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탈출
꽈아아아아앙!
‘흡.’
빅뱅의 발동을 견딜 수 있도록 순간이나마 무적에 가깝게 강화된 육체에도 다소간의 부담이 갈 정도로 빠르게 지상을 향해 쏘아지는 타이니.
그 속도는 거대한 장벽을 형성하던 마충 떼가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리고 거대한 노을빛 화살이 마충 떼를 직격한 순간.
콰드드드드득.
마계의 환경에 적응한 튼튼하고 탄력 있는 놈들의 갑각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그러나 가속된 의식 덕분에 그 찰나의 순간을 길게 체감하고 있는 타이니로서는 마치 두부 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곤충의 벽을 뚫어 낸 그의 몸이 그 너머의 검고 반투명한 보호막을 직격했다.
쾅!
출렁.
급격하게 진동한 거대한 보호막에 일순간 금이 갔고, 그 금은 순식간에 표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콰드드득.
그 반투명한 구체가 마치 유리처럼 단숨에 깨어지자, 이질적인 생명체들이 가득한 붉고 어두운 공간이 타이니의 눈에 들어왔다.
갑옷과 같은 갑각과 수많은 다리를 가진 각양각색의 벌레들.
동산만 한 것에서부터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작은 것까지 다양한 개체가 모여 있었다.
바깥쪽에 또 하나의 보호막을 만들었던 마충들과의 차이가 있다면, 그들 중엔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것들이 꽤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차원 균열의 중심에서 차원 균열을 향해 힘을 투사하고 있던 21개체의 벌레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7개체.
- 적……!
그중 이마에 기다란 뿔이 난, 사람 상체만 한 사마귀가 가장 먼저 타이니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꾸웅.
- 락클람이, 막는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그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의외의 순발력을 가진 동산만 한 벌레.
머리와 하반신은 지네와 같고, 상반신은 인간의 형태이며, 양팔은 거대한 낫처럼 생긴 그 괴물이 타이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19개체의 악마급 곤충형 마물들도 일제히 타이니를 인식했다.
- 적!!!?
‘생각보다 빨라. 젠장!’
마수 병단 때처럼 자신의 기세를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적들의 반응이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거기엔 마치 인간처럼 생긴 마물과 그저 평범한 벌레를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마물부터, 그 둘을 섞어 놓은 듯한 놈, 그리고 곤충이 아니라 거대한 짐승이나 새처럼 보이는 놈까지 혼재해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흉측한 외골격과 여러 개의 다리를 가졌다는 것뿐인, 보기만 해도 역겨운 마물들이 그에게 일제히 시선을 쏘아 낸 순간.
놈들의 등을 덮고 있던 갑각이 하나둘씩 열리며 파르르 떨리는 날개가 펼쳐졌다.
그가 ‘고유의 시간’이라 명명한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무려 스물하나.
그 수는 분노의 군단에 속한 악마급 마족 전체였다.
‘모든 것이 빠르다. 다른 군단에 비해.’
가장 먼저 튀어나온 곤충형 하급 마물부터 장군들까지, 모든 개체가 이제까지 겪어 본 어떤 마족의 군단들보다 빠르고 협공에 능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파르르르르.
날개를 펼친 그 온갖 악마급 마족들이 피하는 게 아니라 그를 향해 날아오려는 듯하다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이 다가온 것은, 타이니의 존재를 두 번째로 인식했던 거인 벌레형 괴물.
- 락클람, 죽인다.
쿵.
덩치답지 않게 빠른 악마급 마족이었다.
마치 작은 산이 느리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
잘 단련된 인간처럼 왕(王)자 모양으로 갈라진 놈의 복근은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가 감싸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공간이 굴절된 것처럼 공기나 에너지가 휘어지고 있었다.
강력한 방어력으로도 모자라 공간계열 영역까지 가지고 있는 괴물.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타이니 역시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을 만한 강적이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라면 그랬겠지.’
그 순간, 타이니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느린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조금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는 노을빛 화살, 그의 몸이 그대로 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쩍!’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던 순간.
- 아파……?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영파가 울려 퍼지고.
콰드드드득.
빅뱅의 힘을 품고 화살처럼 쏘아지던 타이니는, 이전과는 달리 ‘약간의 저항감’을 느꼈다.
곤충과 마기의 보호막을 두부처럼 파고들고 유리처럼 깨 버린 지금의 자신이 저항감을 느꼈을 정도라면, 본디 저 괴물이 얼마나 강력한 방어력을 가졌는지 짐작이 되는 듯했다.
당장 빅뱅의 여력을 터트려 이놈부터 확실히 죽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아니야!.’
그리고 그 짧고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콰드드득.
타이니는 놈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내장들을 거침없이 박살 냈고.
콰직.
마침내 놈의 몸체를 완전히 뚫고 나왔을 때.
- 침입자!
- 죽인다!
- 죽어!
- 먹는다!
눈앞에 새까맣게 달려드는 악마급 마족들을 본 타이니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스쳤다.
상상해 본 최상의 경우였다.
‘지금!’
우웅.
결심이 서는 순간, 거대한 노을빛 서광이 일점으로 수렴했고.
다시금 더욱 강렬한 노을빛으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끄……?
- 이상……?
- 어떻게……?
당혹스러운 영파가 느껴지는 것도 잠시.
번쩍.
노을빛 파멸의 빛이 한순간에 주변의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 버렸다.
그리고 타이니는 몸속이 갑자기 텅 비는 듯한,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탈력감 속에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쿵.
우당탕탕.
그제야 지면을 통해 진동이 전해져 오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자신이 만들어 낸 파멸의 빛의 여파가 낳은 어마어마한 굉음이.
하지만 타이니는 그보다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얼마나? 얼마나 죽었지?’
과연 악마급 마족을 얼마나 처리했을까?
‘다 죽였을까?’
그랬으면 안 되는데. 그럼 분노가 바로 강림할 텐데.
그런 황당한 걱정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한 타이밍에 터진 빅뱅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 괴물!!
- 어떻게……!!
어느새 빅뱅의 범위를 벗어났는지, 그로부터 1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공포심이 묻어나는 영파를 뿜어내는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 보았던 커다란 사마귀를 비롯하여, 여섯 놈이나.
장군급 둘, 부관급 넷.
“빌어, 먹을…….”
그리고 그것은 당장 그에게는 분노가 강림한 것보다 더 큰 재앙이었다.
악마급 마족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살아남았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 아닌가?’
다행히도 온전하게 빅뱅의 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는지, 놈들은 몸 이곳저곳이 훼손된 모습으로 비틀대고 있었다.
자신이 멀쩡했다면 어렵지 않게 다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했다.
비틀.
털썩.
“크윽…….”
일어서는 것조차 쉽지 않은 비루한 몸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꽉 잡아.”
루나가 그의 그림자에서 솟아나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쿵.
다급한 루나의 마음과는 달리,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무, 무거워.”
“미안.”
타이니에겐 중력 속성을 운용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이미 인간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가 그녀에게 부담이 된 것이다.
의식을 잃지 않고 눈을 뜨고 있는 것만도 신기할 정도의 상태.
에스티나의 천벌에 그의 빅뱅까지 더한 기술은 그만큼 힘 조절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그들의 빈틈은, 멀리서 적들을 지켜보고 있던 악마급 괴물들과 빅뱅의 범위 밖에 있었던 덕에 살아남은 다른 강력한 곤충 마물들에게는 기회로 보였다.
- 괴물이 지쳤다!
- 잡아!
위이이이잉!
한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뿔 달린 사마귀의 몸.
- 죽어라!
그리고 그 먼 거리를 일순간 단축해 코앞에 나타난 놈의 낫이, 어느새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를 담고 타이니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루나는 타이니를 데리고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른 이를 부축한 상태에서 강제로 행하는 그림자 도약.
만약 그녀가 부축한 게 다른 사람이었으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무리한 시도였다.
그러나 다행히 타이니의 몸에도 모르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덕에 안 그래도 초월적인 마나 감응력을 가진 그는 유독 그림자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남달랐다.
물론,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커헉!”
수백 미터 밖에 있던 거대 무당벌레 같은 마물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타이니가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참아. 저놈, 빨라.]
“캬아아아악!”
- 그림자!! 역겨운 그림자 놈들의 기술인가?
짜증스러운 영파를 울리며 다시 모습을 감춘 사마귀.
그 순간, 루나는 타이니의 몸을 업은 상태로 다시 한번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그런 괴상한 추격전이 열몇 번에 걸쳐서 반복된 끝에, 그들은 어느새 마충들의 영역을 훌쩍 벗어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타이니는 파랗게 질린 채 의식을 잃은 상태로 연신 피를 토해 냈다.
“쿨럭.”
루나는 그런 동생의 상태를 알면서도 그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 쥐새끼가!!!!
멍청하게도 언제 달려올지를 알려 주는 사마귀의 영파.
- 이번엔…….
그러나 놈은 그 멍청함이 몹시도 고맙게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와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끈.
타이니를 동반한 그림자 도약의 후유증, 두통 때문에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루나가 여태까지처럼 그림자 속으로 빠져드는데.
- ……끝이다!
사마귀의 낫은, 이번에는 타이니가 아닌 루나의 다리를 밑에서부터 노리고 있었다.
루나가 그것을 느낀 것은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리고 놈의 낫이 제 옆구리로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안……!’
……돼!
한순간 주마등이 스치듯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사마귀의 몸이 튕겨 나갔다.
“끄아아!!”
- 누구냐!! 감히 이 엑시드 님의 행사를!!
이번에도 먹잇감을 놓친 사마귀가 분노 어린 영파를 토해 낼 때.
또다시 수백 미터 밖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루나는,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스티나의 앞에서 어지럽게 마기아를 휘두르는 아르곤의 모습을 보았다.
“젠장, 뭐가 이렇게 빨라!”
콰콰콰쾅!
- 저주스러운 신의 무구!!!
그의 검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체의 초월무구 동글이, 본명 케레브룸(Cerebrum)이 사마귀의 공세를 막아 내고 있었지만.
쩌저저정.
놈이 정신없이 낫을 휘두를 때마다 그 회색 구체에는 점점 금이 가고 있었다.
“젠장! 동글아, 조금만 버텨!”
그 순간 다시 검을 휘두른 아르곤의 칼끝에서 한꺼번에 수많은 획이 그어지면서 단숨에 글자가 완성되었다.
[保護(보호)]
“젠장! 타이니 자식, 쓸데없이 무거워선!”
[重力逆轉(중력역전)]
[風神(풍신)]
우우우웅.
한순간에 타이니와 에스티나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 위에 보호막이 생겨났다. 그러고는 후방으로 쭈욱 밀려나기 시작하는데,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마법쟁이, 대단해.’
생각지도 못한 능력. 여러모로 모자라다 여겨 왔던 동료가 보여 준 의외의 모습에 루나의 눈동자가 한없이 커질 때.
“뭐 해!!?”
아르곤이 그녀를 향해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짧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당황한 루나를 각성시키기에 충분했다.
파바박.
“키에에엑!”
한순간 죽음의 오러를 싣고 쏟아진 뼈 칼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던 곤충들을 어지럽게 난자했다.
간혹 그것을 뚫고 오는 마물들도 있었으나, 그마저도 아르곤의 검이 쏟아 낸 화염과 냉기의 폭풍 앞에서는 맥없이 바스러졌다.
다만 그 와중에도.
- 죽어!!!
콰드드득.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초월무구 케레브룸은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있었고.
‘젠장, 안 돼!’
아르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동안 알면서도 절대 사용하지 않았던 수법을 꺼내 들었다.
타이니 덕분에 마기를 마나로 전환할 수 있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얻게 된 힘.
[咀呪(저주)], [弱化(약화)], [中毒(중독)], [失明(실명)]
우우웅.
‘됐다!’
동시에 네 가지 마법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심지어 그 마법은 모두.
- 암흑 마법!?
그것은 분노의 장군 중 하나로 추정되는 사마귀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튀어!!”
“어디까지!?”
“몰라! 일단 달려.”
[加速(가속)]
사방에서 쏟아지는 곤충들, 아니 마충들 속에서.
아르곤과 루나는, 마법으로 밀어 낸 에스티나와 타이니의 뒤를 따라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