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납득시키다
“……믿기로 했네.”
대전의 옥좌에 앉은 왕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타이니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 가며 무력시위를 했는데, 마지못해 믿어 준다는 듯한 말투라니.
거기다 그 뒤로 이어진 발언도 황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본국에서 당장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뿐이네.”
다행히 왕국마다 중요 요처에 통신구를 놓는 것은 동대륙에서도 필수라 연락이 어렵진 않을 것이라는 뒷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직접 돕지는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가까스로 화를 참은 타이니가 억지로 말투를 교정해 정중하게 물어보는데.
“자네들이 말한 강림의 위치가 공교롭게도 선 제국과 다른 나라들의 국경에 겹쳐 있으니, 일이 어찌 진행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네.”
그에게 몇 시간을 시달린 끝에 백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진 모용원호가, 힘겨운 목소리로 왕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솔직히 이 평화의 시대에 갑자기 전설에도 없었던 재앙이 벌어진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을까.”
까드득.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레 이가 갈렸다.
[진정해. 예상했던 일이잖아.]
그러자 통역을 통해 실시간으로 대화 내용을 전달 받고 있는 에스티나의 전성이 그를 달랬고.
“동생, 참아.”
루나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타이니는 그제야 자신을 부담스럽게 바라보는 왕과 모용원호, 그리고 대전에 모인 서진 관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트러블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모용원호의 말이 틀리지 않기도 했다.
이제 고작 8일밖에 남지 않았다.
후우.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럼 저희는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호오? 하룻밤 쉬지도 않고서?”
놀란 듯한 왕의 어조가 다시금 그의 인내심을 자극했다.
‘빌어먹을.’
강림의 날짜까지 말해 줬는데 태평하게 하룻밤 쉼을 운운한다. 서로가 느끼는 위기의식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타이니는 간신히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서는 할 말을 골랐다.
“……동대륙의 중심에 선 제국에 있다 들었습니다. 그곳 황궁에 연락을 넣어 주십시오.”
“선 제국에?”
“사이가 좋지 않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왕의 눈빛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심각한 일입니다.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
“흠. 그리 생각하는가.”
“생각이 아니라……!”
“타이니.”
다시금 흥분하려는 순간 말리듯 그의 어깨를 잡는 일행의 손.
그에 타이니는 입술을 깨물며 울화를 달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왕을 향해, 경고하듯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들은 동대륙을 점령하고 완전히 마계화시킨 다음에 서대륙으로 진출하려 할 겁니다. 그때는 이곳 서진이 교두보가 되겠지요.”
“교두보라? 허…….”
“타국과 힘을 합쳐서 마계 대군에 선제 타격을 하시건, 후에 강성해진 그들을 서진 혼자 막아 낼 궁리를 하시건…….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일국의 왕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무례한, 다분히 감정 섞인 말.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준 타이니의 말이었기에, 대전에 있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흥! 어떤 괴물들이라도, 바다 위에서는 우리 서진의 군대를 이길 수 없다! 네놈의 걱정은 쓸데없는……!”
“사량! 닥치거라!!”
카일룸을 타고 왕성에 날아내렸을 때부터 일행과 악연을 맺은 이 나라의 1왕자, 진사량은 왕의 일갈에 단숨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백대 고수 중 하나이자 왕실의 적장자라고 해도 여태껏 쌓아 온 악업이 많았으니.
그는 공개적인 망신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싸늘한 눈으로 진사량을 바라보던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충언, 명심하도록 하지. 하지만 상황상 본국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이야. 이 대륙의 전황과 남은 시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나?”
마치 타이니에게 의견을 구하는 듯한 말.
적어도 자신의 무력시위가 어느 정도는 먹힌 듯한 모습에 타이니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칠죄종이 강림하면 오러익…… 아니, 혼세? 아무튼 저기 저분 수준의 강자들이 아니면 아예 놈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영역의 힘이 있거나 초월무구의 수호를 받는 초인……경의 고수 정도만이 그 괴물들과 싸울 수 있슴……니다.”
“눈에 띄면 안 된다?”
“칠죄종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죽을 겁니다. 격하의 상대를 자원 소모도 없이 단숨에 죽이는 힘. 저는 그것을 영혼살(靈魂殺)의 권능이라 이름 붙였슴……니다.”
간신히 말투까지 고쳐 가며 완벽하게 의사 전달에 성공했는데.
“개소리!!”
망나니가 다시 한번 끼어들어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보는 것만으로 죽는다고!? 아바마마, 저런 미친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 주실 생각……!”
“닥치라고 했다! 사량!!”
노쇠한 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대전을 울리는 순간 타이니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고, 대신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마냥 유순해 보이던 왕에게 겉보기와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보기만 해도 죽는다? 그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그 괴물들이 의도하는 순간 죽는다는 뜻이지요. 보통의 병사들은 그놈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 뒤, 강자들만 남아서 상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칠죄종은 휘하의 군단이 강림한 뒤로 343일이 지나거나 일곱 장군들이 모두 죽었을 때 나타납니다. 혹은 군단의 정예들이 힘을 모아 소환할 수도 있습니다. 전해드린 봉서에 각각의 경우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을 겁니다.”
타이니가 왕의 말을 자르고 먼저 대답하자 1왕자 진사량이 살벌한 눈길을 보냈지만.
‘이 새끼가?’
타이니가 그를 노려보며 직접 기세를 쏘아 낸 순간.
“흐악!?”
우당탕탕.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 꼴사납게 주저앉고 말았다.
명색이 오러유저인 진사량이었지만, 이미 타이니에게 호되게 혼이 나서 왼쪽 발목을 다친 상태였기에 그 기세를 맞는 것만으로도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왕자 저하, 체통을…….”
“시, 시끄러워!”
영문을 모르는 내시만이 왕자를 부축하며 거들었지만,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타이니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보여 준 절대적인 무력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왕 또한 자기 아들의 추태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마계의 군단은 군대로 막아야 하는데, 정작 그 정점에 있는 칠죄종이라는 것들은 군대로 막을 수 없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에 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씩이나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해 가는 것 같은 그 모습이 타이니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그 초월무구라는 것들을 지원해 주는 것은…….”
“어렵, 아니 불가능합니다. 초월무구는 스스로 주인을 고르니까요.”
그 말에 왕과 모용원호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초월무구는커녕 일반적인 아티팩트도 매우 희귀한 동대륙에서 타이니의 저 말은, 정말 대륙 10대 고수가 다 모여서 그 군단장이라는 것들을 잡아야 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다른 대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선 제국 황실에도 전보를 보내고…….”
“검선 어르신을 찾아야겠군요.”
“그래야겠군. 하지만 아무리 그분이라도 가능하실지…….”
“검선?”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었던 이름인지라 타이니 역시 호기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앞서 그에게 그 이름을 말해 주었던 모용원호가 대답해 주었는데.
“지금 동대륙 10대 고수 중에서 제일 강한…… 아니, 백 년 전부터 천하제일 고수이시네.”
그가 말한 세월의 단위가 어딘가 이상했다.
“백 년 전부터요? 백 년?”
“그렇네. 당시에도 그분은 거의 백수에 이르셨으니, 현재는 200세쯤 되지 않을까 싶네.”
“200세요!?”
“그렇네.”
“허…….”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에스티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가리키며 모용원호에게 물었다.
“혹시 그분이 저기 제 일행과 같은…….”
“아닐세. 순수한 인간이시지.”
그 대답에 타이니의 입이 벌어지는 가운데, 통역을 전해 들은 에스티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렇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신화 속에 나오는 오러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할 거야. 아, 그 갓 핸드 경 같은 경우는 예외로 두고.”
그 말에 타이니는 다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동대륙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주 큰 희망이 생긴다.
자연스레 그 기대감을 담은 시선이 다시 모용원호에게 향했다.
“설마 그분이 당신보다 높은 경지인가요? 그러니까 그 혼세경이라는 것보다 위면…… 그, 단어가 뭐였슴까?”
당황한 탓에 다시 원래의 말투를 섞어 가며 묻자, 피식 웃던 모용원호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아, 그분께서 신화경에 오르신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네. 하지만…….”
“하지만?”
“그분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계시네. 그즈음부터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돌았지.”
쓰읍.
‘젠장.’
입맛이 썼다.
기대감이 무너지자 괜히 더 스트레스만 받는 것 같았다.
거기다.
“동대륙에는 신성이 존재하지 않아. 얻을 방법도 없고. 그 인간이 살아 있다 한들 오러마스터는 아닐 거야.”
통역으로 대화를 전해 들은 에스티나가 뒤늦게 말을 보탰다.
그에 다시금 한숨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신성이 없으면 9단계에 오르지 못하는 거야?”
“……일단 신화시대 이후에 오러마스터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어.”
“기록이 없다고 꼭…….”
“무엇보다 그 용사가 단언했잖아, 타이니.”
“……쳇.”
고대 마계 대전에서 인류를 구해 낸 용사인 크롬벨이 언급되자, 타이니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 지금 그런 허상에 매달릴 시간이 없어.”
“올케 말이 맞아.”
“그사이에 나라 하나라도 더 돌자. 이런 방식으로 설득하면 되겠지.”
내내 침묵하던 아르곤도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퀭한 얼굴로 의견을 보탰다.
그런데 그사이, 통역이 일행의 대화를 왕과 모용원호에게도 전한 듯했다.
“신화경의 무인이라면, 우리 대륙에 기록된 이가 두 분 정도 있네만?”
모용원호의 그 말이 타이니의 귀를 사로잡았다.
“예, 예. 그렇, 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네. 그 신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미 양신(陽身)을 이룬 자네라면 신화경에 오르기 위한 길을 닦고 있는 거 아닌가? 왜 엉뚱한 것을 찾지?”
“양신? 제가요?”
이게 뭔 소리인가?
“그렇네. 자네와 대련하면서 처절하게 깨달았지. 기를 발하고 변환하는 그 압도적인 속도. 그것은 양신 이외의 수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
“……그게 뭔데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도가의 가르침을 따라 기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신체를 키우는 법이라고만 알뿐.”
기로 이루어진 신체.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마나바디라 이름 붙인, 염체를 만드는 공법. 스스로 창안한 비전.
하지만.
“……도가는 또 뭡니까?”
“어, 그게 말이네. 자연의 뜻대로 인간의 삶을……. 하, 사실 내가 잘 몰라서…….”
무언가 설명을 이어 가려던 모용원호의 시선이 이내 어색하게 굳으며 왕에게 향하자.
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