 목소리들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속죄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갓 핸드는 지난 이백 년간 그랬던 것처럼, 신의 뜻을 맹종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자각하지 못했다.
그가 불러일으켰던 참사의 희생자들은 민초들인데, 어찌 신전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속죄가 될 수 있는지.
정상인이라면 마땅히 가졌어야 할 의문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신의 뜻을 맹종하는 죄인은 지금도 여전히 피해자들이 아닌, 오직 신에게 용서를 갈구할 뿐이었다.
* * *
스아아아아.
“전능하신 나의 주께…….”
기도가 끝나 가자, 빛나는 금발 아래로 새하얀 신성력이 천천히 수습되었다.
하지만 기도를 끝낸 크롬벨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여전히…… 그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갓 핸드, 속죄자가 신탁을 받아 신전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았다.
여신께서 속죄자를 특정하여 신탁을 내렸다는 소문이 성기사단 내부에 파다했고, 아예 천계에서 성물이 내려왔다는 신빙성 있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크롬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수많은 세월이 지나 다시 천계와의 영의 통로가 뚫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의 기도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사흘간 금식 기도를 이어 왔음에도, 그에겐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은 여신의 사도인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마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 버림받은 거다. 마기를 받아들이고도 여신이 너를 사도로 생각할까?
- 최후의 순간을 대비한 보험? 그걸 누가 알아줄 것 같아? 여신은 너를 배반자로 생각할 거다.
일부러 가슴속에 남겨 둔 마기 서클, 그곳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충동이 다시금 살기를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지만.
쿵.
그는 가볍게(?) 가슴을 두드리는 것만으로 그 불경한 충동을 가라앉혔다.
광휘의 기사 때문에 마기를 마나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충동을 다스리는 게 더 쉬워졌다.
여차하면 ‘그 카드’를 포기하고 마기 서클을 흡수해 버리면 된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마인드 킬링의 부작용이 많이 줄어들고 부정적인 충동도 잦아드는 듯했다.
‘심리적인 문제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어.’
물론 그런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광휘의 기사라는 특별한 변수로 인해 모든 것이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었지만, 솔직히 마왕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지금 생각나는 방법은, 광휘의 기사가 운명의 파편을 받아들이고 타락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조력을 받아 가며 마왕과 싸우는 것뿐이지만.
‘운명의 파편. 그것이 문제다.’
창조주의 흔적이라는 그것은 지독히 독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영웅 솜누스가 인류를 제물로 바쳐 영생을 추구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광휘의 기사도 그리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었다.
‘어차피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도, 사도의 권능은 사용하지 못해.’
애초에 그것을 각오했기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마기 서클을 남겨 둔 것이 아니던가.
정말 어쩔 수 없는 때가 온다면, 그때…….
‘……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금 마음이 약해졌지만, 속을 털어놓을 곳도 없었다.
자신은 용사.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완벽하고, 결점이 없는 존재가 되어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막막할 때면 언제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보고 싶다.’
검은 머리 성녀. 그리운 이름.
‘에, 에……. 뭐였더라? 젠장. 젠장. 젠장!’
우드득.
이제는 자신도 이름을 잊어버린, 인류의 진정한 영웅이자…….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아직도 환생을 거듭하며 고통받고 있을 그녀.
- 크롬벨,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그 뻔한 응원의 한마디가 오늘따라 유독 그리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마계 대전을 종식시킨다.”
조용히 각오를 되새겼다.
마계 대전을 종식시키면, 그녀의 고통도 끝이 나리라.
그것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 크롬벨 경! 급보입니다!!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