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색욕, 러스트
“……괜찮을까?”
질주하는 기마대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에스티나의 눈빛에는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타이니 역시 무거운 한숨을 지었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모두가 동의했잖아. 이 결전에서 색욕을 죽이고, 몽마 군단의 장군들이나 최정예들도 최대한 몰살해야 해. 그리고 칠죄종을 유인하고 끝장내는 건…….”
“우리와 검선이지. 그래, 알아.”
에스티나의 대답에 다시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니.
그러자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진다고 여긴 것일까.
“내가 타이니보다 좋은 생각을 못 떠올리다니. 내가 저 녀석하고 같은 급이라니…….”
아르곤이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그의 속을 살살 긁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확실해서, 줄곧 가라앉아 있던 타이니의 기세가 그 순간 거세게 타올랐다.
우드득.
“전투에 앞서 준비 운동을 좀 격렬히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농담이야, 농담! 전투 직전에, 더구나 여긴 하늘 위인데!? 야……!”
카일룸의 너른 등판 위에서 때에 어울리지 않는 술래잡기가 시작되려던 찰나.
갑자기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루나가 타이니의 앞을 막아섰다.
“마법쟁이, 현혹 방비에 큰 도움 될 거야. 힘 빼게 하지 마.”
“음?”
그에 장난삼아 아르곤의 기강을 잡으려던 타이니의 눈이 커졌다.
루나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것 자체가 처음인 듯했으니까.
더구나.
“지금, 나 편들어 준 거야?”
“마법이, 필요하니까.”
“그래도 기왕이면 이름 불러 주지. 자꾸 마법쟁이는 좀…….”
“시끄러.”
아르곤이 그녀와 티격태격하는 모양새가 왜인지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다.
“제대로 못 하면 죽여야지.”
“……야, 나 지금 굉장히 무서운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어, 잘못 들은 거야.”
“아닌데!? 분명히 죽인다고…….”
그 사소한 실랑이가 일행의 분위기를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그런데, 크롬은 마충 군단을 최우선 박멸 대상으로 설명했으면서 왜 몽마 군단에 대한 경고는 안 했을까? 솔직히 그것들이 더 위험해 보이는데? 고대랑 군단이 달라진 걸까?”
“우리 대륙에는 현혹에 대항할 방법이 많으니까. 특히 고대에는 더 흔했을 거고. 결국 상대적인 거겠지.”
“마충 군단……. 그것들도 정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일단 여기 집중해, 타이니. 우리 몸은 하나야.”
문득 떠올린 타이니의 의문에 에스티나가 답을 해 주고 있던 찰나.
“보인다!!”
아르곤의 목소리가 다시 일행의 시선을 지상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눈에 보인 광경은 무시무시했다.
“어? 허, 그새 꽤 늘었네. 젠장…….”
타이니가 이를 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준비하자, 아르곤.”
“응.”
그의 말에 대답하는 아르곤의 목소리에도 어느덧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 * *
두두두두두.
질주하는 기마대의 선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평선을 가득 메운 맹수 떼였다.
“보인다.”
서방제일검이 부리는 신조를 타고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많아진 수에 서일산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게다가 그 맹수 떼 사이사이에는, 촌민으로 추정되는 인간들의 모습도 제법 보였으니.
생물을 현혹한다는 마물의 군단. 그 위험성이 다시 한번 피부에 와닿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서일산은 무슨 빛이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품 안의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았다.
- 진정한 주를 경배하라!!
이 물건 덕분인지, 다른 생물들의 눈동자를 풀려 버리게 만드는 목소리가 자신들에겐 그저 헛소리로만 들리고 있으니.
그는 부대에 신호를 보낸 후, 다시 옆을 돌아보았다.
“어르신, 부탁합니다.”
“맡겨 두게.”
두 발로 달리면서도 기마대와 동일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던 검선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순간.
- 으와아아아압!
하늘 위, 그들을 앞질러 가던 거대한 신조의 위에서 엄청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광휘 공?’
다소 뜬금없는 기합에 서일산이 당황하던 그때.
적들의 진영에, 광범위하게 노을빛 서광이 내려앉았다.
- 컹!
그러자 기마대가 마주하던 맹수 떼 가운데 개와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일순간 눈빛에 생기를 되찾더니, 무리를 이탈하거나 주변의 마물이나 맹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으아!?
- 뭐, 뭐여!?
그와 동시에, 현혹되어 있던 인간들 역시 제정신을 차린 듯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
노을빛 기(氣)는 광휘 공, 서방제일검의 특징.
급변하기 시작한 전세에 서일산이 영문을 몰라하던 순간.
“이거, 이런 재주도 있었군. 진짜 대단한 젊은이야.”
검선이 웃으며 그가 제대로 느끼지 못한 서광의 힘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
거기에 더해.
[靈魂覺性(영혼각성)]
뒤이어 적들의 진영 한가운데에 거대한 문자가 나타나더니, 푸른 서광이 다시금 그들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자.
- 컹!
- 캬오오오오!
- 크르르르르.
기마대를 일차적으로 가로막고 있던 맹수 떼의 중심부가 대번에 혼란에 빠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 위에서 녹색의 강기가 실린 화살들이 쏟아져 내리며, 마물들의 군단 중 약한 것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콰콰콰쾅.
“이번에는 그 요술쟁이와 요정 소저인가? 참으로 신기한 재주로다.”
검선의 감탄을 들으며 서일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녹색의 화살이야 누구 것인지 뻔했지만, 황궁에 침입했던 그 요상한 주술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제야 명확해졌으니까.
‘서방인이 우리 문자로 요술을 쓴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일시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빨리!!]
그것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광휘 공의 혜광심어 때문이기도 했고.
연거푸 이어진 두 술수가 맹수 떼를 일시적으로 흩어 버렸음에도 그 뒤로 보이는 광경이 워낙 무시무시했던 탓이기도 했다.
각각 인간형이나 맹수형, 혹은 영체 같은 모습으로 검고 붉은 피부를 자랑하는 괴물들.
생김새가 결코 인간 같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놈들에게서는 저마다 뚜렷한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중심에 있는 체고만 거의 5m에 이르는 인간형 마족.
- 감히!!
하늘 위에서 쏟아진 두 술수의 주인들을 향해 검붉은 마기의 파도를 쏟아 내는 압도적인 괴물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땅 위에서 하늘 위로 검은 강이 흘러가는 듯한 엄청난 마기.
그 규모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신화경…….’
저건 숫자로 어쩔 수가 없다.
서일산이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끼던 그때.
“그래도, 그 휴브리스라는 괴물보다는 할 만해 보이는군.”
옆에서 너스레를 떠는 검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가네.”
파바방.
곧이어 검선의 몸이 일순간 가속하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본 후에야, 서일산은 스스로 위축되어 있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차리고 기감을 끌어 올렸다.
- 악마급, 그러니까 혼세경에 이른 괴물이 21개체가 있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7마리는 특출난 놈일 거고요.
- 그놈들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초인경의 마물들은 그다음입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기세의 주인들.
- 하찮은 인간들이!
국부와 가슴만을 간신히 가린 복장의, 보랏빛 머리 검은 피부의 여자를 필두로.
- 크르르릉. 원숭이 따위들에게는 관심 없다.
송곳니를 턱밑으로 길게 늘어트린 채 복부에 세 쌍의 거대한 젖가슴을 드러낸 체고 3m의 거대한 야수.
박쥐 날개를 활짝 편 3m가 넘는 근육질 남성형 마족과, 그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홀쭉해 보이는 여성형 마족.
하늘하늘한 여성형 영체에서 무시무시한 마기를 뿌리는 유령과, 서대륙의 정장 같은 복장을 입은 창백한 인상의 남자,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여성까지.
저 멀리 보이는 괴물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일곱의 마족이, 서일산의 기감에 포착되었다.
‘저것들을 우리가 끝장내야 한다.’
목표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휘하 병력들에게 신호를 전달했다.
“하찮은 것들은 단숨에 뚫어 낸다!”
“하!”
“동대륙의 무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이방인들과 괴물들에게 보여 주자!”
“하!”
뒤를 따르는 정예들의 든든한 기합을 배경 삼아, 서일산은 투지와 함께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기세를 자신의 직속 친위대들의 기파에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서대륙에서 기사단 스킬, 혹은 단체 스킬이라 일컬어지는 기술의 원형.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선 제국의 ‘진법(陳法)’을 보여 줄 때였다.
선 제국 황실 친위대 전용 진법, 가루라(迦樓羅) 발동.
우우우웅.
서일산의 몸에서 피어오른 기세가 황금빛 새의 부리로 변하고.
그 뒤를 따르는 500여 명의 기마대의 좌우로 황금빛 날개가 솟구쳐 올랐다.
이내 나머지 3대 고수인 양일원과 장천일의 무기가 새의 부리에 힘을 더한 순간, 두 갈래로 나뉜 전열에 각각 열 명씩 끼어 있던 초인경의 고수들이 강기를 모아 거대한 황금빛 새의 발톱 한 쌍을 만들어 냈다.
- 하!!
가루라, 용 사냥.
무사들의 기합과 함께 솟구친 부리와 발톱. 거대한 황금빛 새가 몽마 군단의 일각과 그대로 충돌했다.
- 꽈아아아아앙!
* * *
- 감히 버텨!?
살기 가득한 영파와 함께 하늘을 뒤덮는 마기의 흐름이 더욱 거세졌다.
콰콰콰콰콰콰.
쾅.
그러자 녹턴을 이용해 발동한 블랙홀의 힘이 그 거대한 마기의 흐름을 버티기 힘들어졌다.
“한성질 하는데, 저거?”
“칠죄종이 순할 줄 알았냐!”
“뭐 인마!?”
“어르신, 어르신이다!”
타이니가 노려보는 순간, 아르곤이 황급히 시선을 지상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생각보다 조금 늦게 색욕에게 도착한 검선의 검이 갈색 섬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번쩍.
그 순간 갈라지는 마기.
“영감님, 나이스! 티나! 엄호를!”
“맡겨 둬!”
“아우우우우!”
그러자 재빨리 월랑을 소환한 타이니가 그 틈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르곤, 우리, 그거!”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루나의 목소리에 아르곤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
“그래!”
“잘못하면 너 죽…….”
“닥치고 시작해!”
“……응.”
아르곤은 울상을 짓다가도, 그 움직임을 강제로 몸에 배게 했던 지독한 훈련을 떠올리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기아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리고.
[加速(가속)], [保護(보호)], [强體(강체)], [防禦(방어)], [防壁(방벽)], [克己(극기)], [集中(집중)]
그는 스스로에게 7중의 호신을 위한 주문을 걸었다.
“간다!”
그렇게 애써 공포심을 떨친 아르곤이, 이내 자신의 몸에 한 가지 주문을 더했다.
단순한 마나가 아닌 오러로 구현해야 하는 마법.
그것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격을 날리는 누군가의 기술을 본뜬 것이었다.
사실 아르곤은 그의 최종기를 흉내 내고 싶었지만, 결국 그다음으로 강력한 비기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그가 구현해 낸 것은, 바로 광휘의 기사가 아닌 괴력의 기사의 필살기.
“메테오 스트라이크(Meteor Strike)!!”
유성 떨구기.
찬란한 붉은빛이 원본의 몇 배나 되는 규모로 아르곤의 전신을 시뻘겋게 달구기 시작할 때.
“간다.”
루나가 그런 그의 그 몸을 붙잡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파지직.
그 직후, 색욕의 등 뒤에 드리워 있던 그림자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거대한 붉은빛 유성이 튀어나왔다.
꽈아아아아아앙!
“캭!?”
허공에서 내달려 오는 심상치 않은 기세의 늑대와 기수, 그리고 지상에서 자신의 피부를 가르는 엄청난 검격을 날려 대는 인간에게 신경을 쏟던 색욕이, 그 순간 붉은빛 오러에 휩싸여 하늘 위로 튕겨 나갔다.
우르르르릉.
놈이 딛고 있던 지면이 뒤늦게 통째로 내려앉는 것만 봐도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칠죄종이 드디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놈이 아군의 가장 강력한 초인 앞으로 날려 가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이스!”
확 가까워진 적을 마주한 타이니의 녹턴에 노을빛 서광이 내려앉기 시작할 때.
놈의 한 머리에 가로로 달려 있는 세 쌍의 눈이 일제히 호선으로 휘어지고, 머리카락처럼 늘어져 있던 뱀들의 눈이 동시에 붉은빛을 발했다.
- 제법이다, 인간들.
- 기회를 주겠다.
- 이 러스트(Lust) 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그 순간 칠죄종 색욕, 러스트의 거체에서 연분홍빛 광채가 쏟아져 나왔고.
그 정면에서 놈에게 쇄도하던 타이니가 갑자기 허공에서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