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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화. 오러마스터
“운명의 파편이 위험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네. 하지만 쓸 만한 ‘도구’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검선의 그 말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 파편이라는 것이 자네가 경지 너머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그렇게 표현해도 되겠나?”
“예, 한때는요.”
“그래. 그리고 자네가 경지를 넘게 될 것 같았을 때, 그 파편이 스스로 봉인했다는 것도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싶을 때.
“그럼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잠깐만 활용한다면, 일시적으로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겠나?”
“예?!”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귀중한 카르마를 일회성으로 소모하는 것이 되겠지만, 해 볼 만한 방법이 아닌가?”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이 커진 타이니가 잠시간 생각에 잠겨 들었다.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아.’
애초에 검선이 가르쳐 줬던 것은 권능의 획득 방법이 아니라, 그 이면에 흐르는 힘인 카르마의 사용 방법이었다.
크롬벨의 표현에 따르면 카르마는 생명체의 삶이 세상에 남긴 흔적과 영향력인데, 그것이 곧 세상을 유지하는 힘인 존재력으로 치환되는 거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의 도움 없이는 그 존재력을 끌어다 쓸 수 없다 했어. 하지만…….’
검선의 생각은 달랐다.
- 뭐 다른 이의 카르마야 그렇다 치더라도, 스스로의 삶이 남긴 흔적을 스스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 혹시 신성이…….
- 신성은 고사하고, 나는 그 유물에 담긴 신성의 파편도 느끼지 못하네. 하지만 분명 카르마를 활용하고 있지. 보게. 이렇게…….
당시 검선은 그렇게 그의 생각의 틀을 깨트렸다.
그리고 그때 검선은 자신이 깨달은 카르마 활용 방법을 전하는 데에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영파로 전달했었는데.
자연히 그 영파를 감지한 에스티나도 귀를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녀 역시 오러익시더의 극에 이르렀고, 최근에는 스피릿액셀까지 깨달으며 타이니 못지않은 영격을 쌓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검선은 그것을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자신이 좀 특이한 예이긴 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2백 년간 보아 온 동대륙의 오러익시더들 중 극에 이른 이들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이면에 흐르는 힘의 존재감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고 하였으니까.
그렇다면, 어쩌면 동대륙인들은 신성을 느끼지 못한 채 자랐기에 카르마를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가설을 증명할 표본이 너무 적었다.
‘난 쉽게 됐으니까.’
애초에 타이니는 세상의 이면에 흐르는 힘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크롬벨이 착각이라고 무시했던 그 감각이 사실은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이, 검선의 가르침에 따라 증명된 것이다.
검선은 그가 쉽게 권능을 체득한 것을 보며 감탄했었다.
- 과연 대단하이. 허허.
그 칭찬에 타이니는 가르침이 좋았다고 겸양을 표해 보았지만.
- 아니, 아니야. 최근에야 깨달았네. 나는 그 카르마를 일찌감치 소모해 부족한 재능을 메꾸는 데 썼기에 신화경에 닿지 못한 것이라는 걸. 그 오만에게 당한 일격이 아니더라도, 애초부터 나에게는 닿지 않을 꿈이었어.
그 말을 하는 검선의 얼굴은 정말 너무도 씁쓸해 보였다.
- 하지만 자네라면 온전히 신화경에 오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어. 아니, 분명히 가능하겠지. 그러니 업적을 이루는 데 집중하게.
업적. 삶이 세상에 남긴 거대한 흔적.
타이니는 권능의 조각을 획득했을 때 세상에 기록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덕에 자신이 과거에 세웠던 가정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감사합니다, 여신님. 그리고 광휘의 기사님.
- 광휘의 기사가 한 일 들었어? 악마추종자들을 박살 냈대. 여신께서 돌보신 덕분이겠지.
- 광휘의 기사가 마수왕을 죽였다! 기사와 여신께 영광을!
‘우리 서대륙에서는 칭송과 추앙이 보통 여신에게 향한다. 그러니 내 삶의 업(業)이 온전히 나에게 속하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깨달음을 얻으면서 또 한 번 놀랐었다. 여신을 부정하는 듯한 결론을 내리고 만 자신에게 말이다.
신앙심이 깊지 않은 자신조차 그럴 정도니, 그 사실을 에스티나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겐, 애초에 감각이 남달랐던 자신이 영격까지 상승한 덕에 한계를 깨고 카르마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카르마의 특성상, 지금 검선이 제안한 방법에도 한계가 있었다.
카르마는 분명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무상의 힘이긴 했지만.
“제가 활용할 수 있는 카르마는 이미 권능의 획득에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카르마의 양은, 스스로 살아오면서 세상에 남긴 흔적과 영향력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
“온전히 신성을 얻는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현재의 그로서는, 세상에 더해진 존재력만큼을 사용하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을 활용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에 검선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자네는 스스로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예?”
“불굴을 얻은 이후, 몽마 군단을 확실히 정리하지 않았나? 이미 다시 자네의 카르마가 쌓이기 시작했을 거야.”
“그렇다 해도 그 양을 비교하기는…….”
“신성이나 권능을 다시 빚어내자는 게 아니야. 그저 자네 안에 담긴 그 파편의 힘을 잠깐 끌어와서, 자네가 말한 디딤돌로써 쓰자는 거지. 그 정도라면 카르마의 소모도 크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는데. 어떤가?”
“아…….”
그제야 검선의 말뜻을 이해한 타이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데.
그 순간,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스티나가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는 거야, 타이니? 설마 운명의 파편을 흡수하자는 건 아니지?”
심각한 표정으로 캐묻는 그녀.
카르마의 활용에 대한 타이니의 깨달음을 전해 듣지 못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야. 그건 위험하니까, 그냥 파편을 디딤돌 삼아서 일시적으로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는 편법을 쓰자는 거지.”
“흡수는……?”
“아냐. 절대.”
“그래. 그럼 됐어.”
그제야 안도하는 에스티나.
타이니는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고는 검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죠.”
“그래도 자네의 남은 카르마가 일회성으로 소모되는 것은 확실해. 정말 괜찮겠나?”
“오만, 당신 표현에 의하면 세계 멸망급인 그 괴물을 잡을 수 있다면, 카르마 상으로도 이득이 더 크겠죠. 안 그렇습니까?”
“흐, 그래.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먼. 말이 길었네. 이제 쉬세나.”
검선은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돌아누웠고.
그때부터 일행은 몽마 군단과의 전투에서 얻은 후유증과 피로를 덜어 내고, 칠두룡 휴브리스를 잡기 위한 본격적인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
일행은 지평선 너머에서도 일곱 개의 머리가 보이는 괴물, 휴브리스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 * *
쿠우우웅.
우르르르르릉.
내딛는 한 걸음마다 땅이 울리며 옅은 지진이 일어난다.
- 그으으으으.
일곱 개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숨결만으로 새하얀 구름들이 검게 물들고.
스아아아아.
퍼져 나가는 기운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이 오염되며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
“……엄청나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리는 그 느낌에 타이니가 치를 떨었다.
‘검선의 말이 과장됐다고 생각했는데, 반도 표현 못 한 거였어.’
감각이 예민한 만큼, 그에겐 저 괴물이 가진 힘의 크기가 더욱 저릿저릿하게 피부에 와닿는 것이다.
“유일하게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마 저 속도 하나일걸세.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이제 저한테는 의미가 있겠죠.”
“……조심하게나.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자네만큼은 반드시 구해 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전 한 번도 그런 생각 하면서 싸운 적 없습니다.”
그가 검선의 말에 호기로 답하자, 이번엔 에스티나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불리하다 싶으면 물러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우리가 목숨 걸 전장이 아니야, 타이니.”
하.
“안 물러선다니까.”
똑같은 말을 각각 동대륙어와 서대륙어로 반복해 준 후에야, 타이니는 다시 시선을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쿵.
우르르르릉.
- 그오오오오.
언뜻 지평선 너머에서 무심하게 전진해 오는 것으로 보이지만, 저 괴물, 오만 휴브리스의 머리 중 하나는 분명 일행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놈의 태도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말 그대로 ‘오만’ 그 자체.
‘흥,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타이니는 그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자. 가자.’
우우우웅.
스스로 고유의 시간이라 명명한 수법.
그에 따라 집중력이 극대화되어 자신만의 시간만을 가속시켰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흙먼지조차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 타이니는 가장 먼저 세상의 이면에 집중했다.
세상을 유지하는 그 에너지의 흐름 사이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아낸 뒤,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자신이 만들어 온 역사가 보였다.
악마추종자들을 소탕했던 일부터, 글러터니와 애버리스를 처리하고 그 군단들까지 쓸어버렸던 일. 그리고 질투의 군세를 전멸시켜 그 군단장이 머리도 못 내밀게 만든 일까지.
그 가장 큰 역할을 자신이 했다는 것을 세상 전체가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얻은 존재력에서 나온 카르마는 이미 권능 불굴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 최근에 새롭게 쌓인 흔적을 주목했다.
몽마 군단을 주도적으로 정리한 ‘사실’과 그로 인해 세상에 퍼져 나간 목소리, ‘영향력’들을.
- 결국 서방제일검이 대륙 서부의 재앙을 물리치는 거장 큰 역할을 했다. 대단해.
- 서양의 무사가 어찌 저렇게 강할 수 있지?
- 검선님보다 강한 것 같아…….
충분히 고마운 목소리들이었지만, 아쉬웠다.
권능에 완전성을 더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카르마의 총량.
자신이 권능을 얻은 이후에 색욕, 러스트를 쓰러트렸다면 달랐을까?
‘아니, 그랬다면 불굴이 지금보다 못했겠지.’
타이니는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을 떨쳐 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카르마의 총량을 가늠해 봤다.
검선의 말대로 일회성으로 소모하기엔 너무 아까운 힘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휴브리스를 잡을 수 있다면 분명히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러마스터의 경지를 그렇게라도 한번 경험해 본다면, 그 후에는 어쩌면…….’
그런 기대로 현재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카르마를 모두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영혼의 바닥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봉인시키며 잠들어 있을 운명의 파편을 찾기 위해서.
‘어디냐…….’
영혼의 힘에 있어서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성장을 이룬 그였으니, 자신의 존재 안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은 금방이었다.
우우웅.
‘그래, 너. 잠시 나를 도와야겠다.’
우우우웅.
극명한 거부 반응.
격이 오르기 전이었다면 어떻게 손써 볼 여지도 없었을 테고, 애초에 굳이 건드리려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나도 너 같은 거 흡수할 생각 없다. 잠시 디딤돌이 되는 것으로 충분해.’
우우우웅.
파편은 그조차 싫다는 듯 반항해 왔지만.
지금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힘을 부여할 수 있는 무상의 에너지, 카르마를 사용할 수 있었으니.
‘거부는 거부한다.’
타이니는 카르마를 소모하여, 운명의 파편을 영혼의 기저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벽을 반쯤 넘어가고 있던 자신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발을 디딜 받침대로 이용했다.
그러자 그 순간.
벽을 온전히 넘지 못해 그 경계에 반쯤 걸려 있던 영혼이 온전히 새로운 경지에 닿았다.
우우우우웅.
‘흡!?’
이제까지의 승격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벅찬 환희가 차오르고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노을빛이 퍼져 나오는 느낌.
- 우우우우우우!!!!
영혼의 반려인 월랑마저도 영혼을 진동시키는 전율에 휩싸여, 주인만이 들을 수 있는 하울링을 뿜어냈다.
“흐…….”
타이니는 ‘완성된 권능’을 오롯이 인식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신화시대 이후 사라졌던 서대륙의 오러마스터가, 이천 년의 세월을 넘어 동대륙에 등장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