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59화 (359/500)

359화. 마법쟁이, 대단해

동대륙의 패자, 선(鮮) 제국.

선(鮮)이라는 단어는 ‘깨끗하다’, ‘뚜렷하다’, ‘곱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나라 이름으로 삼기에는 어딘가 나약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일행이 시종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눈에 담은 3, 4층짜리 목조 건물의 지붕에 놓인 붉은 기와나, 이곳의 대표적인 복식이라는 저고리라는 옷차림도.

“곱다…….”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상을 흘릴 만한 아름다움이 물씬 느껴졌다.

왜 이 나라에 선(鮮)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것 같은 깔끔하고 밝은 색상과 유려한 곡선들.

생전 처음 보는 그 특이한 문화 양식이, 서대륙의 암살자로 길러진 그녀에게도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때려 부수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기사는, 건물의 외양이나 시종들의 복식보다는 무사들의 갑옷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럴 만하긴 해.’

붉은 새 무늬를 새긴 황궁 무사들의 갑옷은 분명 서대륙의 양식과는 크게 달라 보였으니까.

황금색이 많이 섞였을수록 지위가 높다는 것은 여기서도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근본적으로 갑옷의 형태 자체가 달랐다.

서대륙에서 주로 입는 일체형의 판금 갑옷과는 달리, 물고기 비늘 같은 자잘한 쇠붙이를 가죽 위에 몇 겹으로 덧대어 붙여 만든 듯한 갑옷은 그녀도 그 효용성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저기에 마법 부여를 하려면 쇠붙이마다 일일이…… 아, 여기엔 룬 장인도 없다 그랬지.’

물론 이곳에선 오러익시더로 추정되는 무사가 하급 아티팩트 수준의 검을 가지고 있을 정도니, 무구에 마법적 효과를 부여한다는 건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루나가 그렇게 원치 않던 여유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감상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앞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보니, 타이니와 오러익시더급 동방 무사가 서로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이는 듯한 광경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거였는데, 옆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 이후로는 같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데? 이 동네, 제정신이 아니네. 하…….”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아르곤의 목소리.

“……너, 동대륙어 알아?”

분명히 글자밖에 모른다고 들었는데?

“아, 여러 사람이 길게 토론하는 걸 듣다 보니 대강 알겠더라고. 타이니가 기본 회화를 가르쳐 준 것도 도움이 됐고.”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설마 그 토론이란 게, 서진이라는 그 섬나라 왕궁에서의 일을 말하는 건가?

‘고작 하루 머물렀는데?’

아니, 정확히는 하루도 안 채우고 이곳으로 날아온 참이었다.

“……그게, 가능한 거야?”

그녀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아르곤이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언어에는 규칙성이라는 게 있어. 처음에는 어순이 내가 알던 거랑 달라서 조금 헷갈렸는데, 그걸 이해하고 나니까 얼추 알아듣겠더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아르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동대륙의 말을 익혔다는 사실.

눈앞의 이 어벙한 청년이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루나는, 자신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표현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마법쟁이, 대단해.”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 순간 아르곤이 흠칫하더니,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법쟁이 아니고 아, 르, 곤! 이름 좀 제대로 불러 줘!”

“타이니보다, 똑똑해. 대단.”

“야이씨, 그건 욕……!”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울컥하던 아르곤이 순간 가늘어지는 루나의 눈을 보고는 급격히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쟤 욕한 거 아니야. 진짜 아냐. 그냥 내가 비, 비교당하는 걸 싫어해서. 하. 하. 하.”

“……그럼 미안.”

“뭐?”

아르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루나가 입을 삐죽이며 다시 말했다.

“미안하다고, 했어.”

마음에 내키진 않았지만, 그녀는 확실히 대단한 능력을 지닌 동료와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껏 큰맘 먹고 사과를 한 건데, 아르곤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 허, 허허. 그, 그래.”

왜인지 더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더욱 붉히며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철썩 소리가 나도록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미친놈, 미친놈’ 하고 중얼거리기까지.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아. 하. 하. 저기, 타이니가 싸움 나기 전에, 말리고, 올게.”

“응?”

그러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부리나케 타이니에게 달려가 버렸다.

어째 아르곤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어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건 또…… 재밌네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올케? 뭐가 재밌어?”

자신보다 한 뼘은 큰 에스티나를 얼핏 돌아보는데.

여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에스티나가 빙긋 웃으며 또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아니에요. 루나 양도 천천히 알아가는 게 좋을 테니까요.”

“뭐가?”

“그런 게 있어요.”

빙긋 웃으며 자신의 한쪽 볼을 잡아당기는 에스티나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뭥야. 왜 말 안 해 줭? 왜 볼 땡겨?”

“지금 알면 재미없어요.”

“뭥야…….”

서운했지만, 루나는 에스티나를 믿기에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묘한 시선을 받으며, 아르곤이 타이니와 양일원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 *

남녀가 유별하니, 각자 다른 전각에서 따로 머물러 달라.

일행을 갈라놓고자 하는 속셈이 대놓고 보이는 양일원의 말에 타이니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 항의하다가 말다툼까지 벌어지던 그때, 갑자기 아르곤이 끼어들었다.

“워, 워. 싸우지 마시죠. 우리는 인류 모두를 위해 온 겁니다.”

얼핏 듣기에도 정확한 발음으로 동대륙어를 구사하면서 말이다.

“너, 어떻게 말을?”

“잘.”

놀라서 묻자 자신이 자주 하던 말이 답으로 돌아왔다.

순간 울컥했지만, 그것을 자각한 뒤에는 잠시간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 이게 사람 빡치게 하는 대답이었구나.’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왜인지 상기된 얼굴의 아르곤이 양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굳이 저희를 견제하는 이유가 뭡니까?”

“……견제가 아니라 귀빈 대우를 하는 거요. 싫다면 그냥 돌아가면 되고.”

직설적인 물음에 양일원은 고집스러운 말로 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걸 보니, 아마 그 또한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자연히 이쪽 다혈질의 성미를 건드렸다.

“그냥 돌아가라?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타이니, 그만해. 나눠 놓는다고 해서 우리한테 무슨 일 있겠어?”

발끈한 것도 잠시, 이내 아르곤이 태연한 태도로 말리자 타이니는 가볍게 혀를 차며 물러섰다.

그러자 다시 아르곤이 나섰다.

“그 말대로 하지요. 하지만 내일 열린다는 그 회의에는 우리도 참석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가능하겠지요?”

“당신이 우리 말을 더 잘하는군. 뭐, 그렇소이다.”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마저 안내를 부탁드리지요.”

그에 양일원이 예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그대로 묵묵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정말 느긋하군. 짜증이 날 정도로.”

자기들 땅에 재앙이 벌어지는데, 정작 급한 것은 우리뿐이라니.

타이니는 속이 타는 기분이었지만,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치미는 울화를 달래 가며 무사들을 따라 걷는데, 다시금 아르곤이 끼어들었다.

“참아. 내일이면 결판이 나겠지.”

“결판이 안 날 경우도 생각해야지.”

“안 나면 어쩔 건데.”

“나게 해야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웅.

타이니가 결심하는 순간 주변의 대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앞서 걷던 개천 뭐시기라는 무사가 그를 힐끔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찔끔한 아르곤이 바로 시야를 가로막았다.

“흠, 흠. 야, 인류(Mankind)가 여기 말로 뭐냐?”

억지로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상황을 이해한 타이니는 바로 대답해 주었다.

“인류(人類).”

다만, 대답해 주고 보니 새삼 황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동대륙어를 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글자를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거하곤 얘기가 좀 다르다.

서대륙과 달리 동대륙은 글자 하나하나가 고유의 뜻을 가지니.

- 심지어 글을 쓸 때는 또 말할 때와 어순이 달라예. 우리도 왜 그렇게 쓰는지 몰릅니더. 조상들이 그리 써 왔으니 그저 따를 뿐이지예.

전생에 자신에게 동대륙어를 가르쳐 줬던 상인 중 한 명에게 들은 말은 아직도 기억이 났다.

당시의 자신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으니까.

“너…….”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말할 때의 어순이 내가 알던, 그니까 글로 적을 때의 어순과 달라. 너 이거 왜 이런지 알아?”

“……아니.”

“그래? 쯧, 기대도 안 했다.”

그걸 벌써 알았다고?

무서운 새끼.

‘내가 동대륙어 익히는 데 몇 년 걸렸더라?’

타이니는 천벌의 기사였던 자신이 괴력의 기사로 불리기 시작했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솔직히 티는 안 냈지만, 자랑스러워했던 이명이 이상한 이명으로 바뀌어 매도당했을 때는 심적인 충격이 컸다.

타란으로 도망친 귀족들을 쫓거나 자신이 수배당해 쫓기는 일에도 서서히 지쳐 가고 있을 때.

이미 망해 버린 카룬에서 도시 연합으로 흘러들어 온 동대륙 상인들을 붙잡고 그쪽은 살 만하냐고 물었던 것이 시작이었던 듯했다.

어쩌면 자신의 조상이 그쪽 출신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그 근교에서만 2년 정도 구르면서 동대륙 말을 익혔던 것 같은데.

- 당신 같은 돌머리들한테도 장점이 있슴다. 한번 힘들게 새겨 놓으면 잘 안 잊거든요.

- ……죽고 싶나?

참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그나마 그렇게 익힌 말도 여기 와서는 비웃음을 샀다.

‘그 새끼들이 쓰는 말이 사투리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우리가 동대륙에 온 지 며칠 됐지?”

“이틀.”

……X발 새끼.

한동안 이놈과 말을 섞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타이니는 아르곤에게서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왜 그래? 갑자기 왜 삐졌어?”

“……안 삐졌다.”

“삐진 거 같은데?”

“진짜 삐져 줘?”

우드득.

“……아니.”

위협하듯 주먹에서 뼈 소리를 내며 돌아본 뒤에야 아르곤의 주둥이가 닫혔다.

역시 이놈과는 폭력의 대화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냥 얌전히 시간만 보낼 생각은 아니지?]

갑자기 아르곤의 전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마 메시지 마법을 쓰는 듯했는데, 바람을 억지로 잡아서 소리를 실어 보내는 자신의 전성보다 훨씬 깔끔한 목소리였다.

‘멀쩡히 말 잘하다가 왜?’

의아해하며 입을 열려던 찰나.

[여기에 서대륙어 할 줄 아는 사람이 몇 있어. 우리가 대화할 때마다 미세하게 반응을 보이더라.]

연달아 들린 목소리에 타이니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작을 부릴 속셈인가?]

[글쎄. 뭐, 그냥 우리가 동대륙어를 하니까 안 나서는 걸 수도 있고.]

[찜찜하군.]

[사실, 나도 그래.]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응?]

그들이 겉으로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몰래 대화를 이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앞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저들이 서대륙의 사절이다. 신수의 주인이니 정중히 모시도록.”

양원일이 그들 중 황궁의 관리로 보이는 이에게 명령을 전하며 타이니 일행을 가리키자.

“예, 장군.”

일단의 무리는 일행을 안내하던 무사와 시종들 사이에 섞여 두 패로 나뉘었다.

그중 한 무리는 타이니와 아르곤에게 붙었고, 다른 한 무리는 에스티나와 루나를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들에게 앞선 대화 내용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아르곤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머물 숙소를 나눠서 준비했대. 그래서 내일 아침까지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아. 대신 우리 한 명당 전각, 그러니까 저 건물 같은 걸 통째로 하나씩 배정했다던데.”

소식을 전해 들은 여자들이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혹시, 우리 나눠 놓을, 수작?”

“그런 거 같아요, 루나 양.”

일행의 얼굴에 동시에 쓴웃음이 맺혔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뭐, 상관없지?”

“그럼.”

“물론.”

“당연하지.”

타이니의 그 물음에는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이 대륙엔 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각자가 두려울 것 없는 강자인 일행이 고작 그런 걸로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만, 한시가 급한 마당에 이들이 시키는 대로 숙소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하니.

[루나, 여기 조사 좀 해 줘. 최소한 황제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해. 그 황제한테 ‘표식’ 심어 놓으면 가능하지?]

그 순간 루나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지만, 그것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타이니만이 알 수 있었다.

[가능하긴 한데…….]

[피곤하겠지만 부탁할게.]

[알았어. 근데 나 동대륙어 모르는데?]

[아르곤이 함께할 거야. 녀석도 은신 마법이 제법이니까, 마법 결계도 없는 이곳에선 확실히 도움이 될 거야. 누나가 보조해 줘.]

이내 루나의 눈이 아르곤을 스쳤고, 그녀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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