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돌아와라
“암천일살이 쌍두 비룡을 단숨에 지상으로 추락시키고, 그 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단숨에?”
“예.”
“허……!”
국가의 위난 중 하나가 허무하게 정리되었다는 말에 왕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바다 쪽을 맡은 처남, 아니 대장군은?”
“그게, 아직까지 고전 중이시라고…….”
“허…….”
이어진 보고에는 탄식이 나왔다.
서진의 대장군이자 대륙 10대 고수 중 1인, 대해제일검 모용원호는 그 특성상 해안가에서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도…….’
서방제일검 본인도 아닌 그 일행과 자국의 최고 전력을 비교해 본 왕의 표정이 자연히 어두워졌다.
“두 괴물이 스스로 모두 악마 귀족이라 하던가?”
“……그렇습니다. 하, 하지만, 아무래도 훨씬 단단한 거북형 괴물이 공략하기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대장군님 덕분에 더 이상 동부 해안가에는 큰 피해가 번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해제일검을 비호해 주고자 하는 듯한 재상의 말은 왕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원호는 하늘의 괴물을 어쩔 수가 없기에 해안가로 간 것이 아니던가. 하늘을 나는 괴물과 바다와 육지를 기는 괴물. 어느 쪽이 어려울 것인지는 자명하지.”
“스스로 의지를 전하는, 혼세경에 달한 괴물들입니다. 단순히 그런 비교로는…….”
“그만! 지금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야!”
“아…….”
“암천일살에게 해안가의 괴물도 처리를 부탁하고, 피해를 수습할 방안을 강구해 보게. 소문이 반만 사실이라 해도, 그 괴물들이 끝은 아닐 것 아닌가?”
“……예. 알겠습니다.”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 모두가 힘을 모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파멸할 것입니다.
그 경고를 전해 온 서방제일검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맴도는데.
‘아무리 그래도, 왕국부터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고작 두 개체의 괴물 때문에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났는데, 그런 놈들을 상대하겠다고 일부러 군대를 내륙으로 보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처럼 느껴졌다.
‘군단별로 귀족급 악마가 스물하나가 있다고 했던가?’
다른 두 곳에 강림한 마족의 군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 비룡과 해룡 같은 괴물이 둘만 더 오더라도 나라가 멸망할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위난.
“그야말로 말세가 아닌가.”
“전하…….”
“……암천일살을, 아니 마도 기사를 이 나라에 주저앉힐 방법을 생각해 보라.”
“예?”
“듣기에 서방제일검은 요정신궁과 짝이라 하고, 암천일살이 마도기사의 짝이라 하지 않았던가? 마도 기사가 이 나라에 주저앉는다면, 아녀자는 자연히 남편을 따르겠지.”
“전하……?”
“회복하기 힘든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 않았나. 본디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기 마련이니, 그 틈을 공략해 보세나. 우리 공주 중 혼기가 꽉 찬 어여쁜 아이들을 추려 보게.”
그 말에 제상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오나, 그리하면 서방제일검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마도 기사가 서방제일검의 수하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 시국에 괜한 실책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재상의 걱정은 타당했다. 서방제일검의 위명은 동대륙에 재앙이 발생한 이후 점점 더 커지고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가 검선과 함께 선 제국 서부에 일어난 재앙을 종식시키러 떠났다는 소문까지 들은 마당이다.
‘그 검선과 함께 말이지.’
최소 백 년 전부터 천하제일고수였던 검선과 그를 동격에 놓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그리 굳건하다면, 애초에 암천일살이 마도 기사를 데리고 이리로 오지는 않았겠지.”
“전하…….”
“위난의 시기에는 인간관계의 틈이야 언제든 벌어지기 마련이니, 내 말대로 하게.”
재상은 더 이상 반론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재상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동진과 서진이 통합된 진 나라를 꿈꾸던 그 야망에 찬 왕이 아니었다.
‘이 나라부터 살리고, 그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사실 아직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그가 괜한 고집을 피우게 만들었다.
그 고집스러운 결정의 근거 모두가 소문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도 뒤늦게 생각날 정도로.
“아! 만약 암천일살과 마도 기사의 관계가 소문과 다르다면, 암천일살과 맺어 줄 왕자 후보도 물색해 보게.”
“예?”
재상이 어리둥절하던 그때.
- 전하!! 급보이옵니다!
대전의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또 뭔가!?”
이 시국에 급보라 할 만한 것은 모두 재앙에 관련된 것일 뿐이니, 왕과 재상의 안색이 한순간에 일그러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온 신하가 간만에 듣기 좋은 소식을 꺼냈다.
“거, 검선과 선 제국군, 그리고 서방제일검이 선 제국 서부 평야에 나타난 마물들의 군대를 모조리 섬멸하였다고 합니다!!”
“뭣!?”
왕이 놀라고 재상의 눈 또한 부릅떠지는 가운데.
“……반드시, 반드시 마도 기사를 회유하게.”
왕의 결심은 그 순간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피곤해…….’
뚝뚝.
루나는 온몸을 적신 피를 닦아 내지도 않은 채 터벅터벅 왕궁 내를 걸었다.
“히익!”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마주친 무사들이나 시종들이 기겁을 하고 물러서는 것이 보였지만,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내 피도 아닌데.’
몽마 군단과의 전투 때부터 해안가에서 거북이를 닮은 파충류 괴물을 처리하고 온 오늘까지, 거의 일주일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전투를 치렀으니.
‘그 거북이는 솔직히 너무 셌어.’
몸에 슬슬 무리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사들은 통역을 통해 거처로 모시겠다는 말을 전해 왔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한숨 푹 자기 전에 아르곤의 상태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타이니는 뭘 하고 있을까? 아냐, 일단 자고 난 다음에 만나러…….’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왕궁 내의 아는 길을 그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뒤에서 호통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email protected]#!$!?”
그리고.
“호, 호량 왕자 전하께서, 암천일살 그대를 초청하셨습니다. 왕국의 은인께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 하십니다.”
뒤이어 다소 특이한 억양의 서대륙어가 들려오는데.
고개를 돌리자, 난처한 표정의 통역을 앞세우고 서 있는 거만한 표정의 동방인 남자가 보였다.
질 좋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싸고 한껏 단장한, 앳된 얼굴의 청년.
‘왕자?’
이 나라의 왕자라고 하면 타이니한테 덤비다 박살이 난 중년 얼간이밖에 떠오르지 않는 터라, 인상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어리다 뿐이지 오연한 표정까지 그놈과 닮았다.
짜증 나게.
“나, 피곤. 나중에.”
“소, 소저! 왕자 전하의 ‘부탁’이십니다!”
“어쩔?”
피곤해 죽겠는데, 자꾸 웬 개소리일까.
“히익!”
살기를 쏘아 주자, 통역이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돌아서서 걷는데.
“Anyeoja Ttawiga Gamhi Nae……!”
뒤에서 분노한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번을 들어도 머릿속에 단어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동대륙어.
- 언어에는 규칙성이라는 게 있어. 처음에는 어순이 내가 알던 거랑 달라서 조금 헷갈렸는데…….
새삼 그 체계를 하루 만에 파악하고 유창하게 말까지 하는 아르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뒤쪽에서 나타난 무사 둘이 갑자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email protected]#!$”
그 와중에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것이 우습다가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갈 것 같으니.
“귀찮아. 비켜.”
손짓하여 의사를 표현해 보지만, 눈앞의 두 무사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 표정으로 자세를 낮추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여차하면 검을 뽑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이것들이 돌았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화도 잘 나지 않는 법이라, 루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러다.
“와, 왕자님께서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따로 씻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통역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다시 분노가 폭발했다.
“다, 꺼지라고 전해. 안 그러면, 저놈을 비롯해서 모두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고.”
스아아아아.
스산하게 퍼져 나가는 살기.
동대륙의 침술을 바탕 삼아 마룡 군단의 악마급 둘을 어렵지 않게 참살할 정도로 성장한 루나의 살기는, 그녀의 피곤함과 상관없이 사방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통역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뜻이 전달됐는지,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왕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놈이 통역에게 뭐라 다시 중얼거리는데.
“호, 호의를 협박으로 받는 것은 이곳에서는 예절이 아니라 하십니다. 또…… 와, 왕의 비가 되려면 예절을 확실히 익히셔야 한다고…….”
“뭐?”
왕자의 말을 전하면서도 그게 터무니없는 소리란 걸 너무나 잘 아는 통역이 말끝을 흐렸다.
이미 루나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으니.
“[email protected]$!!%!……!”
그녀는 거만한 표정의 왕자가 다시 뭐라 지껄이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았다.
이 나라의 왕자라는 것들은 죄다 머릿속이 꽃밭인가?
‘이놈들을 쳐 죽이고 깽값을 물고 만다.’
스트레스가 극에 이른 루나가 단검을 던지려던 순간.
[넌 쉬어.]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주변의 마나가 움직이며 일순간 왕자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읍!? 읍!?”
챙!
이상을 감지한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드는데.
우드드득.
“윽!?”
“[email protected]$!”
갑자기 돌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넝쿨들이 그런 호위 무사들과 왕자의 몸를 칭칭 묶어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느새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 왕실 놈들은 전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첫인상과 너무 달라.”
“아르곤!!”
푸른 눈, 갈색 머리의 청년이 창백한 안색으로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부상은!?”
“바늘 뽑자마자 회복 마법을 썼지. 육체 상처는 다 나았어. 보다시피.”
빙긋 웃으며 팔을 벌려 보이는 모습은 확실히 창백한 안색을 제외하면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때.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넝쿨에 매달려 허공에 대롱거리는 무사들이 뭐라 지껄이는데.
“Nae Yeoja Da! Dakchyeo!”
루나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아르곤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 왕자와 그 무리가 금세 조용해졌다.
“무슨 말, 한 거야?”
“아냐. 있어. 그냥 닥치게 만들 수 있는 말. 아무튼, 나 타이밍 잘 맞췄지?”
“……응. 제법.”
“씁, 이럴 땐 멋있다고 해도 되는데. 짠 하고 나타나서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줬잖아.”
아르곤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네가 구해 준 건, 저것들. 나, 아니야.”
이어진 루나의 말에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 뭐, 그나저나 빨리 이곳을 뜨자. 아, 너 좀 쉬어야 하지? 얼마나 쉬면 돼?”
아르곤의 여유로운 태도와는 달리, 이어진 말은 조금 다급하게 느껴졌다.
“왜? 무슨 일, 있어?”
“어, 근데 일단 네가 쉬고 난 다음에.”
이내 그의 표정이 무거워지자, 루나는 극한의 피곤함 속에서도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듯했다.
“말해 봐.”
“그…… 오늘 회복하고 나서 탐지 마법으로 왕궁을 훑고 있었는데, 서대륙에서 온 통신이 있었어. 그런데 이곳 왕이 그 통신을 우리에게 감추라고 지시하더라고. 여기 왕도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참.”
“대체, 무슨 소식인데?”
아르곤의 말이 이어질수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일단 쉬고 듣는 게 나을 텐데…….”
“무슨 소식이냐니까?”
“그게, 이제 열흘쯤 뒤면 저번 강림 후 49일이잖아.”
“설마……!”
“……어, 그 설마야.”
망설이던 아르곤이 결국 그 ‘통신’을 전해 주는 순간.
루나는 아찔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열흘 후, 서대륙에 또 다른 강림 포인트 생성 예정. 광휘, 수호, 마도, 사신은 최대한 빨리 귀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