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갓 핸드 (1)
예상치 못한 동대륙의 강림으로 인해 서대륙의 병력은 잠시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12대 기사, 아니 서대륙에 남아 있는 8대 기사는 랑켄 평야의 균열 주변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질투의 강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
그런데 그러던 중, 신전에서 갓 핸드의 소환령이 내려왔다.
“갑자기?”
“교황 성하께서 직접…….”
“신탁을 받으셨다는데…….”
웅성거리는 성기사들 사이에서 갓 핸드는 조용히 귀환을 준비했다.
다른 초인들에게는 이미 통보를 했으니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 이러시면 곤란…….
- 닥…….
‘음?’
바깥에서 소란을 피우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촤아아악.
이내 막사의 입구가 찢어질 듯 거칠게 젖혀지며, 예상했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갓 핸드 경! 이 시국에 갑자기 귀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검제. 사실상 연합군의 최고 지휘관인 그 초인의 등장에 갓 핸드는 간단한 한마디로 답할 뿐이었다.
“신탁이오.”
“아무리 신탁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신의 뜻은 모든 것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검제를 향해 슬며시 살기까지 내보였다.
더 이상 막아선다면 전투를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
다행히 검제 역시 그 뜻을 알아챈 것 같았다.
“하…….”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한숨을 내쉬는 그 행동이 불경해 보였지만, 거기까지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십시오, 갓 핸드 경.”
‘그자’의 후손이자, 용사와 광휘의 기사를 제외하면 연합군 최강의 전사라 할 수 있는 검제가 결국 한발 물러서는 게 보였으니까.
“그 또한 신의 뜻에 따를 것이오.”
“후…….”
한 번 더 무도한 시선이 갓 핸드를 스쳤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상대가 검제라서가 아니었다.
속죄를 위한 형벌을 받으며 ‘맹종’을 택한 이래, 이미 이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런 시선을 무수히 받아 온 그에겐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보다는, 이번에 들어온 소식이 더 신경 쓰일 뿐이었다.
‘신탁이라…….’
심지어 자신을 콕 찍어서 언급한 여신의 뜻이라니.
오래전에 멈춰 버린 심장이 다시 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이 기나긴 형벌의 끝이 다가오는가.’
갓 핸드는 투구 속에서 실로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 * *
갓 핸드는 조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
랑켄 평야에서부터 중앙 신전 솔까지, 지방의 신전에 들를 때마다 말을 교체해 가며 잠시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솔의 중심부에서,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단순히 신탁이라는 말만 듣고 온 것인데, 교황이 내어놓은 물건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물?’
“갓 핸드 경! 이것이 여신께서 그대를 지목하여 내리신 새로운 성물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그대도 직접 보셨어야 했어요. 기도의 와중 하늘이 열리며 성물이 내려올 때, 그 성스러움으로 가슴이 벅찬 기쁨의 순간을!”
교황의 눈빛은 파멸의 예언이 내려진 이후로 가장 생기 있게 빛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충만한 신앙심을 품고 여신교에 입교하던 젊은 날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한 표정.
천계에서 성물이 내려왔다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긴 했다.
그런데.
“신비롭지 않습니까? 이 고풍스럽고 우아한 문양이 바로 천계의 문양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건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의 계시가 틀림없습니다!”
흥분하는 교황과 그 곁에 선 추기경들과는 다르게, 갓 핸드의 눈빛은 오히려 깊게 가라앉았다.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호들갑을 떨며 내놓은 성물.
그 권갑에 새겨진 양식이나 문양이, 그에게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으니.
우아한 곡선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황금빛 새 장식의 정체는, 억지로 달리 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동대륙의 무구? 어째서?’
용을 잡아먹는 새. 그것은 동대륙 모든 왕실이 근간으로 삼은 전설에 등장하는 환수였으니까.
이단의 땅의 물건, 그것이 천계에서 내려왔다?
그것도 성물이라는 이름으로?
갓 핸드가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교황이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뭐하십니까, 갓 핸드 경? 여신께서는 경에게 그 성물을 하사하셨습니다. 어서 착용해 보시지요.”
“신탁은…… 그게 전부입니까?”
평소라면 감동 속에서 오열하며 무릎을 꿇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슬쩍 반문을 던졌다.
“이 성물이 그대를 이끌 것이라 하셨습니다.”
“크롬벨 경이 아니라, 제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신께서는 갓 핸드 경을 지목하셨습니다. 그대가 선택받으신 겁니다, 갓 핸드 경.”
“제가 선택을…….”
교황의 신실한 눈빛을 마주한 그는 그제서야 마음속 그 찜찜함이 사그라들며 다시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렇, 습니까.”
목이 메어 왔다.
‘정말로 용서받게 되는 것인가.’
기대감과 흥분으로 손을 가늘게 떨면서도 그는 천천히 성물을 향해 다가갔다.
평소 착용하던 오른쪽 건틀릿을 벗어 던지고, 생소한 동대륙의 권갑을 착용했다.
그러자마자.
번쩍.
‘윽!’
성물에서 시작된 성스러운 빛이 그의 몸 전체에 옮겨붙더니, 이내 신전의 천장을 통과하여 하늘 높이 솟구치는 거대한 빛줄기가 되었다.
“우오오오오오!”
주변의 사제들은 탄성을 발했지만, 정작 온몸이 새하얗게 물들어 가는 갓 핸드는 의식이 백열될 만큼 맹렬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수백 년간 애써 잊고 살아온, 잊고자 했던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 * *
이백 하고도 오십삼 년 전.
아스란 제국 남부의 한 권세가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장남에 이어 태어난 두 살 차이 둘째.
그런데 그 아이의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5살이 되던 해에는 한 번 봤을 뿐인 검술을 유사하게 따라 했고, 7살엔 장난감 목검으로 자기 키만 한 묘목을 꺾어 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 둘째가 너무 뛰어나다.
아버지는 가문의 권력 분쟁을 막기 위해, 아이가 10살이 되자마자 근처의 신전에 출가를 시켰다.
아이는 처음에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증명할 거야. 내가 형님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아이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깊게 새겨진 한. 그 때문에 아이는 그때부터 미친 듯이 노력했다.
고위 사제가 될 수 있는 엘리트 코스 대신, 귀족 출신들이라면 모두가 기피하는 성기사의 길을 택했다.
자신의 검에 대한 재능을 살리려면 그 길이 맞다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는 불과 이십 년 만에 그 길에서 최고의 위치에 도달했다.
순수하게 검술만 수련한 기사들도 도달하기 힘들다는 오러유저의 경지에 성기사로서, 그것도 불과 서른의 나이로 도달하게 된 것이다.
성기사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기사들 사이에 놓고 보더라도 유례가 몇 없는 천재적인 성취.
그때부터 그의 앞날에 꽃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내가 최고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젊은 성기사단장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전은 신전대로 그를 앞세워 위상을 높이기에 바빴고, 당시 최강으로 꼽히던 기사들 역시 굳이 그를 건드려 신전과 척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던 천재는 그때부터 점점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그저 나태해지는 것으로 끝났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안 그래도 자부심이 충천하던 그는, 주변에서 끝없이 치켜세워 주는 환경에 놓이자 금방 교만해지고 말았다.
- 이제 모든 것을 이뤘다. 그렇다면…….
그리고 그 상황에, 이십 년간의 고행에 대한 보상 심리가 더해지는 순간.
젊은 천재 성기사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그런 그의 발길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당연하게도 자신을 버린 가문이었다.
당시 최강의 기사를 의미하던 9대 기사의 이름을 얻고 돌아온 그를 가문은 열렬히 환대했지만.
그는 새롭게 가주가 된 자신의 친형에게 결투 신청을 해서 팔을 잘라 버렸다.
사실 검을 휘두를 때만 해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가문이 자신을 버리고 택한 형이라면 그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형의 팔이 잘렸을 때는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원수처럼 노려보는 부모와 혈족들을 보는 순간, 미안함은 사라지고 분노가 타올랐다.
- 이 하찮은 놈 때문에 나를 버려?
그 사건으로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성기사단장이라 한들, 아스란 제국 고위 귀족의 팔을 이유도 없이 잘라 버린 것은 누가 보기에도 잔혹한 처사였으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혈육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그의 인성에 대한 의문까지 따라붙었다.
- 감히 누가 나한테……!
당연하게도 그는 거세게 반발했고, 처음에는 신전도 그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대륙 최강의 기사로 오십 년 가까이 군림하고 있던 ‘발렌티아’가 그를 찾아오는 순간, 모든 일이 허사가 되었다.
훗날 제국 공작 가문의 시조가 될 기사.
그 진정한 강자의 앞에서 젊은 천재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 재능이 아까우니 죽이지는 않겠다.
- 아직 젊은 자가, 오만하고 이기적이다. 자중하라.
오러와 신성력의 조합, 최강이라 자부했던 무력이 그 앞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스란 제국의 황제는 그의 목숨을 빌미로 신전을 압박하여 수많은 이권을 빼앗아 갔고.
그때부터 신전의 권위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신전도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그를 감쌀 수는 없었으니, 결국 징벌이 내려졌다.
내려진 징벌은 성기사단장 직위 박탈과 10년의 자숙.
신전이 본 피해에 비하면 가볍디 가벼운, 사실상 10년간의 은둔 명령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징벌에 반발했다.
- 내가 죄인이라고? 헛소리!!
그러자 교단의 검이라 불리면서도 언제나 사제들에 비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온 성기사들이 그의 반발에 호응했다.
그는 판결이 내려진 중앙 신전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내몬 교황과 추기경들을 제압하고, 도리어 이단으로 몰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스스로 차기 교황의 자리에 올라, 대륙 최고 세력 중 하나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 한편에는 거대한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그 괴물이 존재하는 한, 진짜 복수는…… 무리다.
그를 압도했던 발렌티아의 존재는, 더 이상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열망 자체를 빼앗아 버렸다.
그때부터 그는 눈앞의 쾌락에 눈을 돌렸고, 본격적인 타락이 시작되었다.
- 그래, 이거야. 내가 왜 여태까지 왜 그 고생을 했지?
각지의 신전에서 올라온 기부금들이 그와 측근들의 사치를 위해 쓰이기 시작했고.
신민들을 보살펴야 할 교황의 권력이, 그의 향락을 위해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지방 신전의 상납금을 올리고, 달성하지 못하는 지역의 교구장을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주변 인물을 내려보냈다.
그렇게 자리를 꿰찬 사제들, 아니 그의 하수인들은 신민들로부터 한 푼이라도 더 거둬들이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부러 제도까지 바꾸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 추기경과 교황들에게 봉사할 여사제들을 뽑아라. 중요한 것은 외모…….
연이은 분란으로 권위가 떨어진 신전이,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각지에서 타락한 사제들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지만,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집권이 지속될수록 여신교의 권위는 추락해 갔고, 세속에서는 신전을 멀리하기 시작했는데.
제국을 비롯한 각국의 지배자들은 신전의 타락을 오히려 반기며 악행을 저지른 사제들을 엄격히 처벌했다.
신의 위상이 무너지고 세속의 권위가 점차 더 강화되기 시작하고 나서야, 타락한 신전 내부에서도 정화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 내겐 여전히 신성력이 임하고 있거늘, 누가 감히 나를 판단하는가!
쇄신을 말하는 세력들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
그 와중에 자신의 신성력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진정한 천벌이 그에게 내려왔다.
- 재앙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타락한 종 하나 때문에 엄청난 카르마를 소모하게 되는구나, 죄인이여!
그의 꿈속에서 하늘이 열리더니 천사가 내려왔다.
- 재앙의 때까지 속죄의 길을 걸어라! 더는 신전의 규율에 간섭하는 것도 엄금한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에게 벗을 수 없는 형벌의 투구를 씌웠다.
- 속죄의 길을 걸으며 올바른 신의 도리를 설파하라! 네놈 때문에 소비된 카르마가 온전히 벌충될 때까지, 너의 시간은 멈출 것이다!
시간을 멈춘다.
흡사 영생의 축복을 내리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독한 형벌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았고, 감정의 기복도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투구를 벗지 못하니 음식도 먹지 못했고, 억지로 혀에 가져다 댄들 감각이 둔화된 몸은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 외에도 모든 즐거움이 봉쇄되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세상에서 지워지기까지 했다.
그날 꿈에 천사가 강림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으니.
- 모든 여신의 종들은, 죄인에 대한 기록을 지우라! 이제부터 &@%는 오직 ‘신의 손(God hand)’으로 불릴 것이며, 다른 이름은 없어질 것이다!
꿈속에서 그 명을 들은 모든 사제들이 그의 기록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본래의 그는 사라지고, 세상에는 오직 신전을 지키는 검인 성기사 갓 핸드만이 남게 되었다.
물론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 신이, 신이 대체 왜 나한테!!
처음에는 신에게까지 분노를 표했다.
그러나 그가 곧 죄인으로서, 속죄자로서 강제로 세상을 종횡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죄악의 산물들을 목도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저 오만하고, 나태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이 작은 눈앞의 쾌락에 탐닉하고 절망을 잊으려 했을 뿐인데.
그 욕망이 만들어 낸 참상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 이게…… 대체!?
그는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진 작은 눈 뭉치 하나가, 산 아래에서는 산사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