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발각
붉은 새의 머리 모양 조각상을 중심으로 붉은 기와가 그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 화려한 지붕.
그 아래, 황제가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공간은 생각보다 더 경계가 삼엄했다.
웬만한 왕국의 왕궁만 한 거대한 3층 전각이 황제의 9개나 되는 침전(寢殿) 중 하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그 외곽을 빼곡하게 둘러싼 인의 장막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사람 수 봐라. 마법 대신 인간으로 때우는 꼴이라니, 역시 마법이…….]
[시끄러워. 그런 건 속으로.]
[……알았어.]
아르곤이 나름대로 장기라 할 수 있는 마법에 대해 어필을 해 보려는데, 루나가 칼같이 말을 끊어 버렸다.
칫.
아르곤은 금세 시무룩해졌지만, 그러면서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두둥실.
비행 마법으로 낮게 떠오른 그의 몸이 경계 중인 무사들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데.
무사들은 그 순간에도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무려 8서클에 이른 은신 마법의 효능.
루나에게 금방 들키고 말았을 때 떨어졌던 자신감이 다시금 차올랐다.
[창문은 티가 나. 입구로.]
[알아.]
그녀가 말한 전각의 입구 쪽에는 경계가 더욱 집중되어 있었지만, 아르곤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희한한 광경을 발견했다.
“충!”
“근무 중 이상 무!”
“쉬어.”
침전의 입구에서 무사들을 지휘하는 자.
그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했던 것이다.
[호오, 오러유저가 밤에 경계 근무를?]
[선 제국에만, 오러유저가 30명. 그중 황궁 소속이 20명.]
[알아. 나도 듣긴 했는데…….]
감탄이 나오는 무력 수준.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마법 자원이 전무한 데 비해 유독 뛰어난 무사들의 수준을, 새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황제의 침전이라고는 하나, 오러유저가 경계 근무를 설 정도라니.
[심각한 인력 낭비라고 이거. 역시 마법이…….]
[시끄러워.]
……얘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차갑지.
또 한 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르곤은 이내 감정을 털어 냈다. 그리고 서슴없이 그 오러유저의 머리 위를 넘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엔, 내려서지 마. 함정 있을 수도.]
동시에, 루나가 전성으로 경고를 전해 왔다.
‘마법 함정은 없을 텐데…….’
그에 아르곤이 마음속으로 투덜대는데.
[마법 없어도, 기계식 함정 가능. 소란 피우면, 안 돼.]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지적하는 루나의 말에 뜨끔한 그는 얌전히 비행을 유지했다.
[……알았어.]
결계조차 없는 동대륙의 황궁에서 비행 마법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 리는 없었으니.
그는 그렇게 허공을 떠다니며 건물 내부를 살폈다.
분명 목조 건물이건만, 대리석 궁전 이상의 견고함이 느껴졌다.
‘이게 그 철목(鐵木)이라는 건가? 황제가 머무는 궁전이라 이거지?’
강철만큼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동대륙 북부 어딘가의 특산물이라는 나무.
금보다도 비싸다는 그 나무가 이 건물에 통째로 쓰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새삼 선 제국의 부(富)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라?’
건물 안에서 무언가 생소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루나의 전언이 들려왔다.
[여기, 이상해.]
[그래.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네.]
분명히 마법적 결계는 없는데, 마나가 기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법, 아냐?]
[그건 아니지만, 분명 무슨 술수가 있는데……. 주술인가? 아니, 아니야. 달라.]
오크족이나 수인족이 별도로 발전시킨 마법 체계인 주술과도 다른 느낌.
[잠시만…….]
[우리, 시간 없어.]
[잠깐이면 돼.]
아르곤은 재빨리 마나의 흐름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것이 건물 내부의 구조물이 만들어 내는 마나의 비틀림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뒤이어 탐지 마법까지 동원해 본 결과, 그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마나의 비틀림 현상에는, 침입자를 엉뚱한 길로 유도하고 얕은 환각을 일으키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힘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아티팩트나 마법적 재료 없이? 하물며 통제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저 구조만으로?’
순간 호기심에 동해서 그 구조를 좀 더 알아보고 싶었는데.
[어디?]
루나의 재촉이 이어졌다.
[……아, 알았어.]
탐구욕은 잠시 접어 둔 채, 아르곤은 할 일에 집중했다.
‘자. 어디 있냐, 황제.’
다시 은밀히 전개된 탐지 마법이 전각 내부에 있는 모든 인간의 기척을 읽어 들였다.
그런데.
[……뭐야?]
[왜?]
[이 안에는 순찰과 경비만 있어. 다른 기척은 없는데?]
[…….]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탐지 마법을 피하려면 너 정도 은신술 실력이나 타이니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마나 장악력이 있어야 해. 설마 황제가 그 정도 강자라고?]
[그런 얘기, 못 들었어.]
[그럼?]
한순간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방을 다 뒤져 볼…….]
아르곤의 마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흔들리려던 순간.
[아! 9개!]
[뭐?]
[황제가 암살 위협을 피하려고 9개의 전각을 옮겨 다니면서 잔다며? 그런데 그중 한 곳만 철저히 경비하면 티 나잖아. 옮기는 의미도 없고.]
[아…….]
자신들이 침투한 이 화려한 건물이, 오러유저까지 포함된 수많은 경비 인력이 전부 위장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오러유저까지 동원된 블러핑, 너무 과해.]
[그래도 그럴 확률이 높아.]
[……인정.]
워낙 무력 분야에 편중된 동대륙의 인재 특성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들은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나머지 8군데, 빨리 찾아야 해.]
그리고 그들이 진짜 황제가 있는 건물을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2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아르곤의 탐지 마법에 바로 반응이 왔다.
[침전 가운데에 있는 방에 한 명, 그리고 그 주위에 9명 더. 호위로 추정.]
비로소 황제가 있는 곳을 제대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조심해. 결계는 아니지만, 비슷.]
루나의 말대로, 건물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무언가 이상했다.
우우우웅.
다른 건물들에서 봤던 마나의 비틀림 현상이, 이곳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9명의 호위가 마나의 비틀림을 인위적으로 강화시켜서 결계와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어. 마법사도 아닌 이들이 말야. 허, 진짜 이거 너무 신기한데? 단체 스킬을 이 ‘구조적 마법’에 맞춰서 발동시킨 건가? 아니면 그 반대……?]
[신경 꺼. 집중!]
[……그래.]
루나의 타박에 아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탐구욕에 빠져들려던 정신을 억지로 다잡았다.
물론 그 지극한 호기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 떠나기 전에 원리는 알아내고 간다.’
그저 잠시 접어 둔 것일 뿐.
[난, 황제한테, 표식 남기고. 넌, 혹시나 모를 꿍꿍이 찾는다.]
[알아.]
아르곤의 대답에는 살짝 회의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그들이 출발했을 무렵, 그러니까 초저녁이 살짝 지났을 무렵이라면 황제나 그 신하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소식에 대해 대책 회의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자정에 가까워진 지금은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자신의 임무는 실패한 듯했는데,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자.]
존재감을 감춘 아르곤의 몸이 다시금 낮게 떠올라, 황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2층의 가운데 방을 향해 유령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의 ‘구조적 마법’과 단체 스킬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마나의 비틀림 현상은 그의 마법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고, 그것은 그림자에 숨은 루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은 순식간에 황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 앞에 도착했다.
방문 앞에는 무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 그들은 그저 눈뜬장님에 불과했다.
[내가 안으로…….]
루나가 굳게 잠긴 문 사이로 그림자 도약을 시도하려던 순간.
[잠깐.]
아르곤이 그런 그녀를 말렸다.
[……왜?]
[뭔가 이상해. 잠깐만 기다려.]
아르곤은 정신을 집중하며 방 내부에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을 살폈다.
문 앞에 와 보니, 예의 그 요상한 술수로 비틀린 건물의 마나 속에서 또 다른 흐름 한 줄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해진 수…… 아마도 10명 이상 방 안에 들어서면 바로 이 결계 같은 스킬의 중심에 있는 자가 그걸 알게 되는 수법이야. 이거…….]
[해제 가능해?]
[잠깐만……. 하, 쉽지 않겠는데?]
[왜?]
[마법진이 아니라 건물 구조가 비틀어 놓은 마나의 흐름을, 안에 인간들이 단체 스킬 비슷한 걸로…….]
[쉽게 설명해.]
[이 안에서 존재감을 숨기려면, 건물 안에 있는 모든 마나를 합친 것 이상의 힘을 동원해야 해.]
[……그게, 어려워?]
루나의 반문은 순수했지만, 또 타당하기도 했다.
마법이란 원래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8서클의 비기너라고 볼 수 있는 아르곤이라면, 그 정도 힘을 동원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안에 오러익시더가 하나 있어. 놈이 이 단체 스킬의 축이야. 지금 내가 그 정도 힘을 동원하면 바로 알아챌 거야.]
[…….]
그 순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동대륙의 오러익시더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들 둘이 함께하는 이상 적수가 될 리 없었다.
차라리 황제를 암살하는 것이 임무였다면 오히려 쉬웠을 것.
하지만 그들이 타이니에게 부탁받은 일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마땅치 않았다.
[은밀하게, 해제할 순 없어?]
[이 수법의 중심에 사람이 있어서 어려워. 놈이 오러유저 수준이었다면 어떻게든 속여 보겠는데.]
[……시간을 충분히 줘도?]
[하루 이상 주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의미 없네.]
[그래.]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림자 속 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아가. 동생이 무리하지, 말랬어.]
[……그래. 어쩔 수 없지.]
괜히 소란을 일으켰다가는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일단 내가 파훼법을 궁리해 볼 테니, 하루 정도만 시간을…….]
아르곤이 눈앞의 현실에 수긍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림자 속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유동이 그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너, 너 뭐 해!?]
[우린, 시간 없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르곤의 머릿속에 타이니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혹시나 선 제국이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게 되면, 황제와 독대하든 협박을 하든 해서라도 제국을 움직일 거다.
실제로 지금 두 사람은, 가능하면 실행에 옮기고 싶지 않은 그 미친 계획의 사전 준비를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사실 아르곤은 처음부터 융통성 있게 대처할 생각이었지만, 자신과 함께 온 동료가 하필 맹목적으로 타이니를 따르는 루나라는 사실을 잠시 간과했던 것이다.
[설마……!]
[잡히지만 않으면 돼. 난 자신 있어. 너 먼저 돌아가.]
[야, 그러다 역효과……!]
스슥.
루나는 그런 그의 전언을 무시하고 그림자 도약을 시전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안 돼!’
아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최대한 마나를 끌어 올려, 주변에 요동치는 마나의 흐름을 비틀었다.
우웅.
이내 그렇게 생긴 작은 틈에 그의 마나가 끼어들며, 이 결계 같은 스킬의 흐름을 오작동시켰다.
동시에 아르곤의 안색 역시 창백해졌다.
‘내가 왜?’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즉시 어처구니없는 답을 내어놓았다.
루나가 위험에 빠지게 놔둘 수는 없다.
그런 황당한 무의식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그리고 그것을 인식한 순간.
그의 눈앞에 검은 수리검 하나가 날아들었다.
쾅!
본능적으로 끌어 올린 오러의 방어막이 그 수리검을 튕겨 내는 순간.
쾅!
아르곤은 X 됐음을 감지하고 그대로 벽을 뚫고 전각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방문 앞에서 경비를 서던 무사들, 서대륙 기준으로 5단계 슈페리어급인 그들의 귀에는 ‘한 번’의 굉음이 들린 짧은 순간.
아르곤은 오러로 수리검을 튕겨 내고는 전각의 벽을 부수고 도주한 것이다.
“이게……!?”
“침입자다……!”
방 밖에서 뒤늦게 비명 같은 고함이 울려 퍼지던 그때.
아르곤의 몸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돼.’
모습을 감춘 채 허공을 날아서 도망치는 자신을 쫓을 수 있는 이는 이 대륙에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침입자, 즉참.”
살벌한 동대륙어와 함께 그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검은 복면인이, 달빛을 반사하는 짧은 검을 휘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