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미래가 있다면
- 대륙의 왕국들에 서방의 사절이 가져온 재앙의 소식을 공표하고 군대를 움직이라 이르라.
- 제국의 군대 역시 최소한의 병력을 남겨 놓고 재앙을 예비하기 위해 움직이겠다.
선 제국의 황실에서 전해진 통보는 동대륙을 일대 혼란에 빠트렸다.
제국 내부에서도 여전히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 중천제일검을 꺾고 삼장군의 합공을 막아 낸 서대륙의 최강자, 광휘의 기사가 그 목숨을 걸었다.
- 반대하는 자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삼족을 멸하겠다.
이어진 황실의 선포가 그 반발을 찍어 눌렀다.
“삼족을 멸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일가친척을 다 죽인다는 뜻이야. ”
“흐미…….”
“여기 문화 생각보다 독해.”
일행은 황제의 결단에 감탄하면서도 바로 제국의 황도 중천을 떠났다.
“제국의 통보만으로는 믿지 않는 이들이 있을 거야.”
3일 동안 선 제국과 서진을 제외한 5개 왕국을 방문하는 강행군에 나선 것이다.
당장 일주일 후에 괴물들의 군세가 이 대륙에 강림하니 군대를 움직이라는 말은, 다른 왕국들로선 정말 뜬금없고 황당한 통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
타이니 일행은 신조(神鳥)를 타고 그 왕국들을 방문해, 왕실의 인사들을 설득했다. 개중 자신들에게 반발하는 왕국에서는 직접적인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덕분에 동대륙에서는 각 왕국의 왕실을 중심으로 일행의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붙여진 이명을 알게 되었을 때, 타이니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서방제일검이라니, 내가 언제 칼을 썼다는 거야?”
각 왕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타이니가 아닌 다른 일행이 무력을 보여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가 나섰을 때 가장 임팩트가 컸던 탓이었다.
거기다 이방인이라는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기존의 대륙 10대 고수들의 별호와는 다르게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작명이었다.
타이니뿐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자신의 별호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정신궁(妖精神弓)이나 암천일살(暗天一殺)보다는 낫지 않냐?”
“그거, 최악. 황제 옆 그자는, 별인데, 난 왜…….”
시무룩한 얼굴로 흙바닥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는 루나.
타이니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아르곤에게 말했다.
“그래, 그냥 그대로 마도 기사인 네가 제일 낫다.”
“여기서는 마도(魔道)가 제일 안 좋은 의미라며?”
“어쩔 수 없지. 마법(Magic)이 악마의 수법(魔法)으로 불리는 곳이니까.”
“하…….”
일행은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숲속의 공터에서 휴식을 준비했다.
“어쨌건 우린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이젠 쉬면서 체력을 비축해야지.”
“그래.”
타이니의 그 말에도 일행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동대륙에 상륙한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지금, 모든 일이 그들의 기대대로 흘러가고 있긴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만 된다는 게 문젠데…….”
지금 동대륙 1제국과 5왕국의 군대는 서대륙에서 알려 온 강림 포인트 세 군데를 향해 출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 준비.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서진의 군대마저도 출진을 ‘시작’하는 데에는 이틀이 더 걸릴 예정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초반에 포위 압박하는 건 무리인가.”
“예상했던 거잖아. 일단 쉬다가, 때가 되면 강림 예정지를 순찰하자고. 기회를 봐서 군단장 하나라도 죽여야지.”
“그래. 그러기 위해서라도 쉬어, 티나. 강림까지 남은 3일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응.”
선 제국을 나선 이후 3일간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횡단하느라 잠시도 쉬지 못한 에스티나였다.
본디 회복력이 느린 엘프였으니, 중천에서 하루 동안이라도 쉬게 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쿵.
타이니가 발을 구르는 순간.
우르르릉.
지면을 타고 퍼져 나간 노을빛 오러가 공터의 흙을 움직여 반구형의 커다란 움막을 만들어 냈다.
겉으로 보면 볼품없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그새 흙으로 된 침대와 베개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오러로 달궈진 움막의 내부는 싸늘한 바깥과는 달리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여기가 티나 잠자리.”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돼. 저게 마법이 아니라니…….”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님에도 아르곤이 새삼 감탄할 때, 루나가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마법쟁이, 우리 훈련하자.”
“아…….”
그에 옆에서 듣고 있던 타이니가 물었다.
“무슨 훈련? 쉬라니까?”
“군단장, 암살 훈련.”
“뭐?”
그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자 루나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치명타를 가할 방법, 있어. 믿어 줘.”
“……그래, 믿을게.”
“저기, 친구들아. 내 의견은 안 물어보니?”
“가자.”
“아, 쫌……!”
아르곤이 루나에게 붙들려 숲속 안쪽으로 사라지는 순간.
타이니는 피곤한 얼굴로 모닥불을 쬐고 있는 에스티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좀 편한 곳에서 쉬어야 하는데.”
“아냐, 이런 곳이 차라리 나아. 이곳 사람들 시선이 더 불편해.”
“그건 그렇겠지.”
숲속의 공터를 둘러보는 에스티나의 표정에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티나가 마나 메탈 갑옷을 입은 모습은 이미 그 차림에 익숙해진 일행마저 가끔은 노출이 신경 쓰여 시선을 돌리게 만들곤 했다.
그렇다 보니 복장, 특히 여자의 복장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동대륙에서는 가는 곳마다 시선이 쏟아졌다.
심지어 선 제국을 떠난 뒤 방문한 요 나라라는 곳의 왕성에서는, 그곳의 세자라는 놈이 에스티나에게 집적대는 통에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다.
‘확실히 예쁘긴 하니까.’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얗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선명한 이목구비와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 그리고 몸매도…….
“왜 그렇게 봐?”
“어!? 아, 아무것도 아냐. 딴생각……. 어, 딴생각 좀 했어.”
타이니가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자, 에스티나가 새삼스레 싸늘한 날씨를 느낀 것처럼 다리를 끌어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이내 조그맣게 흘러나온 목소리.
“나, 좀 가릴까?”
“음? 됐어. 이제 얼마 뒤면 다시 전투가 시작될 텐데, 괜히 불편하게 뭐 하러.”
“그건 그렇지만……. 넌 신경 안 쓰여?”
“어, 응?”
뭐가?
“여기 사람들이 날 빤히 쳐다보는 거.”
에스티나가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던진 물음에 타이니의 표정이 흔들렸다.
“……넌 신경 안 쓰이냐고.”
“그, 그야 신경 쓰이지. 당연히.”
“그래?”
“어, 그래도 그럴 만하니까.”
“아…….”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던 에스티나의 표정이 그 한마디에 흐려졌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타이니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아, 아니 내 말은 네가 예쁘니까 그럴 만하다고. 내가 억지로 고개 돌리게 만든 인간만 몇인데……!”
“진짜?”
말을 뱉고 보니 아차 싶었지만, 다시 눈을 반짝이는 에스티나의 모습에 타이니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너 불편할까 봐. 다른 건 아니고, 그냥 그게 다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왜 이렇게 말이 꼬이지!? 젠장.’
왜인지 자꾸만 하늘만 보게 되는데, 다행히(?) 에스티나도 흙바닥에 무언가 그림을 그릴 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만이 공터에 퍼질 때.
“아으으, 다행이다.”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듯한 에스티나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튀어나온 말.
“만약에 이 모든 재앙을 극복하고 나면, 그러고 나서도 우리가 무사하다면……. 넌 어쩔 거야?”
“음?”
그 말에 타이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본 적 없어?”
“어…….”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눈앞만 보며 달려오다 보니, 아득한 미래까지 고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나야……. 뭐, 그냥 늘 떠돌면서 살았으니까 비슷하지 않을까?”
그 말에 잠시 입을 삐죽이던 에스티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또 불쑥 말을 꺼냈다.
“엘븐하임에서 살지 않을래?”
“어?”
말을 한 이도, 듣는 이도 화들짝 놀라는데.
“아, 아니. 너도 돌아올 곳은 있어야 하니까. 집을 마련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고……!”
에스티나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횡설수설했다.
그러다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다시 또 바닥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
그런 에스티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타이니는 이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뭐.”
“진짜?”
“응.”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든 에스티나를 보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던 둘.
그 시선이 조금씩 뜨거워지며 두 사람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지던 순간.
- 으, 으아아! 더, 더는 못해!!!
숲속 저편에서 아르곤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흡!?”
“엑!?”
본능적으로 후다닥 멀어진 둘.
그 직후.
파아아아앙!
사색이 된 아르곤이 공터 안으로 폭풍을 몰고 뛰어 들어왔다.
“타이니! 쟤 좀 말려 봐! 이러다 훈련 중에 죽게 생겼……!”
“마법쟁이, 겁쟁이.”
아르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그림자에 숨어 그에게 따라붙은 루나가 투덜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무, 무슨!? 이게 말이 되냐!?”
“말 돼. 겁쟁이.”
“내, 내가 겁쟁이인 게 아니라 네가 문제인 거지! 야, 타이니! 얘기 좀 들어 봐! 얘가……!”
“얘. 진짜, 겁…….”
아르곤의 간절한 시선이 타이니를 향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던 루나도 함께 고개를 돌리는데.
“어?”
“어라?”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왜인지 서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타이니와 에스티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어색하게 각각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표정까지.
“……너네 뭐 했냐?”
멍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내뱉은 아르곤의 물음에 곧바로 에스티나의 서늘한 시선이 쏘아졌다.
“아, 아니. 수호자님한테 반말한 건 아니고, 전 타이니한테 한 말……. 하하, 죄송.”
그렇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아르곤이 ‘설마, 그게 진짜?’라는 말을 다 들리게 꿍얼거리자 에스티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데.
“올케. 우리가, 방해했어?”
어느새 에스티나의 옆에 붙은 루나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루나 양!?”
“에헤헤. 이거, 미안.”
“미안할 일 같은 거 없어요. 절대!”
“진짜?”
“진짜!”
“으음, 알겠어.”
느물거리며 웃는 루나의 모습에, 에스티나는 자신의 변명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그럼 우리, 훈련 더 하고 올게.”
“엥? 또?”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아르곤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마법쟁이, 눈치도 없어.”
“내가? 왜?”
“가자.”
“나, 난 안 한다고! 그러다 진짜 죽는다고!”
“살살할게.”
“야!”
“따라와.”
“……예.”
루나에게 목덜미를 붙들린 아르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끌려 나갈 때.
멀뚱히 그 상황을 바라보던 타이니와 에스티나의 얼굴에 동시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약간의 아쉬움과 후련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피어오르려다 만 불꽃은 여전히 그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정말 엘븐하임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
타이니가 기어코 보탠 그 한마디에 에스티나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럴 수 있어.”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는 더욱 붉어진 얼굴.
이내 그녀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듯 말했다.
“우리,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조금만 더 힘내자.”
“그래. 그래야지.”
두 사람의 미소가 교차하던 날.
밤은 유난히 빨리 깊어졌고, 그로부터 3일의 시간은 더욱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