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96화 (396/500)

396화. 권능?

“서방제일검, 그리고 검선……? 우리 군의 정예는 어떻게 된 겁니까!? 대장군님께서는!?”

“며칠 안에 도착할 걸세.”

선 제국 장수의 물음에 검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 더 이상 따져 물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백 년 전부터 천하제일 고수라 불려 온 검선의 말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선 제국 장수들을 닥치게 만든 검선이 창백한 얼굴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전투 전에 약속한 것이 있었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대로 나를 찾아오게. 해 줄 말이 많아.”

무리한 기색이 역력한 검선이 피로한 표정으로 건넨 말에 타이니의 눈이 빛났다.

해 줄 말. 신화경의 단서를 말함이라.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사흘?”

검선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평야의 일부를 대협곡으로 만들어 버린 말도 안 되는 일격을 날린 후에도 적들에게 수없이 타격을 입은 타이니였다.

입가에 남은 핏자국이나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약과였고 정말 심한 것은 내상이었으니, 그의 기감에 읽히는 타이니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너덜너덜’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회복한대도 과연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

“그런 상처를……?”

사흘 만에?

그 의문에 타이니는 자신감 어린 미소로 답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 진법이라는 것이 버텨 주기만 한다면, 몽마 군단의 악마급 정도는 제가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호언장담이 검선의 우려를 상당 부분 씻어 냈다.

“허, 그래. 그랬으면 좋겠군.”

그리 대답하면서도 검선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실제로 큰 상처가 없는 자신만 해도, 무리한 탓에 생긴 내상을 치유하는 데에는 적어도 일주일 이상 소요될 것 같았으니까.

그저 젊은 초인의 호기라고 본 것이다.

‘무슨 특별한 비전이 있다 한들, 아마 적어도 한 달은 자리보전해야 할 것이니.’

애초에 검선이 초조함을 느꼈던 건 그런 타이니의 전력 이탈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먹을 것만 충분히 주시면 됩니다.”

희미한 웃음과 함께 나온 그 말도 젊은이의 호기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야 얼마든지…… 흠, 흠. 가능하겠지, 장군?”

“아. 물,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충분한’ 식량의 양이 선 제국 본대의 화젯거리가 되는 데에는 고작 하루면 충분했다.

* * *

선 제국 본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 대륙 남부가 거대한 괴물들에게 초토화되고 있대!

- 동부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마물 곤충 떼가 요 나라의 대군을 몰살시켰다고…….

동대륙의 지배자들이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숨길 수가 없었던 소문들.

- 이거, 이러다 세상이 멸망하는 거 아냐?

말세가 다가왔다는 공포가 군대 내부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선 제국의 황제는 막대한 재화를 투자해야 하는 천문금쇄진의 형성을 기꺼이 승인했다.

중천제일검 서일산의 요청도 요청이지만, 어쨌든 일반 병사의 사기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었으니까.

덕분에 이런 환경이 만들어졌다.

“아무리 봐도 대단해.”

“인간이 일으킨 기적……!”

일반인이라면 평생 볼 일이 없을 대단위 진법에 의해 평야에 자욱한 안개와 구름이 생성되고 있는 모습.

그 신비로운 광경은 실제로 마물과의 전투를 앞둔 군대의 긴장감을 완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랬기에 갑자기 그 구름을 뚫고 나온 신선과 그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퍼지기 시작한 소문 중에는 설령 전투 직전이었대도 화제가 됐을 만한 것도 있었다.

“저 천막에 괴물이 산다고?”

“쉿. 서방제일검. 최고의 고수래. 말조심해!”

“……괴물은 맞네.”

“뭐, 그렇긴 한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루에 300인분씩 식량을 축내면 그게 사람이냐? 코끼리도 그렇게는 못 먹어.”

“그건 그렇지.”

“내가 봤는데, 접시를 들고 한꺼번에 입 안에 쏟아 넣더라.”

“뭐를?”

“뭐겠어? 음식이지!”

“……위장에 구멍이 뚫렸나.”

“그러고도 똥은 안 싼다더라. 저거 분명 사람 새끼가 아냐. 분명 괴물일…….”

“쉿!”

수군거리는 병사들의 목소리는 그 천막의 안에 있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들렸다.

하루에 300인분을 먹는 괴물, 서방제일검의 감각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지 오래였으니까.

“내가 좀 너무 먹긴 했지. 씁.”

“……응.”

쓴웃음과 함께 나온 타이니의 말을 에스티나는 부인하지 못했다.

타이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그녀에게도, 솔직히 지난 사흘간의 폭식은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니까.

다만 그 결과만큼은 훌륭했으니.

사지만 멀쩡하지 사실상 반시체나 다름없던 타이니의 몸이, 불과 사흘 만에 완치된 것이다.

검선에게 장담했던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회복되어 얼굴에 화색이 돌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타이니뿐만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깨달음의 수습은 잘 끝났나 보네? 얼굴 좋아 보인다.”

“어? 어!”

전시에 달성한 정령술 8단계, 스피릿액셀의 경지.

그 뜻하지 않은 성취를 영혼과 몸에 온전히 새기기 위한 명상을 이어 오다 보니, 회복이 느린 그녀의 마나가 타이니의 도움 없이도 이례적으로 빠르게 회복된 것이다.

다만 하나 불안한 것이 있다면.

“저 진법이라는 것은 상태가 괜찮은 걸까?”

에스티나는 사흘 전부터 점점 검게 오염되기 시작한 하늘 위의 구름을 떠올렸다.

자신들을 쫓아온 악마급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변화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아직은 더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다는 거야? 무슨 조치를 안 취하고?”

“글쎄, 내가 들어가서 놈들을 처리할 수 있으면 지금이라도 하겠는데, 그러려면 저 진법이라는 거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고 해서…….”

“안 된다는 거야?”

진법. 마법도 없는 동대륙 사람들이 선보인, 지형지물과 마나를 이용한 기묘한 환술.

‘결계와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확실히 달라.’

그것은 에스티나에게도 생소한 분야였다.

물론.

“아니, 나는 조금만 연구해 보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 이제 회복됐으니 자세히 살펴봐야지.”

애초에 머리를 쓰기보단 몸으로 때우는 것을 선호하고 심지어 그렇게 성과까지 만들어 온 서대륙 최강의 기사가 있기에, 그녀가 느끼는 불안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에.

“일단 검선, 그 영감님한테서 얻어 낼 건 얻어 내고.”

“그럼, 지금?”

“응.”

타이니보다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가까울 것이라는 검선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

“허!? 정말로 그 상처를 사흘 만에 치유했나?”

명상을 하던 검선이 타이니의 몸 상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렇슴, 습니다. 하, 씨. 진짜 잘 안 고쳐지네.”

본인의 말투를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타이니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였다.

누가 봐도 얼굴에 아직 창백한 기운이 남은 듯한 자신의 모습에 비해, 타이니는 확실히 멀쩡해져 있었다.

하지만 검선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네 일에 대한 소문을 듣기는 했네만…… 이거 믿을 수가 없군. 자네라면 정말 신화경에 오를 수도 있겠어. 그럼, 준비는 된 거겠지?”

“예? 아, 당연히…….”

“그럼 바로 하지.”

검선은 그러고는 정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깨달음을 전함에 있어 오해가 생겨선 안 되니, 영혼의 목소리로 직접 전하겠네.]

곁에 있던 에스티나까지 흠칫하게 만든 영파에 타이니가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자신의 깨달음을 아무런 대가 없이 전하겠다는 것도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텐데.

[말세의 시기일세. 준비가 된 자라면 누구든 들어도 상관없네. 요정 아가씨도 충분히 자격이 있구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검선은 정말로 그들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 태도가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만, 솔직히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타이니가 바로 영파로 묻자 검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런 자네가 있다면, 당장 진법을 풀어도 몽마 군단을 처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지. 병력의 피해가 생기긴 하겠지만 말이야.]

[당신이 도와주신다면, 진법 안에서 놈들을 처리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뭐? 하, 그건 또 그거대로 놀라운 말이군. 하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네.]

[그 말씀은……?]

[그 괴물, 오만(Hubris)은 달라. 그놈은 지금은 자네로도 무리야. 놈에게 당해 약해진 나는 더욱 도움이 안 될 테고.]

그리 말하는 검선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예?]

[놈과 충돌하던 그때, 난 깨달았네. 그 칠두룡을 쓰러트리려면, 그 괴물보다 확실히 강한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엇비슷한 여럿도 안 돼.]

[……무슨 의미입니까?]

섣불리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네. 그저 이해의 영역을 넘은 힘…… 그래, 권능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스스로의 격보다 낮은 상대를 상대할 때 훨씬 더 강해지는 권능 말이네.]

찌푸린 안색으로 이어진 검선의 말에는 타이니도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강해진다라…….]

‘저릭의 약자 멸시와 비슷한 특성인가?’

하지만 검선이 ‘권능’이라 칭할 정도니, 무게감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진짜 용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칠두룡은 육체의 힘만으로도 이미 측량이 안 되는 무력을 발휘하는 괴물이네. 그런데 약한 자를 상대할 때 더 강해지는 권능까지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절대로 그 방어를 뚫을 수 없을 거네. 공간의 권능을 온전히 터득하더라도 말이네.]

[공간의 권능이요? 영역하고는 다른 것입니까?]

[당연히 그렇지. 신화경에 오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신의 경지에 오른다는 뜻이네. 그렇다면 마땅히 그에 걸맞은 권능을 가져야 하지 않겠나? 뭐, 색욕과 오만만 봐도 그렇듯이 사람마다, 아니 신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말이야.]

[아……!]

검선은 여태 타이니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죄악의 힘을 얻은 칠죄종들이 특유의 권능을 쓰는 것을 그저 당연하다고만 여겨 왔으니.

오러마스터가 된 인간도 그와 비슷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검(劍)의 신(神)을 상상하고 바랐더랬지. 그래서인지 내가 신화경에 살짝 닿아 얻게 된 권능의 조각은 그와 비슷했네. 바로…….]

그 말을 하는 순간 검선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마치 이제는 얻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미련, 혹은 멀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듯했는데.

그 눈빛 속에서 나온 말은 타이니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 검에 닿는 모든 것을 잘라 내는, 공간참의 권능이었네.]

“허!? 정말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육성이, 그것도 서대륙 공용어가 튀어나왔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검선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권능은 어떤 의미에서는 빅뱅보다 더욱 강력한 필살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 제 말은…….”

그러다 실수를 깨달은 그가 자신의 말을 다시 동대륙어로 정정하려 하는데.

이미 그 표정만으로도 그의 뜻은 충분히 전달된 듯했다.

[그래. 내가 온전히 그 권능을 취했다면, 어쩌면 그 괴물과 제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실패했네.

“아……!”

[내가 얻은 권능의 조각은 그 괴물의 권능에 막혀 힘을 쓰지 못했네.]

[……‘제 기술’로도 안 될 것 같으십니까?]

타이니가 말하는 기술이 무엇인지는 검선도 알고 있었다.

지형 자체를 변화시키고 반신을 소멸시킨, 그 압도적인 파멸의 빛.

[모르지.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네.]

빅뱅으로도 오만의 권능을 뚫지 못할 수 있다.

검선의 그 말이 진심을 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타이니와 에스티나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검선의 얼굴에는 슬쩍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자네가 권능의 조각이라도 손에 넣는다면 확실히 통하겠지. 나로선 자네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자네가 얻을 수 있는 권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네. 그저 내 경험과 깨달음이 자네에게 그 너머로 가는 발판이 되길 바랄 뿐이야.]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때.

[그리고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카르마(Karma)를 다루는 방법일세. 아마 자네도 카르마를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것 같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네. 아니, 제발 그러길 바라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으니.]

“카르마(Karma)?”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타이니의 육성에, 검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보탰다.

“카르마? 그것이 서방어인 모양이군. 동대륙어로는 업(業)이라고 표현하네만.”

영파로 뜻을 전하고 있던 검선이 굳이 육성을 더한 것은, 타이니가 두 가지 단어의 의미를 다 되새기고 확실히 이해하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단어는 본질을 흐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니까.

물론.

[하지만, 제 동료 중 하나가 그것은 신이 아니면 다룰 수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당연히 따라오는 의문도 있었지만.

[자네는 내가 신으로 보이는가? 괴물한테 처맞고 영격까지 떨어진 내가?]

검선의 자조 어린 한마디가 그 의문을 날려 버렸다.

‘역시…… 크롬, 그놈은 참 쓸모 있으면서 없다니까.’

서대륙에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을 크롬벨을 속으로 한번 깎아내려 준 후에, 타이니는 다시 검선의 말에 집중했다.

[우선 카르마를 다룸에 있어 기본은…….]

검선의 말이 이어질수록 타이니의 눈이 점차 맑아지고, 에스티나의 눈빛이 반대로 무거워져 가는데.

그 대화는 그 후로도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 황실 친위대다!!!

- 대장군님이다!!

서일산을 비롯한 선 제국의 최정예들이 복귀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