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바보 같으니…….
‘저런…….’
파바바박.
에스티나는 정신없이 시위를 당기면서도 전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정확히는.
“끼루루루루!”
허공을 선회하며 러스트의 마법과 그 매혹의 권능이 미치는 범위를 피하고 있던 카일룸이 지상의 상황을 확인하고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안 그래도 아르곤의 장대한 삽질이 가져온 여파를 수습하는 것도 힘에 겨운데.
‘어떻게 하지?’
사실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무리를 하고 있었다.
- 흐아압!
쾅!
쩌저적.
갈색과 노을빛 오러, 그리고 검붉은 마기가 교차하는 허공의 전장.
본래부터 허공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타이니와 검선이, 아르곤의 마법에 당한 직후부터 러스트에게 지속적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
그 빈틈을 자신이 미친 듯이 쏘아 내는 오러 애로우로 겨우 메꾸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그때부터 버티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하필 지금 지상에도…….
‘이대로는 안 돼.’
반전이 필요했다. 밀리는 전황을 일시에 뒤집을 수 있는 한 방이.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이 쉬웠다면 애초에 이렇게 밀릴 일도 없다.
- 티나, 도와줘!
지끈.
“윽!”
잠시 잡생각을 떠올리던 그 순간, 선회하던 카일룸이 러스트의 ‘권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들어서고 말았다.
한순간 괴물의 몸이 타이니로 보이고, 놈을 공격하는 타이니와 검선이 괴물로 보였다.
다행이라면.
- 키루루루!!
그녀에게는 영혼의 반려, 카일룸이 있기에 그 자극을 분산하고 금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잠깐의 혼란만으로도 오러 애로우의 엄호 사격은 끊길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노을빛과 갈색의 오러는 검붉은 마기에 가일층 더 밀리고 말았다.
“칫!”
에스티나는 적의 권능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자마자 두통을 떨쳐내고 최대한의 출력으로 화살을 쏘아 냈다.
잠깐 틈을 보인 만큼,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파바바바박.
지이이이잉.
몇 줄기 레이저처럼 쏘아진 녹색 오러의 화살이, 타이니를 움켜쥐려던 러스트의 손들을 후려쳤다.
콰콰콰쾅!
- 나이스, 티나!
밀리는 와중에도 전의를 끌어 올리며 미친 듯이 날뛰는 타이니.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새삼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러스트를 중심으로 500m 정도 되는 범위에 슬쩍 걸치기만 해도 여지없이 정신에 혼란이 온다.
오러익시더에 스피릿유저인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매혹의 권능.
그런 적과 지근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는 타이니와 검선이 인간 같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 하!
한순간 갈색 번개로 화한 검선의 몸이 타이니를 몰아치는 러스트의 배후를 강타했고.
그에 놈이 움찔하는 순간.
- 우와아아아압!
순식간에 붉은 유성으로 변한 타이니의 몸이 그 전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그럼에도.
- 흥!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칠죄종, 색욕은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듯 다시금 그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거대한 두 쌍의 팔, 그 끝에서는 손톱 하나하나마다 근방 10여 미터를 휘감는 불길한 암흑 오러가 넘실거렸고.
세 쌍의 눈에서는 붉은 레이저가 불시에 튀어나왔다.
반면에 놈을 상대하는 타이니와 검선의 움직임은 조금씩 처지고 있었으니.
싸우는 것을 처음 본 검선은 둘째 치더라도, 타이니의 움직임은 확실히 이전만 못해 보였다.
허공이라는 익숙지 않은 환경, 끔찍한 권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직전에 받은 타격 등등, 불리한 요소들이 겹겹이 쌓인 탓에 점점 전세가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에스티나도 수많은 전장을 겪어 온 만큼 그 암담한 최후가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 흥! 네놈 죽일 때까지다!!!!
꽈아아아아앙!
인류 최강의 전사는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스스로 몸이 조금 느려지고 힘이 약해졌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텐데도, 그는 서슴없이 몸을 내던지고 전력을 다해 적에게 부딪쳤다.
에스티나로선 그 넘치는 투지가 꺾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마나가 고갈될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럴 순 없어…….’
이 고질적인 엘프의 체질은 전투 후의 회복에 불리할 뿐만 아니라, 전투 중 마나 수급에도 동일한 경지의 다른 이들보다 한참 부족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자신의 몸속 기운이 텅 비어 가는 것을 느낄수록 에스티나의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 집중!
콰아아앙!
문득 내려다보니, 지상의 병력도 조금씩 수세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선 제국의 정예들은 이미 해 줄 만큼 해 줬다.
인간도 아니고 마물로 구성된 1만의 군세를 상대로 500여 명의 기마가 뛰어들어 저 정도의 분전을 하고 있는데.
‘악마급들을 묶어 두고 있는 것만 해도 최선이야.’
그 이상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초전에서 아군조차 생각지 못한 술수를 쓰고 나가떨어져 버린 루나와 아르곤, 그중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방해물이 된 아르곤은 이미 전장을 빠져나간 듯싶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해.’
전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머리를 굴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파바바박.
콰콰쾅!
이대로는 결국 서서히 말라 죽을 뿐이다.
에스티나의 시선이 점차 무거워지던 순간.
지상에서부터 변수가 생겼다.
- [email protected]$!!!
동대륙어로 뭐라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는 일단의 군대가 평야의 서쪽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녀로선 읽지도 못할 동대륙어가 쓰인 노란색 깃발을 휘날리는, 거의 3천은 되어 보이는 기마대.
꽤 강력한 이들로만 구성된 것인지, 그들이 돌격하는 순간 뿜어내는 군기(軍氣)만으로도 그 일대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아마도 선 제국의 서쪽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이 강림 포인트를 같이 대비하기로 했던 ‘동진’이라는 나라의 군대 같았다.
하지만.
“미친……!”
그들의 움직임을 본 에스티나의 입에서는 어울리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선 제국의 정예들이 왜 그 많은 병력들을 두고 500여 기의 기마만으로 출진했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돌진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 하……!?
정신없이 타이니와 검선을 몰아붙이던 러스트가 그 일단의 무리에게 잠시나마 시선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 제법 쓸만한 것들이군. 역겨운 신들의 힘도 없고.
놈이 꿀꺽 군침을 삼키는 듯한 느낌이 영파로 전해져 온 순간.
- 너희들을 거두는 것은 조금 미루도록 하지.
러스트의 거체가 허공에서 지상으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검붉은 유성이 된 듯 일직선으로 낙하하는 칠죄종. 그 끝에는 이미 돌진을 시작한 동진의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칠죄종이 보인 그 ‘여유’는 타이니 일행에게 기회가 되었다.
“티나!!”
“알았어!!”
감히 타이니에게 힘을 모을 시간을 주다니.
아마도 지금까지 몇 가지 상황이 겹치며 승기를 잡아 가던 것이 러스트를 방심하게 만든 듯했다.
아니, 애초에 뚜렷한 전력 차를 확인한 마당이니 놈의 입장에서는 적에게 일발 역전의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때 에스티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우우우웅.
“윽!?”
타이니의 외침은 마충 군단의 강림 당시 적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천지개벽’을 쓰자는 신호였을 터인데.
그녀에겐 이미 정령 합신을 시도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엘프족 특유의 마나 수급력 문제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타이니가 그녀의 상태를 바로 눈치챈 듯하다는 것.
“[email protected]#!#!?”
그러자 검선이 동대륙어로 무언가를 말했지만, 타이니는 대꾸하지 않고 홀로 정령 합신을 사용한 상태로 러스트를 향해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녹턴에 다시금 크게 맺히기 시작한 익숙한 노을빛.
그것이 무엇인지는 에스티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빅뱅…….’
점차 가속하는 타이니의 질주는 분명 엄청나게 빨랐지만, 러스트의 움직임에 비해선 몇 박자나 늦은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러스트가 동진의 군대를 모두 현혹한 다음에나 그가 도착할 것 같았다.
불과 몇 초의 차이였지만, 그 찰나의 간극은 충분히 그만한 대가를 가져올 만했다.
그나마 빅뱅을 러스트가 정면에서 맞서 준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맞서지 않고 피한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에스티나는 그것이 모두 자신의 잘못 같았다.
‘내가 부족해서…….’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학하려는 순간.
[요정 아가씨, 무언가 하려 했지? 내가 도와주겠소.]
어느샌가 곁에 다가온 검선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갑옷 어깨 부분에 손을 얹었다.
말이 아닌 영파로 전하는 뜻.
타이니가 아닌 다른 인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도 했지만, 그 영파의 의미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그에 에스티나가 어리둥절해하는데.
우우웅.
갑옷의 어깨 부분을 통해 순수하고 맑은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는순간, 그녀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나로선 지금 저 녀석의 근처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지는데, 아가씨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소? 그것을 하시오.]
그야말로 순수하다고 느껴지는 대지의 마나.
그 힘은 삽시간에 그녀의 마나를 회복시켰는데, 타이니가 비슷한 술수를 썼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아무리 대지 속성의 마나가 그녀의 식물 속성 마나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라 해도, 이것은 상식 외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지고 들 때가 아니었다.
“감사……!”
우드득.
일순간 카일룸의 몸이 사라지더니, 그녀의 몸이 살짝 부풀어 오르며 등 뒤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허!?”
부릅떠진 눈으로 놀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검선을 뒤로 한 채, 에스티나는 초월무구 아르쿠스에 전력을 끌어모았다.
타이니와 함께 합동 스킬을 사용하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쓸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니까.
‘천벌!’
우우우웅.
부르르르르.
여느 때보다 강력한 기운이 활에 집중되며, 눈부시고 찬란한 녹색의 섬광이 시위에 맺혔다.
최상의 컨디션일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느껴지는 힘.
하지만 이것으로 칠죄종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에스티나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발동해야 하는 천벌에 변화까지 주고자 했다.
‘어차피 놈을 죽이지는 못해. 그러니……’
최고의 힘을 집중시키면서도 이상하게 정신적으로 여유가 남는 듯한 기분이 그 도박을 실행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끼루루루루!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녀의 파트너가 호응했다.
우우우웅.
그러자 영혼이 끓어오르는 듯한 고양감과 함께, 한순간 스스로의 세상이 크게 확대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윽고 이미 정령 합신 상태로 날개를 단 그녀의 발밑에, 또다시 카일룸의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끼루루루!
돕겠다는 뜻이었다.
오랜 세월 세계수의 수호자들이 대대로 이어 받아 오며 그 힘을 성장시켜 온 정령, 카일룸.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세계수의 수호자들이 너무 강해진 정령을 감당하지 못했던 탓에, 정령술의 성장이 스피릿유저에서 멈춰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정령이, 수백 년 만에 온전히 자신의 격에 맞게 성장한 파트너의 영혼을 축복했다.
정령술 8단계, 스피릿액셀.
‘가자!’
카일룸, 급가속.
들끓는 듯한 고양감 속에서 에스티나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거대한 독수리의 정령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고.
한순간 공간을 접듯 이동한 카일룸의 속도가 극에 달한 순간, 에스티나는 애병 아르쿠스에 모인 최대한의 힘을 고스란히 풀어냈다.
에스티나식 궁술 비의, 천벌.
변형, 하늘의 그물.
녹색의 섬광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빛을 발하며, 목표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