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천계에서 내려온 성물
타이니 일행이 동대륙으로 떠난 직후.
“다른 징조가 보이기 전까지는 균열을 감시하며 랑켄 평야에 주둔하는 것이 좋겠소.”
검제의 그 말에 반대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말인즉, 동부의 랑켄 평야에 최정예들이 남아서 닫히지 않은 균열을 감시하는 동안 대륙 중부로 향하고 있던 연합군의 병력들을 다시 원위치로 돌리자는 거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동대륙에서 재앙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쪽에서 밀려온 마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러니 동쪽 바다에 정찰 병력을 상시 유지하고, 그 상태에서 남은 강림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카룬을 중심으로…….”
“왕국 연합에서도 도울 수 있으면…….”
“제국도 자금을 보태겠소.”
웅성웅성.
회의가 끝나고 흩어지는 각 나라 지휘관들의 표정은 이전에 비해 그리 무겁지 않았다.
칠죄종, 일곱 가지 죄악의 군단 중 셋이 이곳이 아닌 동대륙에 강림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군단이 모두 전멸했는데도 강림하지 않은 질투와 다른 칠죄종 하나뿐이라는 게 되니, 그 계산이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크롬벨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앙이 끝난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너무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연거푸 치러진 전투에 희생자도 적지 않았는데, 사실상 휴식기가 생긴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검제 역시 한숨을 쉬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크롬벨은 그 말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약 타이니 경이 동대륙의 재앙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동대륙을 멸망시킨 세 개의 군단이 모두 힘을 합해 서대륙으로 밀려올 겁니다. 그사이 남은 하나의 군단이 서대륙 내부에서 강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왕이 강림하지 않아도 인류는 멸망할 겁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크롬벨의 말에 검제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타이니를 믿습니다. 녀석은 동대륙이 쉽게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동대륙의 무사들에 대한 소문이 반만 사실이라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소문이요?”
크롬벨이 의문을 표했다.
그는 사실상 동대륙을 이 세상에 불러온 원흉(?)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으니.
“그게,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서 회의 때 말을 하지 않은 겁니다만……. 동대륙에는 오러유저가 백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뭐, 저도 그걸 다 믿는 게 아니라서 말을 못 한 겁니다만.”
검제의 쓴웃음에 크롬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타이니 경이 제발 마충 군단만이라도 처리해 줬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의 전부입니다. 그것만이라도 제발.”
“마충 군단은 동대륙에 강림할 것이라 확신하시는 겁니까?”
“……예. 강림의 순서가 어찌 정해지는지는 몰라도, 마지막에 강림하는 군단이 현재 마계의 서열 1위일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게 분노일 리는 없다는 겁니까?”
“예. 마계 군단의 서열이 아무리 뒤죽박죽으로 바뀌었더라도, 분노는 그 특성상 상위 서열이 될 리 없으니까요.”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림할 군단도 이제는 예측이 가능하지요.”
“예?”
“서열 1위는 이변이 없는 한 오만의 군세, 즉 마룡 군단일 테니까요. 용이 사라진 지금도 같은 명칭을 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말하는 크롬벨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초대 마계 대전 당시의 무시무시했던 오만의 군세를 떠올린 것이다.
‘지금은 그보다는 약할 거야. 약해야 한다. 그래, 그럴 거야. 끄으응.’
암울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자연스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살기는 마인드 킬링에 정제되어 그의 내부에서만 맴돌았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오러익시더의 극에 이른 검제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용이 사라진 마룡의 군단이라뇨……?”
“용의 하위종들만 해도 그 강력함은 따라올 괴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동대륙에 강림할 군단은 분노, 나태, 색욕. 이 3개의 군단이겠군요.”
“그럴 겁니다. 혹시 모르니 타이니 경에게 확언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에 남은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서 준비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요.”
“음…….”
생각에 잠긴 검제를 보며 크롬벨은 한숨과 함께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시야 안에 들어오고 있는 랑켄 평야의 균열.
질투의 군세, 언데드 군단이 만들어 낸 오염은 많이 제거되었지만 균열은 닫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크롬벨은 저 균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대륙을 정벌한 마계 3군단이 바다를 넘어 진군해 오고, 오만의 군세가 강림함과 동시에 질투까지 강림한다.’
검제에게 말한 대로,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타이니 경. 적어도 마충 군단만큼은, 분노만큼은 소멸시켜야 합니다. 반드시.’
그에게도 몇 번 강조했으니, 잊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마계의 서열과는 별개로, 마충 군단의 번식력은 이 중간계에 치명적인 재앙이 된다.
맹수를 쏘아 죽이는 주먹만 한 마충은 날개 힘까지 강력해 바다를 건널 수도 있었으니.
그런 마충 군단이 동쪽 하늘을 가득 메우고 날아오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자체로 멸망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색욕은 신성력으로 억제할 수 있고, 오만은 그 이상의 전투력만 있다면 어떻게든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나태는…….’
나태, 게으름. 그 칠죄종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다.
군단과 합쳐진 전체 전투력을 따진다면, 마계의 선봉장이자 칠죄종 서열 최하위인 폭식보다 오히려 못할 정도.
그래서 더 아쉽기 짝이 없었다.
‘솜누스…….’
솜누스가 마계 대전 당시 영생을 얻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놈이 여전히 나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놈은 동대륙에서 강림할 것이고, 타이니의 손에 끝장이 날 것이다.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었는데.’
다시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무려 이천 년간 묵혀 온 원한이었지만, 그간 봉인되어 있던 그에겐 여전히 몇 년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크롬벨이 일부러 정제하지 않은 가슴속 마기에 의해 증폭되어 엄청난 살기로서 뿜어져 나왔다.
마인드 킬링조차 완벽히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크롬벨 경?”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검제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은 순간, 크롬벨은 억지로 그 살기를 갈무리했다.
왜인지 오늘따라 솜누스 그놈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은 징조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놈이 서열 1위였다면, 내 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을 텐데.’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크롬벨은 그저 또 한숨만 쉴 뿐이었다.
* * *
예기치 못한 동대륙 강림 소식으로 갑작스레 갖게 된 휴식기.
물론 여전히 엄청난 돈을 실시간으로 잡아먹고 있는 연합군이 해산한 건 아니기에 각 국가의 왕실, 황실은 여전히 전투태세였다.
모두가 연합군을 유지하는 비용을 대기 위해 예산을 재편성하는 등 용을 쓰고 있는 마당이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륙 주요 세력 중 한 곳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와하하하하하하!
“서, 성하!?”
아침부터 교황, 센티널 3세를 만나러 가던 얀센 추기경은 느닷없이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기겁을 하며 교황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조곤조곤한 교황답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다만.
우당탕탕.
그 올곧은 충정도 칠순이 훌쩍 넘은 몸을 이기진 못했고, 그는 급히 방문을 열자마자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어, 어흑. 허, 허리가…….”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드물게 밝은 표정의 교황이 법관을 벗어들고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오, 얀센 추기경. 이걸 보십시오! 드디어 다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으하하하! 이런 경사가……!”
연신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어대는 교황을 보는 순간 얀센 추기경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보세요, 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싹들을!”
그렇다고 하기엔 이마의 M자가 여전히 너무 크고 진하다.
고작 저거 때문에 내 허리가…….
“끙.”
얀센은 눈에 보이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아픈 허리를 짚고 일어섰다.
“서, 성하. 지금 그러실 때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러겠습니까? 재앙의 절반이 이단의 대륙으로 건너갔는데. 겨우 한숨 돌린 시기가 아닙니까?”
이어진 교황의 말에는 얀센도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예언된 재앙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이었지만, 현재는 그나마 숨 돌릴 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다른 나라들이야 연합군의 유지를 위한 비용을 대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지만, 신전은 수백 년간 축적해 온 재물 덕에 유지비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크롬벨 님의 말로는, 동대륙을 멸망시킨 마족의 군단이 더욱 강해져서 이리로 들이닥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흥. 이단의 대륙 따위 멸망해도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래서 마계의 군단이 강해진다? 흠……. 그건 마음에 좀 걸리기는 합니다만, 광휘의 기사가 12대 기사 중 셋을 데리고 갔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분이라면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는 않겠지요.”
항상 온화하기만 하던 센티널 3세의 얼굴은 ‘이단의 대륙’을 언급할 때만 차갑게 얼어붙었다.
신전의 수뇌부로서는 그럴 만한 일이었다.
여신의 힘과 기적을 직접 눈앞에서 펼쳐 줘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사는 세상.
보내는 선교사마다 처형당하기 일쑤인 그 마의 대륙은, 그 갓 핸드 경조차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오게 만든 마역이었으니까.
교황의 입장에서 그곳은 인간 형상의 마물들이 사는 대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재앙의 와중에 웃음소리가 밖에 들려 좋을 것은 없습니다, 성하. 자중하여 주시옵소서.”
노회한 추기경의 말에는 설득력이 넘쳤고.
그에 센티널 3세는 새롭게 돋아난 머리를 보고 들떠 있던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나니 냉정이 돌아왔다.
“……최악의 경우에 대한 대비라? 지금 제가, 우리 신전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연합군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 빼고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군요.”
“연합군에 군비를 대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성하께서는 성하께서 할 수 있는 일에 힘써 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 아, 혹시 신탁을 위한 기도를 말하는 건가요?”
“상황이 이리 변하게 될 것은 인간 중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 하늘에 계신 우리 주께서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흠.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확실히 추기경 그대의 현명함은 저의, 아니 우리 인류의 복입니다. 하지만 신탁이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저번에 광휘의 기사를 오해하게 했다는 것도요.”
“그것은 신탁이 불완전했던 탓이 아니라, 저희 인간이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흠. 흠. 그렇지요. 아무튼,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이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내 다시 기도실에 들겠습니다.”
“현명한 결정이시옵니다, 성하.”
“아니, 아닙니다. 말 나온 김에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예?”
“기분 좋은 날이니까요. 신탁을 위한 기도는 허투루 할 수 없으니, 몸과 마음이 최상의 컨디션일 때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성하.”
말은 그리했지만, 사실 교황은 다시금 신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그의 예상이 보란 듯이 빗나갔다.
기도를 한 지 불과 일주일.
교황을 비롯한 신전의 사제들 사이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여신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모두 여신께 기도하라!”
“우와아아아아!”
하늘이 단순히 신탁이 아니라, 무려 성물을 내려보낸 것이다.
현세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질적이고 독특한 양식의 오른손 권갑 형상의 성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