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눈앞의 목표부터
“흐…….”
창백한 안색의 검선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타이니의 얼굴을 보고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고…….”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럴 기력이 없는 듯한 느낌.
그에 타이니가 먼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영감님. 쉬세요.”
“할…….”
“할 말은 푹 자고 나서 하시죠.”
지금 검선이 입은 타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에, 타이니는 억지로 그의 육체를 조율하여 다시 잠들게 만들었다.
“어르신은 괜찮아진 거야?”
“어, 그래.”
“하,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는 아르곤을 보고 있자니 살짝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검선에게 꽤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니까.
생명의 은인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유대감까지 느끼는 것 같달까.
“이 영감님이 그렇게 걱정되냐?”
“마법쟁이, 정이 많아.”
“아냐! 그냥…… 이분, 돌아가신 솔레인 님이랑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
울적해진 아르곤의 표정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젠 괜찮을 거야.”
영격이 좀 떨어졌을 거고, 무력도 1할 이상은 감소했겠지만.
그는 그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실제로 검선은 휴브리스의 영력 저주에 걸린 것치고는 선방을 한 셈이었다.
만약 루나나 아르곤이 휴브리스의 저주에 걸렸다면, 단순히 약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죽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뭐,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저주도 제한이 있는 거겠지만.’
8단계의 초인을 단숨에 격살할 수 있는 저주가 그리 쉬울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아니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인식한 녹턴의 힘도 더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우웅.
타이니는 손끝에서 잠시 피어오르다 사라진 무형의 에너지를 느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원래 있었던 힘을 인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터였다.
일단 녹턴이 신성을 먹어 치우고 그 힘의 일부를 자신에게 전달하는 거라면, 칠죄종을 쓰러트릴 때마다 자신의 무력이 상승할 테니까.
하지만.
우웅.
‘이 검은 안 돼.’
타이니는 녹턴의 울림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검선을 압도한 휴브리스도 대단하지만, 대단위 현혹 마법을 쓰는 색욕도 충분히 까다로운 상대다.
놈을 상대하려면, 그 권능을 상쇄할 수 있는 성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티나, 일단 다시 왕궁에 가 보자. 왕족들이 혹시 성물을 두고 갔는지 확인해 봐야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타이니가 다시 돌아보자, 쓰러진 검선을 내려다보던 에스티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보였다.
“티나?”
“어, 어!”
한 박자 늦은 대답.
‘하긴, 에스티나라면…….’
검선의 상태를 알아봤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짐작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타이니, 혹시 이 사람 영혼이…….”
그녀가 조심스레 꺼낸 그 말은 그 순간 끼어든 다른 목소리에 묻혔다.
“다른 성물이 또 있어?”
“그런데, 왜 이제 와 찾음?”
“얘기하자면 길……지만, 해야지. 하아…….”
오만, 휴브리스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색욕의 몽마 군단이 나타난 대륙 서부. 그곳 상황에 대해 두 사람에게 설명을 마친 직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이 대륙, 이 정도면 이미 망한 거 같은데? 하.”
“우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망연한 표정의 아르곤과 루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는 바로 다시 눈앞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아직 일러. 일단 유물부터 찾자.”
그는 아직 완전히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루나에게 검선을 맡겨 놓은 채, 아르곤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물론.
“내, 내가 더 많이 다쳤는데……!”
“시끄러워. 신성력 반응부터 찾아!”
“야이씨…….”
탐지기(?)의 반항은 가볍게 묵살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 데도 없어.”
하늘 위로 올라 왕궁 전역을 뒤져 보던 두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역시, 들고 도망간 거야.”
“백성들은 내버려 두고, 보물만 가지고 튀었단 말이지?”
타이니의 그 말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일전에 재앙을 경고하기 위해 잠깐 들렀던 호 나라의 왕과 그 신하들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하락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적권마의 유물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성물 하나가 반경 500m, 직경 1km를 커버한다 치면, 그 성물 하나로 200~300명 단위의 기사단 하나를 적의 권능에서 보호할 수 있는 셈.
그러니.
‘하나와 두 개는 차이가 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마도 북쪽으로 튀었겠지. 가자.”
“새끼들이, 지배자가 백성을 버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다쳤다고 징징대던 아르곤 역시 도시의 참상을 내려다본 이후로는 표정이 확 바뀐 채 마력을 끌어 올렸다.
타이니의 감각권이 아무리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한들, 8서클의 대마법사가 작정하고 펼치는 탐색 마법에는 댈 것 아니었다.
그리고 이내.
“찾았다. 북동쪽, 요 나라 방향으로 5km 정도. 썩을 놈들, 멀리 가지도 못했네.”
아르곤이 성물의 흔적을 찾아냈다.
* * *
한눈에 봐도 화려한 마차와 그 주변을 에워싼 수백의 무사, 그리고 그 뒤를 줄을 짓고 따르는 짐마차들까지.
언뜻 보이는 인원수만 해도 천은 되어 보이는 긴 행렬의 중심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속도가 이 모양이냐! 더, 더, 더 빨리 움직여!”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민 살찐 왕이 호통을 치자,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한 무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그들의 불충한 시선이 한곳으로 몰리자.
“전하, 이러다가는 말들이 다 쓰러집니다!”
안색을 굳힌 왕궁 수비대장 한여울이 마차로 다가와 왕에게 현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장군이 감당하지 못하는 괴물이 쳐들어왔다 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자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 아니오라…….”
“시끄럽다! 속도를 내라면 내!”
왕에게 조심스레 간언하던 한여울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어찌…….’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울화가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신이 존경하던 상관, 호 나라의 대장군이자 대륙 10대 고수의 일인이었던 비천유성창(飛天流星槍) 관여립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 제가 시간을 벌어 보겠습니다, 전하. 부디,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압도적인 괴물을 상대로 일반 병사들을 내세워 봤자 희생만 커질 뿐이라며 홀로 나서던 대장군.
그런 그가 떠난 뒤에, 저 왕이라는 작자의 행태는 어떠했는가.
왕궁의 보물 중 가장 귀한 것을 모두 끌어모으기 바빴으며, 제 혈손들을 태울 마차와 가마, 피난의 와중에도 고급 요리를 해 먹을 재료까지 챙기느라 시간을 끌었다.
그래 놓고, 뭐?
‘차라리 싸웠어야 했다. 대장군과 함께라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백성들을 지켰어야 했다.
그 후회와 분노에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으로 손이 향하는데.
- 전하를 부탁한다, 여울.
상관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이 다시 뇌리에 떠오르며 한 번 더 참을성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가 갈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 급하시다면 보물들을 버리시지요, 전하.”
“뭐? 길바닥에 보물들을 버리자고? 네놈이 제정신이……!”
“쓸데없는 금은보화를 버리면, 말들이 지금보다 2배는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가 살찐 왕의 목을 확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왕은 자신의 추태를 자각했다.
‘이, 이놈이, 감히?!’
바로 호통을 치려 했지만,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여울의 기세가 마음에 걸렸다.
호국제일검이라는 별호를 가진 왕실 수호대의 대장, 한여울은 죽은 관여립을 제외하면 나라의 최고수였으니.
지금 이 피난 행렬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한여울이었다.
왕실의 서자인 데다 삼남이기까지 했던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살아남게 만들어 주었던 눈치가 수십 년 만에 제대로 작동을 하는 순간, 왕은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기에.
“크흠. 그렇다면 보물을 조금 덜어 내서 속도를 올리도록 하라.”
그렇게 애매하게 명령을 수정하는 것만이 왕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한여울이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보물들을 ‘전부’ 버리랍신다!”
“예!”
“이, 이놈이 내가 언제……!”
“예? 분명 보물을 버리고 속도를 올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진심은 한여울의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 앞에서는 쑥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털썩.
우르릉.
“다 쏟아!”
“피난이 더 급하다!”
놈의 지시에 따라 길바닥에 버려지는 보물을 보고 있지나 속이 쓰려 왔다.
‘이놈 두고 보자. 요 나라에 도착하기만 하면…….’
비록 난데없는 재앙에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신세지만, 어머니의 사촌의 아들이 왕이 된 요 나라라면 자신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저 한여울을 치도곤 내겠다.
왕은 속으로 그리 다짐했다.
하지만.
“그, 그건 안 돼!”
호위 무사 중 한 명이 왼쪽만 남은 권갑(拳甲) 한 짝을 버리려는 걸 본 순간에는, 한마디를 보탤 수밖에 없었다.
“요 나라 왕에게 줄 예물이란 말이다! 무적권마의 유물!!”
동대륙에서는 거의 쓰는 이가 없는 무겁고 낡은 권갑이었지만, 호위 무사는 왕의 그 말에 움찔하며 자신이 버리려던 물건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게 줘! 내가 직접 들고 가겠다!”
왕의 체면에 쉽게 나오기 힘든 말이었지만, 급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을 쫓는다는 전설이 헛소문이라는 게 확인된 뒤로 실질적인 가치는 거의 없어졌지만, 역사적 의의가 있는 물건이다.
요 나라의 왕이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하니, 무적권마의 권갑은 가장 훌륭한 예물이 될 것이다.
왕의 호통에 무사가 한여울을 바라보았고.
그가 고갯짓으로 지시를 내리자 마지못한 표정으로 왕에게 다가갔다.
“여기…….”
물건을 두 손으로 올리는 예를 취하기는 했지만, 말이 너무 짧았다.
이름 모를 무사의 그 태도가 왕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다.
‘하찮은 무사 놈까지…….’
그러나 지금은 그저 분노를 담아 둘 수밖에 없으니.
“흥!”
왕은 콧방귀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챙긴 채 권갑을 받아 들고 그대로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때.
- 끼에에에에에!
상공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새의 울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우렁찬 소리.
우당탕.
“속도! 속도를 올려라! 괴물이 쫓아온다!”
화들짝 놀란 왕이 다시금 마차의 창문을 열고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
한여울을 비롯한 무사들은 오히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조다!”
“서방제일검이다!”
“남쪽에서 왔어!”
“그럼……!”
그에 왕의 시선이 자연히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확인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동대륙의 모든 왕실에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이방인과, 그가 타고 다니는 신조의 존재를.
그리고 그 신조는, 호 나라 왕실의 피난 행렬을 향해 맹렬히 내리꽂히고 있었다.
“여기다! 여기다! 작은 경!”
‘Sir, Tiny……. 우리 말로 ‘작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라는 뜻입니다.’라는 통역사의 말을 기억하고 그대로 직역한 왕이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꽈앙.
히이이잉!
“흐악!?”
마차의 지붕을 박살 내고 들어온 덩치 큰 검은 머리 이방인이, 바닥에 널브러진 왕을 내려다봤다.
“뭐, 작은? 뭐라는 거냐, 돼지 같은 놈이.”
서늘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
난데없는 횡액에 놀란 왕의 목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