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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397화 (397/500)

397화. 보여 줄게

천문금쇄진(天門金鎖陳)을 뚫고 돌아온 서일산을 비롯한 황실 친위대의 몰골은 빈말로도 좋다 하기 어려웠다.

히이이이잉!

털썩.

쿵.

기수의 기공(氣功)에 의해 보호받고 기력이 강화된 채로 사흘 밤낮을 질주한 말들이, 안전지대로 들어오는 순간 일제히 쓰러졌다.

“크륵.”

“크르륵.

하나같이 피거품을 무는 것을 보면 불행히도 이미 명을 다하고 만 듯했는데.

그럼에도 그 말에서 뛰어내린 무사들은, 애마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전에 본대의 병사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의원! 의원을 불러와!”

“들것!!”

“거기 병사! 뭐 하고 있어!? 부목이라도 가져와!!”

말보다는 사람을 챙겨야 했으니까.

“어? 예. 예!”

우당탕탕.

그제야 온몸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널브러지는 무사들.

“크…….”

“살았다.”

“량! 이 친구야! 정신 차려!!”

크게 다쳤거나 완전히 진이 빠졌거나, 혹은 둘 다거나.

그 처참한 모습을 아군의 병사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대장군님이……?”

본대의 병사들 중 눈썰미가 있는 일부는, 그 상황에서도 황실 친위대 사이에 섞여 있는 조금 다른 행색의 무사들을 구별해 냈다.

“저건 동진의 무사들 아냐? 저들은 왜……?”

웅성웅성.

혼세경과 초인경의 고수들까지, 누구 하나 멀쩡해 보이는 이가 없는 비참한 상황.

심지어 그 무리에서는 황실 3대 고수이자 대륙 10대 고수 중 일인인 개벽일월부 장천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본대의 지휘관, 상장군 염환이 먼저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챘다.

“장 장군님은 어디 계십니까?”

“전사했다.”

“예!?”

서일산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친위대를 마주하던 선 제국 장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혼세경의 고수가 전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불신의 기색을 보이며 잠시 주춤거리던 이들도 이내 서일산과 양일원의 무거운 안색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 그런…….”

“허…….”

모두가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숙일 때.

서일산 역시 전장에 두고 온 의동생의 시신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우여, 미안하네. 기필코 다시…….’

그는 그 아픔을 가슴속에 묻어 둔 채 당장 급한 일부터 물었다.

“검선 어르신은!? 서방제일검은 이곳으로 온 건가?”

“예? 아, 예!”

“하, 다행이군.”

염환의 대답에 서일산이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에서 멀어져 가던 신조를 보며 짐작은 했지만, 다행히 아군의 최강 전력들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희망은 있다.’

특히나 광휘 공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그 엄청난 노을빛 파멸, 평야에 협곡을 만들어 낸 그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낙관해선 안 돼. 검선 어르신도, 광휘 공도 아직 제대로 회복하지는 못했을 거야.’

격렬한 전투 뒤에 사흘 넘게 잠도 자지 못하고 질주해 온 자신들보다, 신화경의 괴물을 처리한 후에도 전투를 이어 나갔던 두 초인의 상태가 더욱 안 좋을 것이다.

실제로 광휘 공 같은 경우는 몽마 군단의 무리에게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을, 자신의 눈으로도 똑똑히 보았으니까.

“두 분의 상태는?”

“그게, 3일 밤낮을 밖으로 나오시질 않으셨습니다.”

역시.

그 말에 서일산의 안색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상세가 그리 좋지 않은가?”

걱정스레 물었는데, 대답하는 염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검선 어르신에 대해선 제가 감히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다만 서방제일검은 매일같이 엄청난 식량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보니 멀쩡하지 않을는지…….”

“뭐?”

말끝을 흐리는 염환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며 서일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장이 다 자리를 바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한 상세를 입었을 텐데, 엄청나게 먹어?”

“그, 그렇습니까?”

염환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을 뿐,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염환의 부관이 그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아, 지금은 두 분이 같이 계신답니다. 요정신궁도 함께요.”

“그런가. 그럼 바로 그리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서일산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일단 신화경의 괴물을 처리했으니, 승세를 잡은 것이다. 허나, 이리로 후퇴한 것이 정말 잘한 일일까?’

그런 그의 시선은 백인장들이 나눠 가지고 있는 신화경의 유물들을 향해 있었다.

신성한 빛인지 뭔지 여전히 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효용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끼치는 범위는 대군을 모두 아우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니.

악마급이라 불리는 혼세경의 괴물들을 대군 사이에 풀어놓는다면 어떤 재앙이 벌어질지,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때.

우르르릉.

천문금쇄진 방향에서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여드는데.

황실 친위대가 통과해 온 부분부터 하늘 위까지 걸쳐 있는 구름의 벽이 급격히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저, 저런……!?”

“갑자기 저렇게!?”

그에 서일산의 안색이 확 굳어질 때, 말에서 내리자마자 부상자들을 한 명씩 챙기고 있던 양일원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형님!”

“서두르자. 빨리 검선 어르신께로…….”

마음이 다급해진 서일산이 염환을 향해 손짓할 때.

갑자기 병사들 사이에서 분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선발대만으로 무리한 돌격을 감행하신 겁니까!!”

한 젊은 장수의 고함.

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무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태을명, 자네 미쳤나!?”

주변에는 그를 타박하는 이도 있었지만.

“본대와 합류해서 쳐들어갔으면 쉽게 끝났을 일 아닙니까!? 어째서 독단으로 황실 친위대를 갈아 넣으신 겁니까!? 그래서 장 장군님도 돌아가신 거 아닙니까!”

그 패기 넘치는 겁 없는 목소리가 아랑곳없이 이어지자, 비교적 젊은 또래의 장수들이 소심하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좀 무리수가 아니었습니까?”

“애초에 장 장군님의 급하신 성정을 생각하면, 분명히 무슨 사달이…….”

“이건 월권…….”

전쟁을 단순히 공을 세울 기회로 여기고 있는 철없는 무사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한 순간.

“뭘 모르면 닥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입을 막았다.

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명망이 드높았던 양일원의 분노 어린 고함에,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눈이 커졌다.

“전장을 네놈들 놀이터로 아는가!? 장 아우가, 혼세경의 고수가 전사한 전쟁이 우습게 보여!? 거기 네놈! 네놈이 저 안으로 들어가 볼 테냐!?”

거친 폭언에 이어진 손가락질.

개천관일창(開天貫日槍)이라 불리는 양일원은 점차 더 검게 물드는 천문금쇄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애초에 적은 사람을 홀리는 마물의 군대라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는데! 귀가 먹었거나 정신이 나간 새끼가 아니라면, 이 상황에 감히 그런 딴지를 걸어!?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은 결코 피로감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네놈, 망나니 폐태자 놈의 개지?! 그 정신 나간 새끼가 유폐된 와중에도 나라를 말아먹을 궁리만……!”

“그만! 일원, 과하다.”

“형님……. 그래도…….”

입술을 질끈 깨문 양일원이 한마디를 더 보태려 할 때.

서일산의 눈은 좀 전까지 분란을 조장하던 젊은 장수들을 향했다.

“장 아우는 마물에 홀린 동진의 초인경 무사 셋의 기습을 받던 와중에도 혼세경의 마물 둘과 함께 동귀어진했다. 개벽일월부의 최후는 그 위명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으니, 젊은 장수들은 감히 외람된 말을 전하지 말라!”

파리한 안색과 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그럼에도 좌중을 무겁게 찍어 누르는 그의 기세는 소란을 대번에 잠재웠다.

“대장군…….”

“역시…….”

서일산이 선 제국의 황실 무사로서 곱게(?) 성장해 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차세대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중천제일검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그 한 번의 행동만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무려 초인경의 무사들까지 마물에게 홀려서 아군의 등을 찔렀다는 사실은 무사들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대군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까?”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거지.”

“허허, 어찌 이런…….”

“진정 그것이 진실……?”

다시금 무거워지는 분위기.

“장 아우를 비롯한 모든 전사자들 덕분에 우리 군이 승기를 잡았다. 뒤쪽의 구름에 갇혀 있는 저들은 그 패잔병에 불과하지. 물론 그렇게 폄하하기에는 보시다시피 너무 강력한 적이기는 하지만.”

우르르릉.

다시 퍼지는 천문금쇄진 내부의 천둥소리와 그에 따라 더 빠르게 번져 가는 먹구름.

그것이 자연스레 좌중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 때.

“일단…….”

뒤를 흘깃 돌아본 서일산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천문금쇄진을 유지하는 도사들과 병사들을 제외한 중상자와 부상자들을 후송하고, 초절정 이하의 모든 병력들은 후퇴를 준비하라!”

“예?”

“이곳에 남는 병력은 600기 이상은 필요 없다. 가루라 진을 유지할 수준이면 충분해.”

“이미 승기를 잡았다면서, 왜 후퇴를 하십니까!?”

그러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반론에, 다시금 눈에 불길을 피워 올린 양일원이 고함을 질렀다.

“몇 번을 말해, 이 똥 멍청이 새끼야!!? 유물의 범위 밖에서 적의 기세에 그냥 노출되면 바로 매혹돼서 적군이 된단 말이다! 꼴리면 네놈은 남아! 네놈이 마물에게 홀리면 내가 친히 목을 따……!”

“일원!!”

“……끄응, 예.”

서일산이 호통을 치며 말리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로 수그리는 듯했지만.

그런 양일원이 대장군에게 전음으로 전한 말은 그 표정과 전혀 달랐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천일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 알아. 고맙다.]

다행히 그 효과는 확실했으니.

담담한 서일산의 말보다, 평소의 인망에 어울리지 않게 발작하듯 화내는 양일원의 모습이 장수들의 표정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이다.

자연히.

“후퇴를 준비하라!”

“후퇴 준비!”

“6층, 감각권이 가능한 수준의 무사들만 남는다!! 제일 강한 자…… 300명만 차출하겠다!”

상장군 염환이 황실 친위대의 실질 전력을 감안해 가며 적절히 인원을 추리기 시작하는 동안.

서일산은 부관의 안내를 따라 검선이 있는 막사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우르르르릉.

쩌저적.

이제는 숫제 구름 밖으로 검은 번개까지 치고 있었으니.

서일산은 굳은 표정으로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검선 어르신과 광휘 공은 후방으로 뺀다. 그리고 나와 친위대가 남아, 남은 몽마 군단을 최대한 정리한다. 목숨을 걸고.’

그는 자연스레 빨라진 발걸음으로 부관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막사로 가기도 전에,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커다란 덩치의 검은 머리 백인 무사와, 화사하다 못해 빛이 나는 듯한 녹색 머리 요정을.

“아르곤 경과 루나 양이 걱정이야. 왜 아직…….”

“살아 있어.”

“응? 어떻게…….”

“그냥, 느낄 수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서대륙어로 나누는 대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주고받는 둘의 모습을 보자마자, 서일산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광휘 공!?”

“아, 대장군. 마침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는 길이었슴다.”

“검선 어르신은요?”

“안에 계심다. 아직 더 회복이 필요하셔서요.”

그 말에 서일산의 눈이, 아니 기감이 빠르게 타이니의 전신을 훑었다.

검선‘은’ 회복이 더 필요하다는 말은 즉.

“허. 정말, 정말 다 나으셨습니까? 그렇게 처맞, 아니 부상을 당하신 것을 봤는데.”

그 말에 타이니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이 나왔다.

“사흘이나 지났으니까요. 무엇보다 선 제국의 군량은 나름 맛이 좋더군요. 덕분에 빨리 회복했습니다.”

군량의 맛이 좋은 것과 그 극심한 내상을 회복한 것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서일산은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장 제국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몽마 군단의 잔당들.

그것들을 처리할 가장 강력한 패 중 하나가 온전히 돌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작게 안도의 숨을 쉬는 그의 앞에서.

“얻었다는 권능의 조각이 뭐야?”

“조금만 기다려 봐. 직접 보여 줄게.”

에스티나의 물음에 답하는 타이니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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