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불굴
황실 친위대가 천문금쇄진을 뚫고 진지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난 지금.
선 제국 본대의 주둔지에서는 후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정렬!”
“흐트러지는 것은 용서 못 한다!”
“제국의 기강을 보여라!”
“하!!”
그들은 병력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했는데.
그것은 선 제국의 군사들이 평소에 잘 훈련되어 있던 덕이기도 하지만.
“뭐야, 저거…….”
“무서…….”
“시끄럽고, 뒤만 봐. 우린 저기 반대로 후퇴하는 거야.”
“X발, X라 다행이다.”
땅과 하늘을 뒤덮은 천문금쇄진이 대부분 검게 물들어 버린 광경이 일반 병사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덕분이기도 했다.
물론 그곳엔 일반 병사들과는 전혀 다른 간담과 실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찢어 죽일 마물 새끼들. 친우의 복수를 해 주마.”
“내가 물러설 줄 알고……?”
“이번엔 반드시 설욕한다. 인간도 아닌 것들이.”
“마물들이라. 흐, 궁금하군.”
최소 6단계, 감각권을 이룬 무사들.
칼끝에 목숨을 걸고 호기만으로 인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길을 걸어온 이들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정점에 있는 이는, 만류하는 서일산의 손을 뿌리치며 전방으로 나서고 있었다.
“어르신, 굳이…….”
“괜찮네. 신화경의 괴물도 처리한 마당에. 그리고…….”
멀리 거대한 구름의 장벽 바로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 무사, 아니 기사를 바라본 검선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굳이 내가 무리를 할 이유도 없을 테고.”
서일산은 검선의 그 자신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광휘 공의 무력, 특히나 신화경의 괴물을 끝장낸 그 일격의 힘은 분명 자신의 인지마저도 벗어난 초월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격을 아무 때나 쓸 수 있을 리는 없고, 실제로 그 일격을 쓴 이후로 광휘 공은 악마급 마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했었다.
‘어르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지. 그 기술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커.’
물론 굳이 그 기술을 쓰지 않아도 단시간이나마 자신과 의동생들을 상대로 대등하게 겨뤘던 광휘 공이지만, 서일산은 그것을 감안해도 지금의 승산을 반반으로 보고 있었다.
거기엔 무엇보다.
“광휘 공이 완전히 회복했다 한들, 분명 혈전이 벌어질 겁니다. 당장 가루라 진법을 유지할 황실 친위대도 절반이 채 살아남지 못한 상황입니다.”
이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6단계 초절정 무인들의 숫자는 오백을 넘어 육백에 가깝게 충원되었지만, 전체적인 무력은 확연하게 떨어졌다.
거기다 무거운 마음에 차마 묻지는 못했지만.
‘마도 기사와 암천일살도 없어.’
전장에서 신화경의 괴물을 대번에 상공으로 추출해 버렸던 기술과 매혹을 잠시나마 흩어지게 했던 마도 기사의 요술.
이젠 그 모든 것을 쓸 수 없다.
그런 상황들을 모두 감안했을 때, 지금의 전투력은 나흘 전에 비해 절반에 못 미친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혹시나 여기서 일이 잘못되면, 후에 수습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한 그가 그 뒷일을 걱정할 만큼, 전장에서 피부로 접한 매혹의 힘은 끔찍했다.
그리고 그 수습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현재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전력에서 반쯤 이탈한 검선일 것이다.
서일산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으니.
“어르신, 혹시나 하는 경우를 위해, 미래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레 의견을 다시 말해 보는데.
“괜찮네. 적에게 홀리는 이만 나오지 않는다면, 적어도 선 제국에 강림한 이 마물의 군단은 오늘 끝장날 테니까.”
검선의 태도는 요지부동으로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강요할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보중하십시오.”
“당연히 그럴 걸세. 걱정해 줘서 고맙네, 일산.”
그 훈훈한 미소가, 아주 오래전 이 전설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50여 년 전, 무(武)의 자질을 가진 길거리 고아를 알아보고 선 제국의 황실에 맡겼던 노인.
어쩌면 이제 삶의 끝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갑자기 그때의 추억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지만, 예전처럼 편히 대해 주셔도 됩니다, 어르신.”
“음? 허허, 됐네. 선 제국의 대장군에게 꼬마니 뭐니 할 수는 없잖은가? 무엇보다 이젠 자네가 나보다 크고.”
“제가 듣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 말에는 천하의 검선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돌아선 노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천하의 중천제일검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허. 약해졌구나, 일산.”
그 말에 서일산은 빙긋 웃음으로 답했다.
“……각오를 다지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천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래. 그 성질 급한 놈은……. 결국 이 노인네보다 먼저 가 버렸지. 대신 녀석의 목숨을 대가로 너희들은 이 나라를, 아니 대륙을 구해 낼 거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될 거야. 서방의 빛이 우리에게 내려왔으니. 그 빛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말이야.”
광휘(光輝). 그 이름을 말하는 검선의 얼굴에는 자신감만이 보였고, 그것이 서일산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다.
“예, 그에게만 모든 걸 맡겨 놓을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확신하십니까?”
“흘흘. 그래. 저 녀석, 권능의 조각을 터득했거든.”
“예??”
“뭐, 그런 게 있어. 한숨 돌리고 나면 자네에게도 말해 주려 했던 것 말이야. 거기서 너무 빨리 소득을 얻었지. 이미 준비된 녀석이었으니까.”
“아, 혹시……!”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서일산의 눈동자가 커지는 순간, 검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허…….’
그에 서일산은 놀란 눈으로 전방에 있는 타이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에서 검선은 묘한 표정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한데…….’
안 그래도 거의 자신에 준하는 경지를 개척한 녀석이었기에 권능의 조각을 대번에 얻어 버린 것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저 녀석, 영혼에 이상한 걸 품고 있어. 저 무기도 이상하고…….’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 아주 조금.
* * *
“내가 놈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더라도, 놀라지 마.”
“뭐?”
놀라지 말라고 한 말에 도리어 눈이 두 배로 커진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죽으려고 환장했어!?”
목소리가 높아지는 에스티나의 모습에 타이니는 미소로 답했다.
“자신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걱정하지 말라고.”
남은 수가 여전히 7~8천에 이르는 몽마 군단.
그중 장군급만 셋인 데다 일반 악마급도 열 가까이 남아 있을 테니, 그런 마족의 군대를 빅뱅 한 방으로 쓸어버릴 수는 없다.
물론 그 많은 수를 각개 격파하는 것은 당연히 그보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믿어 봐.”
“혹시 그 권능 조각이란 것과……?”
“응, 관련 있어. 아직 온전하지는 않지만.”
사실 타이니에겐 조금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드디어 닿았나 생각했는데, 결국 그 과실의 일부밖에 취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적어도 빅뱅으로 일부 적들을 소멸시키고 한동안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리는 것보다는 확실한 수단이 생긴 것이다.
그 자신감에 에스티나의 표정이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르르르릉.
파지지지직.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해. 알지? 공중으로 도망가는 놈만 잡아. 적극적으로 나서진 말고.”
“……응.”
우우우웅응.
“끼루루루루루!”
에스티나가 카일룸을 소환하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아우우우우!”
월랑을 소환한 타이니는 등 뒤에서 그대로 녹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되어, 선 제국의 정예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다!”
“선두는 광휘 공, 서방제일검이다!”
“사전에 말한 대로……!”
무사들이 정렬하는 순간.
“하!”
선두에 나선 서일산과 양일원의 기합 소리와 함께, 거의 600명에 이르는 정예들의 전열 위로 황금빛 새의 형상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흘 전 서부의 평야에서 보인 찬란한 빛에 비하면 확연히 기세가 덜해 보였다.
진식을 주도해야 하는 황실 친위대의 정예들이 너무 많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고 후송된 것이, 당장 눈앞에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물러서지 마라!”
“제국의 안위가 우리에게 달렸다!”
“예!”
하루간의 짧은 휴식을 취한 황실 친위대와 그들의 대열에 새로 합류한 무사들의 전의만큼은 드높았다.
이백 년 가까이 평화의 시기를 지낸 동대륙의 무사들에게 전공이란 전설 속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달랐으니까.
“오늘 우리가 대륙의 전설이 된다!!”
“우와아아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함성.
고작 육백의 기병이 토해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함성이 검은 구름의 장벽 속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압도했다.
그것은 전열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이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형님…….”
“그래, 가능하겠어.”
그 사기가 양일원과 서일산의 마음속에 남은 불안감을 털어 낸 것이다.
‘눈앞의 이놈들에게 집중한다.’
남부를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용들의 군세도, 동부를 박살 내는 중이라는 벌레 떼도 지금은 머릿속에서 지운다.
그리고 집중했다.
‘자. 보여 주시오, 광휘 공. 그대가 무엇을 얻었는지.’
그렇게 모두의 불꽃 같은 시선이 모여드는 순간.
- 쩌저저저저적.
검게 물든 구름 장벽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 꽈아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콰.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풍이 불어닥쳤다.
선 제국의 반년 치 예산을 쏟아부은 막대한 규모의 천문금쇄진이 일시에 깨져 나간 것이다.
“으아아악!”
“끄악!”
“끄르르륵.”
진법을 주도하던 도사들이 일제히 피를 토해 내며 주저앉을 때.
흩어지는 검은 구름 속에서 진득한 살기가 서린 영파가 울려 퍼졌다.
-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죽여라!
- 음!? 저기……!
- 목표. 확인. 코앞.
마족 여인, 몽마 군단의 제1 장군 라미아를 필두로.
박쥐 날개를 단 쌍둥이 몽마 장군, 인큐버스 마스와 서큐버스 아니메데 또한 타이니를 포착했다.
- 겁도 없이!
그리고 이전 전투에서 살아남은, 천문금쇄진 안에서 살기를 극도로 쌓아 올린 다른 악마급 마족 열 개체 역시 군주를 죽인 원흉을 동시에 타겟팅 했고.
- 찢어 죽여!!!!
라미아의 지시와 함께, 무려 열셋의 악마급 마족이 수많은 마법을 쏟아 내며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콰콰콰콰콰콰콰.
나아가는 방향의 공기까지 태우는 검은 불꽃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순식간에 사방을 녹색으로 물들이는 지독한 독기가 타이니 근방을 휘감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스으으으으으.
그리고 그 위로 혹한의 냉기를 품은 송곳 같은 얼음 벼락이 떨어져 내리고.
번쩍.
꽈아아앙.
파지지지직.
검붉은 벼락과 땅을 검게 물들이는 저주,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검은 넝쿨이 진득한 악의를 담아 타이니를 소멸시키기 위해 쏟아졌다.
그러나.
쩌어어어어엉.
그 중심에서 솟구친 노을빛 서광은 그 모든 공세를 받아 내며 굳건한 기세를 자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방어력.
‘아니, 조금 느낌이 다른데……?’
쏟아지는 8서클의 흑마법들이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분명 비정상적인 상황.
혹시 군주를 소멸시킨 그 빛일까.
라미아의 마음속에 불안과 함께 의심이 싹텄지만.
[이게 고작이냐?]
이내 타이니의 도발적인 영파가 몽마 군단의 수뇌부를 자극했다.
색욕, 러스트가 가졌던 매혹의 권능은 누구보다 강력했으니, 그 힘에 최소 백 년 단위로 잠식당해 온 그들은 주군의 소멸 이후 이미 복수심이라는 광기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약간이나마 이성이 남아 있는 것은 제1 장군이라 할 수 있는 라미아뿐.
그런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해.’
하지만 군주가 소멸된 마당에 완벽하게 차분한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라미아에게도 무리였으니.
- ……죽여.
마법이 안 통한다면, 힘으로.
본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무력을 가졌을 마족들이, 전신으로 진득한 암흑 오러를 내뿜고 마법을 휘감으며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타이니는 천천히 녹턴을 들어 힘을 끌어 올렸다.
‘이것이 권능…….’
아직은 일부밖에 얻지 못했기에 불완전하지만, 분명한 신성의 힘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업(業), 카르마(Karma)는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기 이전에 영혼이 남긴 삶의 흔적이니.
그 흔적이 빚어낸 신성은 주인의 삶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 험한 세상 속에서 수많은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내 길을 가고자 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의지를 관철해 왔다.
- 그렇게, 살아왔다.
모든 것을 무너트리는 일격인 빅뱅이 자신이 가진 욕망을 담아낸 것이라면, 지금의 이 권능은 자신의 삶을 담아낸 것이었다.
- 의지가 다하지 않는 한, 쓰러지지 않는다.
권능, 불굴(不屈, Iron Will).
아직은 불완전한 신의 권능이, 노을빛 서광을 담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