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신화경의 유물
선 제국의 수도, 중천.
“호 나라가 며칠 만에 멸망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요 나라에 나타난 무수한 괴물 곤충 떼가 평야를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서부 구릉 지대에서 황도를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해 오는 마물들의 군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생물을 홀리는 사술(邪術)을 쓰는 것으로…….”
연이어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에 안 그래도 창백하던 황제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변해 갔다.
그리고 그때.
- 예법을 지키셔야……!
- 비켜라!
쾅!!
대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문이 박살 날 듯 거칠게 열리며 낯선 옷차림의 검은 머리 이방인과 녹색 머리 요정이 뛰어 들어왔다.
“이 나라의 법도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무관들이 파리한 안색으로 소리를 지르는데.
“광휘 공?”
황제의 놀란 목소리와 더불어 좌중의 시선이 두 이방인에게 집중되었다.
“무사들은 물러서라!”
이내 피곤에 찌든 얼굴의 황제가 손짓만으로 무관들을 물리는 순간.
쿵.
“마족들을 막기 위해 창천, 뭐시기…… 젠장, 뭐였지? 아무튼 그 신화경에 올랐다던 무인의 유물 반출을 요청드립니다, 폐하!”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간략히 예를 표한 타이니가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동대륙의 황제를 배알함에도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부 신하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창천……. 창천검제의 유물을 말함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곳으로 진군해 오는 몽마 군단을 막기 위해,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타이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요구를 이어 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들, 유물의 효과를 모르는 이에겐 설득력이 없는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 더 설명해야 할지 몰라 타이니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순간.
“좋다.”
“성물과 같은 효과……. 예?”
“이제 와 유물쯤이야 내어 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황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허락했다.
그에 타이니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동안.
대전에 모인 신하들 사이에서 반발이 튀어나왔다.
“폐하! 창천검제의 유물은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옵니다. 함부로 이방인에게 주시는 것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발언을 한 당사자를 확인한 타이니의 얼굴이 구겨졌다.
‘또 저거…….’
황태자.
한시가 급한 마당에 선 제국의 장수들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켰던 암 덩어리.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살기가 솟구쳤다.
“닥쳐……!”
면상을 그대로 박살 내 버리고 싶은 마음에 튀어나온 고함.
“……줬으면 좋겠슴다, 태자 전하.”
그 말을 수습하기 위해 황급히 뒷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이미 대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자 타이니의 살기를 정면에서 받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황태자, 이상연.
“가, 감히 오랑캐 따위가……!”
이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닥쳐라! 태자!!!”
그의 고함은 이 대전에서 그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황제의 목소리에 바로 묻혔다.
“아, 아바마마?”
태자의 얼굴이 다시금 창백해지는데.
“네놈은 세상의 위난을 앞에 두고도 알량한 권위를 운운하느냐!? 대체 생각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이어지는 황제의 호통에 그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쏟아지는 비난 섞인 시선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시선의 주인 중 반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는데.
‘빌어먹을 철새들 같으니.’
불과 며칠 사이 천지가 뒤집히며 자신의 입지 역시 위태로워졌다는 것이 분위기만으로도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아버지의 혹평과 힐난 속에서도 자신이 맏이라는 명분으로 귀족들을 규합하여 겨우 움켜쥐었던 태자의 지위마저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막냇동생에게 제위를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내가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이 망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위기의 때일수록 군주의 위엄을 보여 줘야 한다.
그 생각이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법도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실의 예조차 무시하는 이방인의 요청에 폐하께서 쉽게 휘둘리신다면,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마저 더욱 불안에 떨게 될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임기응변으로 내뱉은 소리였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듯했다.
그랬기에 넙죽 엎드린 그의 얼굴에는 아무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는데.
황제가 그에 답변을 하기도 전에.
“참, 태자 전하. 우리 내기를 하지 않았슴까?”
이방인이 어눌한 말투로 내뱉은 말이 먼저 그의 귓가에 울렸다.
‘내기? 무슨 내기? 내가 언제?’
황당했지만 직전에 본인 입으로 예법을 운운해 놓고 경망스럽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태자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이방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 말이 사실이라면 목숨을 걸겠다고 하지 않았슴까?”
움찔.
태자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레 도리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호통을 질렀다.
“감히! 이방인이 대선 제국의 태자인 나를 겁박하는가!”
제국의 권위를 빌려 이방인의 입을 닫아 버리려 한 것이다.
한 번의 ‘말실수’ 때문에 곤란한 처지가 되었지만, 고작 그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운운하는 이방인의 수작은 가소롭기만 했다.
그리고.
“광휘 공, 태자의 실언을 탓할 때가 아닌 듯하네.”
예상대로 아바마마, 황제 역시 이방인을 만류하려 했다.
그런데.
“묻어 두실 일이 아닌 듯함다, 폐하. 출진한 장수들에게 진군을 늦추라는 밀명까지 내린 태자임다.”
이어진 그 말에, 태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폐하! 보십시오! 저 이방인이 이 위난의 때에 제국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당혹감에 달아오른 얼굴을 분노로 포장하기 위해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 봤지만, 안타깝게도 호응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에 반해.
“그게 정말인가, 광휘 공?”
“전장에 있는 대장군과 통신해 보시면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아닐세. 그런 걸로 비싼 통신을 남발할 수는 없지.”
황제가 이방인의 말에 너무 쉽게 수긍하는 모습이 그의 심장을 바짝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폐하! 지금 저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으시는……!”
“확인이 된다면 어쩌겠느냐, 태자? 그럼 정말로 네 목을, 적어도 태자의 자리를 내어놓을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이겠지?”
쏘아지는 황제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그는 결국.
“……저는 진실로 제국을 염려했던 것뿐입니다, 폐하. 이방인이 요설로 제국을 홀리려 한다 생각했습니다. 폐하의 혜안을 흐린다고 걱정한 탓에 벌인 일이옵니다!”
진실을 토로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태자를 태자궁에 유폐하라! 그리고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 외출을 금한다!”
“충!”
황제의 말 한마디에 대전 내부에서 대기하던 근위군들이 우르르 그를 향해 몰려왔다.
“놔라! 감히……!”
“모시겠습니다.”
자신을 붙드는 손길을 뿌리치려 해 봤지만, 부질없는 저항일 뿐.
그렇게 그가 본의와는 상관없이 대전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려는데.
그 모습을 조소하며 바라보는 검은 머리 이방인의 모습이 다시금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폐하!”
다시금 억지로 고함을 질러 봤지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 이방인들이 대륙에 온 직후에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사절이 아니라 재앙을 몰고 온 흉신이 아니겠습니까!!”
악의를 담아서 지어낸 그 말에 일부 대신들이 움찔하고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자신을 끌고 나가려던 무사들의 팔 힘도 조금 약해진 듯하여, 태자는 더욱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오랑캐 놈들! 네놈들이 그 악마들을 끌고 온 것이 아니냔 말이다!”
말을 하다 보니 정말 그럴듯했고,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임에도 진실 같았다.
게다가 그 생각을 한 것이 자신만이 아닌 듯, 대신들도 술렁이기 시작했고 황제의 얼굴 역시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스아아아.
“그랬다면, 이미 태자 전하는 죽었을 검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도 말임다.”
스산한 말과 함께 넘실거리는 살기가 퍼져 나가 대전에 있는 모두를 압박했다.
그리고 그 기세는, 그들이 얼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이방인의 압도적인 무력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무력시위.
하지만 황실 3대 장군이 모두 전장에 나가 있는 지금, 저 이방인이 황궁의 중심에서 날뛰기 시작한다면 막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떠올린 것이다.
“흉신을 원하신다면, 흉신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검은 머리 이방인의 스산한 미소.
우습게도, 그 협박이 협박에서 그쳤다는 사실이 곧 증거가 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자중해주게, 광휘 공.”
“……실례했습니다, 폐하.”
쿵.
황제의 한마디에 곧바로 다시 무릎을 꿇는 이방인의 태도는 태자가 심으려 했던 분란의 씨앗을 사전에 차단해 버렸고.
곧 근위병들은 다시 태자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놔, 놔라! 놓으라고 이놈들아!”
모든 것이 끝났다.
“아바마마!”
그 생각에 악에 받친 태자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마마마를 버리신 것처럼! 저도 버리시려는 겁니까!?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바마마! 아바……!”
쿵.
- ……마마!!
대전의 문이 닫히고 태자의 요란한 목소리가 사라져 갈 때.
한층 더 굳은 얼굴이 된 황제가 무거운 눈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창천검제의 유물은 무사들이 안내해 줄 걸세. 이곳에선 재앙의 뒷수습을 위한 토의를 해야 하니, 바로 가 주겠는가?”
사실상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
타이니는 태자가 마지막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따져 물을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그는 그대로 대전을 나섰다.
* * *
“저게 뭐야?”
“어맛!?”
“……망측해라.”
“그래도 예쁘다.”
무사들의 뒤를 따라 걷는 내내 느껴지는 시선들.
세상에 위난이 닥쳐온 것도 모른다는 듯, 궁궐의 시종들은 여상스러운 눈길로 에스티나를 쳐다보기 바빴다.
그녀에게 애써 눈길을 두지 않으려 하는 무사들이나 대신들과는 달리, 여시종들은 서방에서 온 요정의 모습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거나 수군거리고 있었다.
딴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생각했겠지만, 타이니에게는 고스란히 들릴 수밖에 없었다.
‘씁!’
물론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상황도 아니고 수컷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니니, 그저 무시하려 했는데.
촤르륵.
갑자기 에스티나가 복도에 걸려 있던 비단을 찢더니, 날카로운 칼질로 순식간에 그것을 다듬어 냈다.
“무슨……?”
안내하던 무사들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가도, 이내 비단을 장포처럼 둘러 몸을 가린 에스티나를 보고는 황급히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즉시 더욱 빨라지는 무사들의 발걸음.
타이니는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부드러운 동대륙의 비단을 온몸에 휘감은 에스티나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야해 보였으니까.
“……왜 그런 거야?”
“네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이거, 이상해?”
“꼭 그런 건…… 아니, 아니야. 잘했어.”
예전 같았다면 누가 어떻게 보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얼마 전의 그 사건 이후 그녀의 태도가 많이 바뀐 듯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변한 것은 자신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가끔씩 그는 스스로도 움찔하게 만드는 충동이 일어나서 괜히 에스티나를 더욱 신경 쓰게 되었고, 그녀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집중하자, 집중.’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그는 자꾸 그녀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억지로 거뒀다.
지금은 빨리 신성이 깃든 유물들을 모아서 서부에 강림한 칠죄종, 색욕을 처리해야 할 때였으니까.
그렇게 타이니가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
일행은 황궁 깊은 곳에 들어섰고, 곧바로 익숙한 감각이 그들을 맞이했다.
동대륙에서는 느껴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신성력의 파동.
정말 7대 성물의 그것과 유사한 기운이 그 공간에서 느껴진 것이다.
“……맞지?”
“그래.”
둘의 얼굴에 희망의 미소가 피어올랐고.
잠시 후.
“이곳입니다, 광휘 공.”
끼이이이.
황실의 위패가 모여 있는 사당의 문이 열리며, 창천검제의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