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오만했다
콰아아아아앙!
반사적으로 전개한 보호막이 복면인의 검격에 형편없이 깨어져 나갔다.
‘칫.’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아르곤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면 눈앞의 복면인을 상대 못 할 리가 없지만.
- 가장 중요한 것은 안 들키는 거야. 뭐, 너희 둘이 함께라면 그거야 쉽겠지만.
‘젠장.’
어쩌면 정체를 완벽히 숨기기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더 단서를 줄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력을 다해 시전해 놓았던 8서클의 은신 마법은 이 와중에도 깨어지지 않았으니.
다시 한번 복면인의 검이 떨어져 내리는 그 짧은 순간, 아르곤은 비행 마법에 일순간 폭발적인 마나를 때려 넣어 후방을 향해 가속했다.
스각.
달빛을 닮은 오러가 간발의 차이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됐다.’
아르곤은 자신이 탈출에 성공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격에 실패한 복면인이 그대로 허공을 밟듯 가속하더니,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따라붙었다.
‘어?’
마법 특유의 패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기괴한 움직임에 아르곤이 눈을 부릅떴다.
이전에도 비슷한 움직임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타이니!?’
저런 게 타이니가 아닌 다른 인간도 가능한 거였던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내 은신 마법을 꿰뚫어 본 거지?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졌지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
[束縛(속박)]
[加速(가속)]
은신 상태에서 그의 검이 허공에 푸른빛 글자를 연달아 그려 내자.
그그그그극.
“흡!?”
이내 생겨난 마나의 사슬이 복면인의 전신을 그대로 옭아맸고, 아르곤의 몸은 더욱 빠르게 허공 위로 사라져 갔다.
더 이상 그를 쫓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하는 복면인
찰나의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아르곤은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자신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방증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젠장. 마도 검술을 써 버렸는데 괜찮을까?’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체를 감추겠다고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들키진 않았을 거야.’
서대륙에서는 마도 검술이 그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동대륙의 문자로 쓰는 마법이 아닌가.
‘이 대륙 사람으로 착각했을 거야. 그래, 분명해.’
이곳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다니는 동안 마도 검술을 쓰지 않으면 될 것이다.
아르곤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이어 갔다.
‘루나는 성공했겠지?’
자신이 이렇게까지 시선을 끌었으니, 루나가 방해받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위안이 되었다. 그녀가 표식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황제가 어디에 숨더라도 찾아내서 압박할 수 있을 테니까.
애초에 황궁에 있다는 오러익시더 셋에 방금 자신을 쫓아왔던 그 복면인을 더하더라도 일행을, 특히 타이니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 자체가 없는 게 최선의 경우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가 연거푸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린 순간.
‘어?’
그는 자신이 숙소와는 완전히 반대쪽으로 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앙.
어디선가 옅은 파공음이 들려온다 싶더니.
- 하!!!
뒤이어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가 귀를 울림과 동시에 옆쪽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흡!?’
반사적으로 획 돌아간 고개.
그러자 저 멀리에서 거대한 황금빛 대검을 든 장년인이 전신에 황금빛 불꽃 같은 오러를 피워 올리며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정면으로 뻗은 검과 함께 장년인의 몸 자체가 거대한 화살이 되어 날아오는 듯한 느낌.
아르곤이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장년인이 그의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읏!’
[保護(보호)]
[護身(호신)]
그에 아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마도 검술을 써서 두 겹의 보호막을 펼쳐 냈고, 그 안에 오러의 보호막까지 만들어 냈다.
3중의 보호막이 거대한 황금빛 인간 화살을 막아서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컥!?”
굉음과 함께 보호막들이 일시에 깨어져 나갔고, 아르곤의 몸이 멀리 튕겨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강력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귓가에 으르렁거리는듯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았다, 쥐새끼.”
황금빛 오러를 뿜어낸 장년인의 목소리.
허공을 밟고 다시 한번 도약한 상대의 몸이 어느새 아르곤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개나 소나 타이니의 기술을 쓴다.
특히 지금 자신을 격추(?)시킨 장년인이 구사한, 마치 몸 전체를 거대한 화살로 만들어 쏘아 내는 듯한 검술의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자신에게 막대한 충격을 준 적에게서 저릿저릿한 위압감마저 느껴지는데.
그 와중에도 아르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은신을 꿰뚫어 보는 걸까?
자신했던 8서클의 은신 마법이 두 사람에게 연이어 쉽게 발각되었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눈앞까지 쇄도해 온 ‘괴물’을 지금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본능적인 판단을 내렸다.
‘거의 타이니급? 아니, 그럴 리가…….’
눈앞까지 다가온 장년인이 손을 뻗는 순간, 아르곤은 거대한 오러의 거미줄이 자신의 전신을 옭아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그그극.
무시무시한 위압감에 장년인의 모습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착시 현상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그 압박감은 정말로 타이니가 살기를 뿜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느껴졌다.
“강기(罡氣)의 흔적을 줄줄 흘리고 다니면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니. 말로만 듣던 요술인가?”
그때, 장년인의 그 말이 아르곤의 정신을 깨웠다.
‘안 돼!’
다행이라면, 적이 이미 자신을 다 잡은 것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것.
[切削(절삭)]
스각.
다시 한번 가까스로 발휘된 마도 검술이 그 오러의 거미줄을 잘라 낸 순간, 지면 근처까지 추락하던 그는 한 번 더 후방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하?”
쾅.
눈썹을 찡그린 장년인이 땅을 박차고 그대로 공간을 단축하듯 다가와 대검을 휘두르는 순간.
‘흡!?’
아르곤은 그 대검이 자신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리는 듯한 착각 속에서 주마등을 보는 듯한 경험을 했다.
한없이 느려진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눈앞까지 다가오는 적의 검.
타이니가 항상 말하던, 하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절대 가속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젠장, 마기아나 동글이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혹시나 정체를 발각당할까 봐 초월무구를 놓고 온 것이 크게 후회가 되었다.
거기다.
‘몸도 느려.’
도무지 상황을 모면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자신보다 더 강하고 빠른 상대가 작정하고 다가와 휘두르는 일검.
마도 검술을 쓰려 해 봐도, 허공에 동대륙의 문자를 그려 낼 시간 따위는 없었다.
- 마법보단 빠르지만 검술보단 느리다.
그동안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마도 검술의 한계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피부 깊숙이 와닿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 더는 피하지 않아. 도망치지 않아.
마도 기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결심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다.
그의 두뇌가 느려진 시간 속에서 맹렬히 움직이며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오늘 밤 직접 경험했던 이국의 술법 중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마법적 매개체 없이 구조만으로 마나의 흐름을 비틀고, 단체 스킬의 힘으로 그 흐름을 가속, 강화하던 요상한 수법들.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마나의 흐름에서 몇 군데를 막아 그 자연스러운 패턴을 흐트러트리는 것만으로도 특수한 효과가 발생한다.’
스스로 겪기 전에는 들어도 믿지 못했을 수법.
그리고 그것은 지금 상황에 대입하기도 쉬웠다.
자신과 적, 두 초인이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이미 주변의 마나가 멋대로 헝클어지고 있었으니까.
‘난 할 수 있어.’
아르곤의 천재적인 두뇌가, 멋대로 흐트러진 마나의 패턴을 읽어 흐름을 분석했다.
아무리 그가 천재라곤 해도 평소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평생 다시 겪을 일이 있을까 싶은 의식의 가속 상태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답을 이끌어 냈다.
무엇보다 강렬한 마나의 흐트러짐을 만들어 내는 적의 대검.
자신은 굳이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이, 그 대검을 중심으로 흐트러진 마나에 의지를 투사해서 패턴을 만들면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의지가 마나를 움직여 일정한 패턴을 형성한 순간.
‘그래, 이거야.’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아르곤식 마도 검술이 발휘되었다.
물론 의지만으로 움직인 마나로는 엄청난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幻覺(환각)]
격돌의 직전에 상대방의 시야와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작은 마법 정도는 구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번쩍!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각.
“흡……!?”
황금빛 불꽃처럼 타오르는 오러를 실은 대검이 아르곤의 코앞을 허망하게 스쳐 지나갈 때.
이번엔 아르곤의 검이 움직였다.
‘이게 진짜 마도 검술.’
직전의 깨달음은 그저 의지만으로 작은 마법을 발현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으니.
그가 검을 휘두르자 변화하는 주변의 마나가 그의 의지를 따라 더욱 빠르게 글자를 그려 냈다.
한 번의 휘두름에 7개의 획이 더해지니, 순식간에 글자가 완성되었다.
[感覺攪亂(감각교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완성된 8서클급 교란 마법이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며 눈앞에 대적을 덮쳤다.
번쩍.
그리고 아르곤은, 한발 늦게 발휘된 오러의 보호막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그대로 후방을 향해 가속했다.
그런데.
“사이한 술수를!!!”
쩌저저적.
적의 몸을 얇게 덮은 채 이글이글 타오르던 황금빛 오러가 그의 마법을 그대로 흘려 냈다.
‘호신강기!? 빌어먹을.’
서진에서 타이니가 베껴 냈다던 오러익시더의 수법.
그 터무니없이 단단한 방어막이, 아르곤이 기껏 얻은 깨달음으로 완성한 마법을 허무하게 튕겨 낸 것이다.
결국 위기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다시금 적이 그의 눈앞으로 쇄도했다.
더구나 이제는 적이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저릿저릿한 살기가 온몸을 엄습해 왔다.
“죽여 주마.”
사나운 인상에 어울리는 막대한 살기와 속도.
아무래도 직전의 충돌에서는 놈이 손속에 여유를 두었던 듯했다.
‘괴물 새끼.’
눈앞의 적이 정말로 타이니와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갖 사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항복할까? 아니, 아냐!’
그랬다가는 다 망친다.
‘그럴 순 없어.’
아르곤은 본능적으로 드는 나약한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리고 투지를 끌어 올렸다.
괴물 같은 적의 무력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들었다.
-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어쩌냐고? 뭐, 그래도 되게 만들어야지.
-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만약 일이 틀어지면 어쩔 거냐니까?
- 그러니까, 되게 만든다고.
- 안 되면 어쩔 거냐니까, 자꾸 뭔 헛소리를…….
- 시끄러! 난 그렇게 살아 왔어.
논리 따위 없는 친구의 막무가내 같던 그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강적에게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고?
그래도.
‘어떻게든 벗어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큰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결심하며 이를 악무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갑자기 어디선가 돌덩이가 날아와 자신에게 쇄도하던 적의 옆구리를 노렸다.
“흡!”
콰콰콰콰콰.
대검으로 그 기습(?)을 흘려 낸 적이 멈칫하는 순간.
- 멍청아, 빨리 튀어! 남남서쪽으로! 그 건물 뒤쪽에 통로가 있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 영파가 아르곤의 머릿속에 전해졌다.
‘타이니?’
설마 녀석이 근처에 와 있나 싶었지만,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물론.
“어딜!!?”
도망치는 아르곤의 뒤로 적이 곧바로 따라붙었지만.
콰콰쾅!
그런 장년인에게, 이글거리는 ‘붉은빛’ 오러를 실은 돌덩이가 연달아 쏟아졌다.
타이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 오러익시더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준의 원거리 공격이라면 근처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미친놈이, 뒷수습을 어찌하려고!?’
먼저 일을 꼬이게 만든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대처는 아르곤에게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의 몸은 타이니의 지시를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콰콰쾅!
- 어떤 놈이……!?
그리고 그렇게 적을 피해 도주하던 아르곤이 마침내 녀석이 말한 통로로 접어든 순간.
드르륵.
‘오러의 흔적은 지우고.’
적이 가르쳐 준 단점.
그는 몸에서 강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고, 다시금 은신 마법을 덧씌웠다.
이제는 더 이상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생겼지만.
‘이건 분명히 의심받는다. 괜한 짓을 한 꼴이 됐어.’
자신과 루나의 능력을 믿고 벌인 일이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으니.
‘오만했다. 나도, 타이니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