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네가?
우우우웅.
파직.
타이니는 온몸과 장비에 묻은 먼지와 찌든 때를 마나 샤워로 한 번에 털어 낸 뒤, 그대로 침상에 몸을 던졌다.
동시에.
콰득.
힘을 주는 순간 그대로 벗겨져 나가는 장비와 겉옷들.
“쉴 수 있을 때 쉬자.”
꼭 누가 들으라는 듯 소리 내어 중얼거리고는 이불을 덮어쓰자.
우우웅.
이곳 사람들에게 굳이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힘을 억눌러 놓았던 초월무구 아니무스, 바람의 지배자, 녹턴이 그 순간 막대한 기운을 여지없이 뿜어내며 존재감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각 주변에 숨어 있던 이들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쯧.’
서진에서 모용원호를 박살 낸 일은 자신들의 경고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선 제국에 전해져야만 했다.
자연히 무사들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자신에게 따라붙은 호위, 아니 감시들이 유난히 많은 것은 예상했던 일.
즉, 지금의 행동은 자신이 부탁한 임무를 수행 중인 아르곤과 루나에게서 감시의 눈을 돌리기 위한 일종의 미끼였다.
다만 타이니는, 그들만 믿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잘하고 있지, 월랑?’
- 멍!
영혼의 반려가 전해 오는 대답을 들으며 타이니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뭐, 일단 지금은 시선을 잡아 두는 데에 집중해야겠지.’
대륙 10대 고수, 제국 황실 3대 고수 중 우장군이라는 거창한 이명을 가진 오러익시더 양원일조차 하급 아티팩트를 소지한 게 전부인 동대륙이라면.
‘초월무구를 보고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지.’
물론 명색이 제국이라는 것들이 대놓고 남의 것을 훔치려 할 리는 없을 것이다.
타이니는 그저 재앙을 간신히 이겨 냈다는 서대륙의 기사가 이만한 보물을 가졌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경고에 조금 더 힘이 실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감시자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진 순간, 타이니는 기감을 더욱 확장시켜 그들의 동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스으으.
그의 의식이 육체를 넘어 끝없이 펼쳐지며 근방 수백 미터를 아우르는 감각권을 형성했다.
‘여기서 더…….’
뒤이어 자연스레 펼쳐진 영역, 에너지 필드가 그 기세에 호응하며 감각권을 단숨에 3배 이상 확장했다.
그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니, 범위 내의 모든 것이 마치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보물, 극상의 마법 무구다.]
[혹시, 저게 말로만 듣던…….]
[보고해.]
[내가 간다.]
감시자들끼리 주고받는 전성까지도 또렷이 들려왔다.
온전히 감각에만 집중해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오랜만이지만,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실력이 얼마나 향샹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어서 스스로 감탄하던 것도 잠시.
이내 그는 그림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수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호오?’
주위에 부는 바람을 억지로 잡아챈 뒤 소리를 실어 보내는 자신의 전성보다 훨씬 깔끔하고 안정적인 목소리 전달법.
네 명의 감시자 중 하나가 전각을 이탈해 황궁의 중심부를 향해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 그 순간.
[저건 대체……]
[서방에 마법 도구가 많다더니…….]
[요술쟁이들이……]
타이니는 감시자들의 그 목소리 전달법을 참고해서 자신의 투박한 수법을 가다듬었다.
바람이 아니라 마나 자체에 소리를 실어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나에 노랫가락 같은 패턴을 덧씌우면 목소리를 바람보다 빠르게, 그리고 보다 적은 힘으로 더욱 멀리 보낼 수 있다라……. 전성(傳聲)이라기보다는 전음(傳音)이 맞는 말이겠어. 재밌네.’
지금처럼 감각권을 극대화한 상태에서 이 수법을 쓰면, 수 킬로미터 밖의 상대에게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이 패턴은 영파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감각을 배제하고 영혼의 존재감에만 집중하면, 그 몇 배 이상 먼 거리에 뜻을 전달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나도 하급 통신용 수정구 정도 역할은 할 수 있겠어. 아니, 잠깐만. 지금 난 차원 장벽도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는데, 그럼……’
문득 떠오른 그 발상에 생각이 처음 의도와는 상관없는 쪽으로 더욱 깊어져 가고.
우우웅.
자연스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노을빛 기세가 이불 안에서 은밀하게 퍼져 나가며 사방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새로운 수법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기술의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오다 못해, 영격마저 드높이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었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이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가고 있다는 것을, 그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우웅.
‘이건, 또 의외야.’
정신이 더욱 고양된 타이니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에너지 필드의 범위와 격이 훨씬 더 넓고 깊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9단계, 오러마스터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서진에서 들었던 도가의 상선약수(上善若水)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도, 스스로 떠올린 실용적인 수법 하나에서 격을 올릴 단서를 찾은 것이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 이제 딱 한 걸음 남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잡았다.
그 생각이 들자 다시금 영혼이 고양되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마저도 얼추 알 것 같았으니까.
동대륙에 와서 접한 호신강기(護身罡氣).
영역과 오러를 결집시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자체를 외부와 격리하는 수법.
‘그 수법을 내 몸이 아니라…….’
생각이 점차 깊어지려는 찰나.
우우웅.
고양되며 상승하는 듯하던 영혼이 갑자기 떨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영혼이 흔들리며 그 고양 상태가 깨어져 나갔다.
“읏!?”
자는 척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를 내고 만 그는 이내 눈을 뜨며 탄식했다.
“이런…….”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깊은 아쉬움과 함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 잠깐의 고양 상태로 인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 왔던 육체와 영혼의 피로가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는 것은 이 순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영혼의 격이 오르며 찬란한 영성을 획득하려던 순간에 방해를 받았다.
그리고 그 방해꾼의 정체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너냐?’
우웅.
그의 영혼 근저에 자리 잡은 운명의 파편.
전생의 실력을 되찾은 이후, 영격을 올리는 받침대가 되어 오러익시더 너머의 경지를 엿보게 해 준 고마운 존재.
그런데 정작 자신이 벽을 뛰어넘으려던 순간에, 그 받침대가 발아래에서 비켜나 버린 것이다.
‘왜지?! 대답해!!’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려 하던 운명의 파편.
하지만 이미 크롬벨의 경고를 마음 깊이 받아들인 타이니는 그 속삭임을 아예 봉인하듯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운명의 파편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고, 반대로 운명의 파편은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답해!!!’
마치 빗장을 걸어 잠근 거대한 성문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운명의 파편에게 귀를 기울여 봐도, 더는 속삭임 같은 것이 들리지 않았다.
“대답하라고!!”
- 고고고고고!
자신도 모르게 쩌렁쩌렁하게 퍼져 나온 고함.
우르르르릉.
쨍그랑.
그에 방 안이 진동하는 순간, 온갖 물건들이 깨어져 나가며 난장판이 벌어졌다.
당연히.
- 무슨 일……!
- 귀빈 숙소다!!
우당탕탕.
전각 밖에서 요란한 목소리들과 함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타이니의 정신을 일깨웠다.
“하…….”
쯧.
생각해 보면, 애초에 너머의 경지를 보게 해 준 것도 이 운명의 파편이다.
당장 기분은 나쁘지만.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어.’
이제 와서 줬던 것을 빼앗아 간다 한들 원망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고, 덕분에 성장한 자신의 영혼은 이미 갈 길을 찾았으니까.
크롬벨의 말과는 다르게, 운명의 파편의 도움 없이도 신성에 이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파편에 대한 크롬벨의 의심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이젠 명백해졌다.
‘네가 수상하다는 사실은 이것으로 확실히 알았다. 더 떠들지 않으려거든, 영원히 닥치고 있어라.’
영혼의 저편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향해 경고를 보내 보지만, 굳게 잠긴 빗장은 미동도 없었다.
그 순간.
쾅!
“무슨 일이십니까!?”
“귀빈을 지켜……!”
“어라?”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호위 무사들이 방 안을 훑어보다, 의외로 멀쩡한 타이니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슴다. 악몽을 꿔서…….”
타이니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그러자 황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호위 기사들.
이내 그들이 속옷만 입은 채 황당한 짓을 저지른 귀빈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그가 벗어 놓은 장비들, 정확히는 초월무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우우웅.
이제는 타이니의 오러에 완전히 길들여져 스스로 노을빛을 뿜어내는 초월무구들.
무사들은 그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만 나가 주시겠슴까? 내일을 위해서 저도 좀 자야 할 것 같아서요. 정리는 필요 없습니다.”
“아!”
“예.”
“예…….”
대답은 빠르게 나왔지만, 호위 무사들은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황궁에서 근무하는 엘리트들인 그들도 평생 본 적 없는 스스로 빛을 내는 무구들.
그것들은 눈이 박힌 이라면 누구나 홀릴 만한 보물이었으니까.
‘흐…….’
그러나.
콰드득.
우우웅.
탁.
타이니의 손짓에 따라 움직인 마나가 쓰러진 책장을 바로 세우고,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한곳으로 치우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동시에 정리하는 순간.
무사들의 시선은 다시 타이니에게로 향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미친……! 흡!”
“와악!”
무사들 사이에서 비명도 모자라 욕설까지 튀어나왔지만, 저지른 짓이 있는 타이니는 그들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듣는 단어에 호기심을 보일 뿐.
“허공섭물? 이게요?”
“예. 저, 절대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대해제일검을 이기셨다는 게 사실이군요.”
“어떻게 서양 오랑캐가…….”
마지막 한 놈의 말은 못 들은 체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이런 잡기술이 절대고수의 상징? 이 정도는 훨씬 약할 때도 가능했는데?’
이곳의 기준이 서대륙과는 여러모로 다르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무심결에 저지른 일 덕분에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초월무구들을 충분히 어필한 것 같으니.
‘아르곤과 루나만 잘해 주면 준비는 완벽하다.’
본의 아니게 하룻밤 휴식을 갖게 되었지만, 그 시간마저 쪼개서 써야 하는 것이 지금 일행의 상황이었다.
물론, 비행하느라 무리한 에스티나에게는 처음부터 휴식이 필요했기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내일 선 제국이 경고를 믿지 않고 움직이지 않거나 대응이 늦어지면…….’
직접 황제를 만나 담판을 짓는다.
그것이 설령.
‘협박이 되더라도 말이야.’
아르곤과 루나에게 부탁한 일도 그걸 위한 것이었으니, 이미 각오는 굳혔다.
내일이 오면 이제 강림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7일.
사실 그는 동대륙으로 오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부터, 강림을 초장부터 막아 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선 제국을 비롯한 내륙의 나라들을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길 바랐을 뿐.
그리고 가능하면 동대륙의 힘을 모아 3군단 중 하나라도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니.
“부탁한다.”
“예?”
“아니, 서대륙 말임다. 가 보셔도 됨다.”
“아, 예. 그럼…….”
그 말에 호위 무사들은 공손히 돌아서면서도 초월무구들과 타이니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방문이 닫히기도 전에.
- 멍!
타이니는 월랑이 보내는 신호를 느끼며 녀석에게 정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