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400화 (400/500)

400화. 살릴 것이다

쿵.

“이놈이 마지막입니다, 형님.”

“그래. 하…….”

서일산은 양일원의 그 말에 그제야 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감정이 듬뿍 담긴 한숨이었다.

전투는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쉽게 끝났다.

육백에 가까운 전투 인원 중 사망자는 고작 백여 명뿐이었고, 중상자는 그보다 적었다.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으니, 자신이 동귀어진하거나 아군이 전멸하는 사태를 각오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전과의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봐도 확실했다.

‘마물들이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흘 전 평야에서 벌였던 전투의 막바지에는 그 사실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마법뿐만 아니라 매혹의 힘까지 사용하는 적들에게 이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땐 급박한 상황이었고, 광휘 공을 쫓는 마물들의 뒤를 쳐서 피해를 입힌 뒤 빠져나갈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를 쫓아온 것도, 결국은 우리가 아닌 광휘 공의 자취를 쫓은 거였겠군.’

그 생각을 하면 허망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 해도 이 상황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이었다.

광휘 공.

애초에 그 신화경의 괴물을 끝장낸 것도 그였고, 마물들의 군단을 주도적으로 처리한 것도 그였다.

그것도.

‘동료들을 잃어 가면서까지…….’

멀리 요정신궁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묵념하고 있는 광휘 공을 보니, 서일산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머나먼 타향에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찾아와, 동료들까지 잃어 가며 세 개의 재앙 중 하나를 간신히 막아 냈다.

동부의 마충 떼와 남부의 용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역시 한숨이 나오는데, 서대륙에서부터 전쟁을 해 왔다는 광휘 공과 그 동료들의 심정은 어떨까.

그리고 그간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을까.

서일산은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광휘 공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요정신궁과 광휘 공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먼저 떠난 동료들을 향해 묵념을 하는가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

“[email protected]#%!!!”

“노! @#$%!! 이블! 쉬 크레이지!!”

뭔가 광휘 공이 요정신궁한테 혼나는 듯했는데.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일산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일부러 기척을 내었다.

“흠. 흠.”

그러자 그 헛기침 소리에 광휘 공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아, 대장군. 수고하셨습니다!”

평소의 어눌하던 어투는 생각도 나지 않는 깔끔한 문장.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과할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그 뒤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째려보는 요정신궁의 눈길이 유난히 따끔거렸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아. 그 말은 제가 해야겠지요. 정말 대단한 활약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서부의 재앙, 몽마 군단은 처리가 된…….”

“그럼, 누가 가르쳤는데.”

공치사를 하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르신?”

아직 회복하지 못한 부상 때문에 전방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유물의 범위를 벗어나 적에게 홀린 무사들을 두들겨 패고 귀신같이 전열을 유지하게 만드는 등 2선에서 역할을 톡톡히 한 검선이었다.

그런데, 가르쳤다니?

‘누가 들으면 진짜 광휘 공 스승인 줄 알겠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광휘 공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방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신뢰와 공경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거래 관계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들었다.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지만.

‘그런 문화권에서라면, 뭐 하나 가르쳤다고 스승이라 자처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물론 검선의 깨달음이라는 게 그리 가벼운 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너 설마 권능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던 거냐?”

“예? 예.”

“어떻게?”

“예? 그냥 되던데요?”

“그러니까, 그냥 어떻게!?”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목적을 노골적으로 밝힌 검선의 눈빛은 보기 드물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권능 발현 시에 마나를 집중하고 억지로 유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냥 팍, 하고 흡, 하는 느낌으로…….”

“팍? 흡?”

“예, 덕분에 큰 기술이 거의 봉인당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었지만, 검선은 무엇인가 납득한 듯했다.

미친놈들…… 아니, 미친 분들인가.

“말도 안 되는 기(氣)의 유지력이 필요할 텐데, 역시 네 양신(養神)이…….”

검선이 중얼거린 그 말도 그로선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서일산은 온전히 자신의 목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선 제국을 대신해서, 아니 동대륙의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광휘 공과 그 동료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마도 기사와 암천일살의 희생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폐하께 아뢰어 확실한 보상과 추모를…….”

“워, 워. 대장군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임까?”

나름 진지하게 말을 잇는데, 광휘 공이 끼어들었다.

제법 유려하게 구사하던 문장도 다시 어눌해져 있었고, 표정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왜, 왜 살아 있는 애들을 죽임까?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은 검까?”

“살아…… 있습니까? 마도 기사와 암천일살이?”

일순간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에 각기 다른 감정이 담겼고.

“아 씨, 짐작이었군요.”

“허. 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하.”

무거운 짐이 사라진 듯한 느낌에 서일산은 진심으로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럼 그 두 분은 어디에?”

“어, 그건 저도 모름다.”

“…….”

이 새끼, 그럼 왜 살아 있다고 말한 거지?

서일산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지만, 그 상황조차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 동쪽.

두두두두.

- 대장군님!!!!!!

본대가 후퇴한 방향에서, 한 기의 기마가 미친 듯이 급하게 달려오며 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니까.

* * *

나흘 전.

강남 평야 외곽, 숲의 경계.

“탈출, 성공.”

나뭇등걸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루나의 말에 대답하듯, 뒤이어 튀어나온 아르곤이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단순한 기침이 아니었다. 쿨럭일 때마다 피가 섞여 나오고 있었으니.

“힘들어?”

“버, 버틸 수, 있어.”

아니, 버틸 수 없다.

루나는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허세를 부려 온 아르곤의 표정을 읽고는 그리 판단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아르곤은 이 전장에서만 전력을 짜낸 마법을 몇 번이나 사용했다.

처음 제국군이 돌진할 때, 타이니의 동족 강화의 권능과 더불어 일순간 매혹을 흐트러트렸던 각성 마법을 썼고.

비록 완전한 구현에는 실패했지만, 발밑에서 터져 나오는 죽음의 유성 데스 스트라이크를 사용했을 땐 스스로를 한계까지 쥐어짜야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무리.’

그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색욕에게 홀려 아군을 공격하면서 또 전력을 쏟아 냈다.

웬만한 마법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타이니와 그에 준하는 강자인 검선을 동시에 묶어 버린 것을 보면 무언가 깨닫긴 한 모양이지만, 그런 힘을 하필 아군에게 쏟아 낸 것이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거기다 그 후에 그림자 도약으로 연달아 대미지를 받았을 땐 갑자기 그림자 마나를 활용하며 그 부담을 줄인다 싶더니, 다시 한번 충격을 받고 나선 깨어나서 전장 전체에 각성의 마법을 흩뿌렸다.

루나는 그것이 아르곤의 몸에 치명타를 입힐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 내, 내 잘못이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야 해!

울먹이면서 마력을 쥐어짜 내는 아르곤을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태였다.

“치료해야 해.”

“아, 아냐. 난 정말 괜찮…….”

털썩.

허세를 부리던 아르곤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대륙에서 이 정도로 중한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타이니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전장에서 천지를 물들이는 노을빛이 터져 나왔으니, 아마도 타이니는 빅뱅을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가 마무리돼도, 아르곤을 바로 치료하는 것은 무리야.’

심지어 그 전투도 그리 쉽게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다.

- 두두두두두.

- 콰아아아앙!

- 아아악!

거친 소음과 처절한 비명.

당장이라도 저 전장에 손을 보태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르곤이 죽어.’

눈앞의 이 남자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바보 같으니…….”

아르곤을 내려다보는 루나의 눈길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아르곤은 애써 아닌 척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타이니처럼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그를 의식한 나머지 무리를 계속해 왔다.

지금의 상황은 언제고 터졌을 일이 이제야 닥친 것뿐이다.

“아파도, 참아.”

그가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 루나는 두 손가락에 죽음의 오러를 모으며 그리 속삭였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시킨 옅은 죽음의 오러를 아르곤의 전신 구석구석에 밀어 넣었다.

부르르르.

기절한 와중에도 아르곤의 몸이 경련이 일었다.

얼핏 보면 당장 죽으라고 확인 사살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모르스 가문 내의 비기 중 하나였다.

인위적으로 가사 상태를 만들어 내서 죽기 직전의 중상을 치유하는…… 아니, 죽음을 유예하는 비전 중의 비전이었다.

전신의 신진대사를 극도로 낮추어서 생명 활동을 거의 중지시키고 상처의 악화까지 막아 버리는 방법.

하지만 그녀의 오러가 죽음의 힘을 갖게 된 이상 이 수법은 그 기간도 극단적으로 길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 본래의 비전에는 없는 다른 조치도 필요했다.

솔직히 꺼림칙했지만.

‘내버려 두면, 정말로 죽는다.’

루나는 굳은 얼굴로 아르곤을 눕힌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든든하던 타이니와는 전혀 다르게, 자꾸 챙겨야 할 것 같은 빈틈이 많은 남자.

“쓰읍.”

루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입술을 살짝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살포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 즉 생명력의 일부를 불어 넣은 것이다.

아르곤의 몸에 주입된 죽음의 오러가 그 생명력에 감응하도록 유도해서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키지 않게 만드는 미봉책.

“잠시, 아주 잠시만 빌려주는 거야.”

생명력의 일부를 떼어 낸 탓에 창백해진 얼굴에 왜인지 약간의 홍조가 도는데.

그 순간, 완전히 죽어 가던 아르곤의 얼굴에도 홍조가 도는 게 보였다.

“으음.”

“흡!?”

갑자기 나온 신음에 루나는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이내 그저 괴로운 표정을 짓는 아르곤을 보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콩닥. 콩닥.

왜인지 얼굴이 뜨거웠지만, 착각일 터였다.

이제 그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쟁을 끝내고 타이니가 회복될 때까지만 아르곤을 가사 상태로 두면…….’

다시금 전장을 돌아보는 그때.

- 끼루루루루.

먼 하늘에서 카일룸이 동쪽을 향해 쏜살같이 도망치듯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뒤를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마족들이 쫓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악마급들의 괴물 여섯이었다.

거기다.

- 후퇴! 후퇴하라!

두두두두두두.

선 제국의 기마대 역시 미친 듯이 동쪽을 향해 말을 달리는 게 보였고.

그 뒤를 남은 몽마 군단의 정예들이 뒤쫓고 있었다.

“전장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뒤를 따라가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아마도 카일룸의 위에 있을 타이니를 따라가는 것도 불가능.

그렇다면 중상을 치료해 줄 수 있는 다른 이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동대륙에 대해 무지한 그녀가 당장 그런 사람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도움을 받아야 해.’

그렇다면.

‘서쪽…….’

동대륙에 와서 일행과 확실하게 우호 관계를 맺은 나라는 선 제국과 서진뿐이니.

아르곤을 들쳐 멘 루나가 그 자리에서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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