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76화 (376/500)

376화. 몽마 군단

“이제 출발하자.”

“응.”

에스티나의 회복에 필요하다 생각했던 이틀의 시간은, 각고의 노력 끝에 하루하고 반나절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요 나라의 서쪽, 선 제국의 영토에 나타난 차원 균열을 향해 이동하는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동대륙에 강림 예정이었던 세 칠죄종 중 둘이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강림했으니,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파아아아앙.

그들을 싣고 날아가는 카일룸의 날갯짓이 거친 바람을 만들어 내고도 한참 후에나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대화가 이어졌다.

“어떤 칠죄종일까? 또 무슨 군단이고.”

“나태, 오만 아니면 색욕 중 둘이겠지. 나태는 모르겠고 나머지는 마룡 군단과 몽마 군단인데, 차이가 너무 커…….”

일단 당대의 나태, 오만이나 색욕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다만 확실한 것은.

- 솜누스, 아니 나태 그놈은 인류 수천만을 바치고 영생을 얻었다 했습니다.

- 그렇다면 당대의 나태도 그자겠지요. 아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요.

마인드 킬링을 사용하던 크롬벨의 얼굴에도 선명히 나타나던 분노.

- 나태는 게으름. 때문에 군단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서열 4위로 꼽혔을 만큼 칠죄종 자체의 무력은 강대했지만, 한계가 분명했죠.

- 애초에 솜누스가 전향하던 그때, 당시의 나태가 저희한테 가장 먼저 토벌되었기에 그자가 칠죄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 동대륙에 강림할 세 군단 중에 나태가 없길 바랍니다. 그놈은 반드시 제 손으로…….

크롬벨은 나태를 꼭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본성 그대로 나태하기 때문에 집단을 꾸리지 못한다라……. 이곳에 강림한 게 나태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었다.

“오만이나 색욕이라면 더 힘들어질 거야.”

“그렇지. 특히나 오만.”

크롬벨에게 들었던 고대의 오만의 군세, 마룡 군단의 신위는 무시무시했다.

- 칠죄종 서열 1위, 오만의 군세. 다른 군단장에 버금가는 마룡들이 고작 장군의 자리에 앉아 있었죠. 고대에는 놈들을 상대하느라 마왕 강림 이전에 예상보다 일찍 천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마왕과 싸울 때……. 아, 이건 쓸데없는 얘기였군요.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 확실한 것?

- 이제 진짜 용들은 더 이상 마계에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물론 용의 하위 종들도 강력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그때만큼 말도 안 되는 강력함을 보이지는 못할 겁니다.

- 용들이 없을 거라고 보는 이유는 뭔데?

- 용은 창세에 관여했던 신화종의 우두머리입니다. 애초에 신화시대가 끝날 때 신들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존재죠. 중간계든, 천계든, 마계든, 그것은 모든 용들에게 걸린 제약입니다.

- 난 그 용 비슷한 것을 본 것 같은데? 대미궁에서.

- 아, 흐. 만약 억지로 그 제약을 어겨 세상에 남았다면, 스스로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미 용은 아닐 테니까. 마찬가지입니다.

- 그놈한테도 죽을 뻔했는데…….

- 엄살 부리지 마시죠. 만약 지금 당신이 용의 하위 종에게 당한다면 그냥 당신이 바보짓 했을 경우뿐일 테니까.

- ……우리 진짜 안 맞는 거 알지, 너?

- 흥.

“그래서 고대보다는 약할 거라고 듣긴 했지만…….”

“우리는 체감 못 할 차이일 뿐이지.”

“그래.”

고대보다 약하다 한들, 현세의 인류에게는 분명 재앙이 될 것이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당시 오만의 군세를 상대해 본 크롬벨뿐일 터이니.

“그리고 몽마 군단도…….”

“전에 잡았던 그 릴리스라는 마족이 21마리가 있다는 거야.”

- 몽마 군단의 초월급 마족들은 군대를 홀리고, 악마급 마족들은 나라를 홀립니다.

- 어떤 의미에서는 도플갱어 군단보다 더욱 심각한 위협이 되는 군세죠.

두 사람의 표정이 계속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제발 나태였으면 좋겠다.”

무심결에 나온 타이니의 말에 에스티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른 군세가 우리 대륙에 강림하는 건데?”

“하…….”

“진짜 답답하다.”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태 강림이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에 그 군단부터 완파하고 나서, 뒤이어 나온 군단장을 ‘사냥’하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그중 타이니가 혼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던 건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글러터니 하나뿐이었고, 사실 놈이 죄의 힘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했다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지금 전생보다 강해진 건 확실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한 번 싸워 본 애버리스도 혼자서 다시 상대한다면 확실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정찰이 목적이야. 알지?”

“물론.”

그들이 검선과 갈라진 이유는 각 나라 초인들의 힘을 빌려 칠죄종을 잡거나 견제하기 위함이지, 자신들끼리 어찌해 보려는 건아니었다.

“선 제국이나 동진(東晉)의 군대는 이미 출진 중이겠지?”

그가 언급한 동진이란 선 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국가였다.

해상 왕국 서진(西晉)과 한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동쪽의 진 나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

두 번째 강림 포인트는 선 제국의 서쪽 국경 부근의 구릉 지대였기에, 동진의 왕도 군대를 그곳으로 집중시키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칠죄종이 예상보다 일찍 강림한 이상 그것도 말려야 해. 적어도 군대가 싸울 곳과 군단장을 잡을 전장은 따로 만들어야 하니까.”

“일단 정찰부터 하고 결정하자고.”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침묵 속에서 비행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한나절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을 때.

그들은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칠죄종의 군단과 조우했다.

* * *

- 진정한 주(主)의 강림을 경배하고 찬양하라!

체고만 거의 5m에 이르는 인간형 마족의 입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형이라곤 하지만 머리에 달린 눈만 세 쌍이요, 팔 역시 세 쌍, 등 뒤에는 두 쌍의 거대한 박쥐 날개까지 돋아나 있는 흉악한 모습.

그럼에도 인간형이라 칭한 것은, 그 몸체가 인간 여성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등 뒤로 늘어트린 기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들도 자세히 보면 꿈틀거리는 뱀이었으니, 막연히 마족이라 추측할 뿐 그중 어떤 종족인지도 알아보기 힘든 혐오스러운 외형.

그런데.

- 경배하고 찬양하라. 오염된 중간계의 하찮은 것들아.

그 괴물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만큼은, 그 외견과 상관없이 아주 낭랑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 말을 받들 듯이, 그녀의 주변에 늘어서 있던 특이한 형상의 ‘일곱의 괴물’들이 호응했다.

- 진정한 주인의 강림을 찬양하라!

국부와 가슴만을 간신히 가린 복장이지만 그나마 평범한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보랏빛 머리 여자부터.

- 경배하라! 모든 수컷들아!

날카로운 송곳니가 턱밑까지 내려와 있고 복부에는 세 쌍의 거대한 젖가슴이 늘어져 있는, 체고만 3m에 달하는 야수까지

- 경배하라! 모든 암컷들아!

- 경배하라! 모든 생물들아!

흉하게 생겼음에도 이상하게도 저마다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일곱 괴물이 중앙의 거대한 괴물, ‘그녀’의 목소리를 제각기 해석하며 더욱 멀리 퍼트리고 있었다.

- 진정한 주인을 경배하라!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온갖 형상의 마족들까지 그에 호응하듯 소리를 지르자, 그 매혹적인 목소리는 더욱 강한 힘을 싣고 더욱 멀리 퍼져 나갔다.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중앙의 괴물들을 중심으로 모인 각양각색의 마족들의 수는 얼핏 1만가량.

마족의 군단치고는 비교적 머릿수가 적다 싶었지만.

묘한 파장의 음파를 퍼트리며 진군하는 그들의 주변에는 온갖 동물들과 마물들이 모여들었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군단의 전방에서 전열을 형성한 채 함께 전진했다.

“크르르릉.”

“끼룩.”

“캬악!”

포식자와 피식자들, 중간계의 생물부터 마물들까지 한데 뒤섞여 있음에도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광경.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생물 중에는.

“주인을…….”

“경배하라…….”

저벅저벅.

멍한 표정으로 마족들의 목소리를 따라 외치는, 수천에 가까운 ‘인간’들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해 마족에게 홀린 그 생물들의 숫자는, 타이니가 구름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순간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X발…….”

자연스레 욕이 튀어나올 만한 광경.

에스티나 역시 탄식을 입 밖으로 뱉지만 않았을 뿐,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지상을 살펴보는 것도 잠시.

이내 에스티나의 입에서 먼저 한 가지 제안이 튀어나왔다.

“저격해 볼까? 저 중 악마급 하나라도?”

저대로 두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

하지만.

“더 가까이 가면 감지당할 거야.”

타이니는 그 군세의 가운데에 위치한 괴물, 아마도 칠죄종 중 색욕으로 보이는 세 쌍의 팔을 가진 거인 마족을 보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저 괴물이 말도 안 되게 넓은 감지 범위를 가지고 있음을.

“조금 더 뒤로 물러서자. 그래도 넌 볼 수 있지?”

“어……. 그런데 그 정도야?”

“……응.”

굳은 타이니의 표정을 확인한 에스티나는 곧 카일룸을 선회시켜 후방으로 이동했다.

카일룸 역시 상황을 아는지 평소처럼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중앙의 괴물을 노려보는 타이니를 보며, 에스티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길 수 있겠어?”

“아무리 나라도 이 거리에선 알 수 없어.”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 말은 오히려 에스티나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 덜어 줬다.

그녀는 타이니가 바로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승산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역시.’

동대륙에 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실시간으로 발전하던 타이니의 모습을 옆에서 봐 왔으니.

실로 놀라운 재능이라 새삼스레 감탄하면서도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만으로는 아무래도 무리겠지?”

“어. 기습하려면 빅뱅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천지개벽을 쓰더라도 이미 쏘아지는 순간 감지당할 거 같아.”

그들이 가진 그 필살의 수법은 실패하면 뒤가 없는 기술이었으니.

실제로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아르곤과 루나가 없었다면 마충 군단의 핵심 다수를 쓸어 버리고 그대로 죽을 뻔했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색욕 하나 잡고 내가 죽어. 그건 손해야.”

타이니로선 지금 그런 도박 수를 쓸 수는 없다는 생각에 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에스티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손해……?”

그 말은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목숨을 내던질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던 것이다.

타이니의 성정이나 사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녀로서도 움찔하게 되는 말.

다행히, 항상 눈치 없게 행동하던 타이니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반응을 빠르게 캐치했다.

“아, 아니. 전략적 의미에서 표현한 거지, 내가 내 목숨 가지고 손익을 저울질하겠다는 건 아냐. 나도 당연히 살고 싶지.”

손까지 내저으며 그리 말해 보지만, 에스티나의 무거운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럴 생각이야.’

그 변명 자체가 오히려 심증을 더욱 굳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온 사람.’

그의 전생과 현생까지 모두 직접 ‘본’ 자신은 타이니의 그런 성정을 알 수밖에 없었으니.

“타이니, 꼭 하나만 기억해 줬으면 해.”

“응?”

“네가 죽으면, 나…… 아니,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알고 있는 거지?”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타이니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로 가늠되는 크롬벨도 있었지만, 고대에 그의 정령이었다는 펜릴이 남긴 말이 있었다.

- 크롬벨은 이미 마왕과 싸워 봤고, 마왕은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크롬벨 본인 역시 그리 말했다.

- 여신과의 연결을 유지한 상태에서 세상의 구조를 뒤흔들 정도의 카르마를 끌어다 썼는데도, 마왕을 쫓아내는 수준에 그쳤었습니다.

“넌 마왕을 잡을 유일한 칼이야. 절대, 절대 그 전에 목숨을 걸지 마.”

아니, 가능하면 어느 때에도 절대.

‘그리 말해 봤자 소용없겠지.’

그렇기에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무거운 눈빛에 담긴 진심만은 온전히 타이니에게 전달되었다.

“근데, 난 칼이 아니라 해머…….”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 그가 시선을 돌리며 헛소리를 내뱉었을 정도로.

“장난하지 말고!”

“……응, 그럴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타이니가 한숨을 쉬며 다시금 몽마 군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따가운 에스티나의 눈초리를 피한 것이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허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래. 한 가지 틈은 노려 볼 수 있겠네.”

“응?”

“가면서 말해 줄게.”

“어딜?”

“일단 선 제국 군대 쪽으로 가 보자. 진군하고 있겠지.”

“아…….”

너무 타이니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나.

에스티나는 자신의 사고가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짝.

“왜?”

스스로 뺨을 때리는 에스티나의 모습에 타이니가 놀란 눈길을 보내는데.

“아냐. 정신 좀 차리려고.”

결연한 목소리로 답한 에스티나가 바로 카일룸의 방향을 틀었다.

동쪽. 동대륙 최강의 군대가 강림을 대비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는 곳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