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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370화 (370/500)

370화. 다음 생에 다시

선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 요(曜) 나라.

대륙의 동북쪽에서 ‘끝없는 바다’라 불리는 동부 해상을 향해 뿔처럼 튀어나와 있는 작은 반도 국가였다.

크기는 작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평야로 되어 있어 농사짓기 좋으며, 사계절이 뚜렷해서 사람들의 성정 또한 좋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그 지형적 특징과 풍요로운 농산물 때문에 상시 외세의 침입에 시달려 온 탓에, 백성 대다수가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특이한 나라였다.

물론 한창 강성하던 시절에는 타국을 침략하기도 했었지만, 사람이란 자신이 때린 건 잊어도 맞은 건 기억하기 마련이니.

자연히 요 나라의 백성들은 인접해 있는 나라, 특히나 선 제국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3백 년이 넘는 긴 평화의 시대 속에서도 그 앙금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선 제국 놈들이 이번에 또 무슨 지랄을 했다던데.”

“그놈들 헛소리하는 게 한두 번이야? 신경 꺼.”

그렇기에 요 나라의 왕실에서는 선 제국의 경고를 무시했었다.

신조를 타고 방문한 이방인 중 한 사람이 왕국의 대장군인 동방신궁(東方神弓) 조천익을 궁술로 제압하고, 다른 한 사람이 왕궁 한가운데서 세자를 곡소리 나게 패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 이런 강자들이 헛소리를 전하러 동대륙까지 왔을 리가 없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요 나라 왕실이 태도를 바꾼 이유는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자가 요정신궁을 첩으로 삼겠다고 난리를 피웠음에도, 압도적인 힘을 가진 이방인들이 약간의 폭력을 행사했을 뿐 그를 죽이거나 왕을 협박하지 않는 자비를 보여 준 것도 한몫했고.

거기다 동대륙에서 강림이 일어난다는 세 곳 중 하나가 요 나라에 있는 곡창 지대, 강남 평야라는 사실도 경각심을 키운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지역이다!

- 재앙을 대비하라!

그렇기에 왕실은 서방제일검 일행의 방문 이후 황급히 군대를 파병하려 했다.

물론 그들이 방문한 것은 강림 예정일 3일 전이었기에, 그때의 조치만 해도 사뭇 늦은 감이 있었다.

실제로 그날 곧바로 특명을 내렸음에도, 병참이 확보되고 왕실과 변방의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예정일 당일인 오늘 아침이었으니까.

때문에 요 나라 왕실에서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피해 예방 조치라고는 강남 평야 인근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소개령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백성 중 많은 수가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

“촌무지렁이가 살던 땅 떠나서 어디로 간디요?”

“죽어도 여기서 죽겄심더.”

“살 만큼 살았습니다.”

관아의 명령을 들었음에도 버티려는 자들부터.

“……그런 말이 있었슈?”

“시방 난 처음 듣는데?”

소개령이 내려진 지 3일이 지난 지금에도 소식을 듣지 못한 외진 곳의 백성들까지.

결국 왕실의 명령을 듣고 대피한 백성의 수는, 강남 평야에 살던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추정 3백만에 가까운 백성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농부, 장웅은 오늘도 여전히 농사일에 힘쓰고 있었다.

“한돌 아빠요! 난리가 났담니더. 우리도 피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껴?”

매사에 호들갑스러운 여편네가 오늘도 난리를 떨어 댔지만, 그는 아내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쟁기를 들었다.

“끙차! 한창 농사지어야 할 여름에 어딜 가겠다는겨!”

“하지만 관아에서…….”

“시끄럽고, 일이나 혀!”

괴물의 군대가 쳐들어올 테니 피난하라는 그 황당한 공고는 그도 들었다.

하지만.

“이 화창한 날에 괴물은 무슨…….”

세상일은 언제나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기 마련.

육십 가까이 살다 보면, 높으신 분들의 책에는 나오지 않는 이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경험상, 현실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쓸모가 있었다.

그렇기에 장웅은 관아의 공고보다 자신의 직감, 아니 경험을 믿었다.

“그려도 불안한디…….”

소심한 여편네의 호들갑은 그냥 무시해 버렸다.

설령 관아에서 내려온 그 말도 안 되는 공고가 사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어, 하늘님. 나가 자식을 다섯이나 키웠으여. 첫째는 관리가 됐고 둘째는 지주가 됐는디, 딸내미 셋도 손주를 셋씩이나 순풍순풍 낳아 줬는디 뭣이 아쉬울랑가. 지는 당장 죽는대도 아쉬울 것 하나도 없으여.’

한평생 열심히 살아왔고, 번듯한 자식을 다섯이나 키워 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일은 살던 대로 열심히 살다가 귀천하는 것뿐.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다.

그러니.

“아이! 얼른 안 와!? 여편네가 느려 터져 가지고서는.”

쯧쯧.

“알았어요, 알았어. 돌순네는 벌써 어제 피난 갔다는디.”

여전히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여편네가 끝없이 잔소리를 하며 광주리를 들고 자신의 뒤를 따랐다.

“다 이치에 따라 사는 거여.”

자식을 다섯이나 낳은 여편네는 세월의 흐름을 직격으로 맞아 참으로 못나 보였다.

어릴 적에는 그리도 곱고 고왔던 아가씨가 늙은 할미가 된 것이 마음이 쓰였지만, 장웅은 애써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허리가 안 좋다고 하든디, 오늘은 나 혼자 해야 할랑가?’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불안해하는 여편네를 혼자 집에 두는 것이 더 안 좋을 듯했다.

장웅은 자꾸 아내가 마음에 걸렸지만.

“어여 따라와!”

“에휴. 알았어요, 알았어.”

한평생 좋은 말을 해 준 적이 없으니, 이제 와 새삼 다정한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여느 썩을 놈들처럼 손찌검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열심히 일해서 나름대로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게 해 주었다.

‘이쯤 되면 좋은 남편 아닌가. 암.’

장웅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인지 씁쓸해져 오는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쟁기를 들고 걸었다.

째잭.

구름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이 여느 때보다 따뜻하고 새소리도 평온한데, 그것이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헐. 벌써 대낮이네.”

퉤.

불안감에 잠을 설치던 여편네를 살피느라, 오늘은 너무 늦게 나온 것이다.

아니, 사실은 어느새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아내의 손을 쓰다듬다 보니 자신이 잠을 설친 것이었다.

‘잘 살아왔는디……. 그려, 분명 난 잘 살아왔는디…….’

그런데 왜 미안할까.

그 생각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던 여편네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허리를 짚는 것이 보였다.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니미, X부럴.”

장웅은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뒤로 성큼성큼 걸어가 아내가 이고 있던 광주리를 뺏어 들었다.

“와, 와 그라요, 갑자기?”

당황하는 여편네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구경이나 혀. 솎아 낼 것도 없으니, 쟁기질이나 할 거여.”

다시 앞으로 돌아서서 걷는데, 옆구리에 낀 새참을 담은 광주리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걸 저 작은 사람이 수십 년간 매일 들고 다녔었던가.

‘거기다 옛날에는 일곱 식구였…….’

당시 아내는 새벽부터 밥을 해서 일곱 식구의 먹거리를 전부 광주리에 담아 이고 다녔었다.

나는 정말 잘 산 걸까.

그 생각을 하자 괜히 또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아, 어여 안 와!?”

“예, 예. 가요, 가. 나 참, 오늘 대체 왜 그란데요?”

장웅은 타박대는 작은 발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일궈 온 밭을 눈앞에 뒀을 때.

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쩌저적.

멀쩡한 허공에, 햇살 가득하던 공간에 검은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뭣이여!?”

화들짝 놀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는데.

그 고함에 응답하듯 그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여, 여보!”

“어, 어. 어……?”

여편네의 놀란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장웅은 그대로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제엔장!’

저 균열을 보는 순간, 관아에서 경고했던 재앙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순리여! 무슨 직감이여! 병X 같은 놈이여, 나는!’

괜히 똥고집을 피워서 아내까지 횡액을 당하게 생겼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은 이 순간 사라졌다.

살아야 했다. 아니, 적어도.

“여, 여보?”

이 사람은 살려야 했다.

그런데.

“허, 허리가……. 천천히, 천천히 가요. 좀.”

하필 아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런 젠장! 어, 업혀!”

“예?”

“얼른!”

우당탕.

“끙차!”

쟁기건 광주리건 모조리 버렸다.

챙겨야 할 것은 사람뿐이니.

장웅은 다시금 스무 살, 늦장가에 들던 그날처럼 힘차게 아내를 업었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이이이잉.

찌르르르르르.

뒤쪽에서 갑자기 요란한 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장웅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았다.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말벌 같은 곤충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쫓아오는 광경을.

“흐아아…….”

어린 시절 벌통을 잘못 건드린 탓에 말벌 떼에 쫓겼던 그 날보다 천 배, 만 배 무서운…… 아니, 그 이상 공포가 전신을 엄습하는 순간.

장웅의 다리가 굳어 버렸다.

“여, 여보!!”

이내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괴물 벌 떼는 이미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젠장!”

“악!”

그는 업고 있던 아내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왜……?!”

“참어, 이 사람아!!”

그리고 그 위에 몸을 던졌다.

항상 모자라 보였던 아내의 자그마한 몸뚱이가 이 순간에는 고맙게 느껴졌다.

자신의 커다란 몸으로 빈틈없이 덮을 수 있었으니까.

푸욱.

“끅!”

“여보?”

뒷덜미에 아찔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점점 마비되어 가는 몸.

지금이 생의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 순간 장웅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미안혔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한마디.

평생 마음에 담아 왔던 말이었다.

“여보?!”

“끄으으.”

위이이이이잉.

이윽고 마비된 듯한 몸에 엄청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전신을 갉아 먹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돌 아빠? 무, 무슨 일…….”

그는 아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억지로 신음을 삼켰다.

‘안 된단 말이여. 이 사람은 안 돼.’

평생 고생만 시켰는데.

‘내가 미안혀. 내가…….’

이 괴물 곤충들이 아내를 덮은 자신의 몸뚱이만으로 만족해 주기를, 그는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우, 움직이지 말어…….”

“한돌 아빠?”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벌써 몸이 완전히 굳어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꾸만.

- 그럼 내가 정말 잘할 거여. 정말루.

- 고생 한 개도 안 시키고, 정말로 잘할 테니까 말이여……. 커흠.

- 흠. 흠. 또 시집와 줄랑가?

진작 말할걸.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장웅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온몸을 뒤덮는 통증보다, 그것이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장웅은 보지 못했지만, 하늘 위에서 노을빛이 비치며 그 주변의 모든 것이 일순간에 쓸려 나갔다.

꽈아아아아앙!

“타이니!!”

“이게 마충 군단…….”

“사람은……?”

“못 구해. 늦었어. 그럴 여유도…….”

죽어 가는 와중에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

그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장웅은 부탁하고 싶었다.

‘아내를, 아내를 살려 주시오. 제발.’

그 간절한 염원이 닿았을까.

“이 할머니, 의식이 있어.”

“우리 이럴 여유 없……!”

“한 명만…….”

“어차피 정찰…….”

장웅은 이미 거덜이 난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여, 여보!?”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누라의, 무사한 목소리를 들었다.

‘나, 난 괜찮어…….’

웃어 줘야 하는데.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 순간 아득한 느낌과 함께 그의 의식이 사라졌고.

그의 고통과 슬픔은 단 두 줄의 전보가 되어 동대륙 전체에 전해졌다.

요 나라 강남 평야.

분노의 군세, 마충 군단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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