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무력시위
꿀꺽.
모용원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서 사방을 장악하는 기세를 피워 올리는 저 서방의 사절은, 솔직히 아무리 많게 봐 줘도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서대륙의 오랑캐들 사이에서 저런 괴물이 나왔는가?’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그는 50여 년 전에 서방에서 건너온 초인경의 고수와 대결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고수답지 않게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새하얀 갑옷을 입고 방패까지 사용하던 특이한 무사.
자신을 ‘신의 손’이라 소개한 그자는, 어떤 충격이나 상처도 쉽게 회복해 버리는 ‘신의 술법’이란 것을 사용하는 엄청난 강자였다.
하지만 당시 갓 초인경에 올랐을 뿐이던 모용원호는 그 엄청난 강자와 대등하게 겨뤘었다.
무력이 막강한 것은 물론 신기한 술법까지 사용하는 상대였지만, 그자의 움직임은 고수의 것이라 하기엔 굉장히 투박했다.
덩치 큰 괴물을 상대하는 데 특화된 듯한 강경 일변도의 전법을 구사하던 무사.
그랬기에 그자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 특화된 자신의 검술과 운신법을 따라잡지 못하고 대등한 승부를 벌이는 데 그쳤던 것이다.
물론 모용원호는 서대륙에서 온 처음 보는 강자와의 인연을 그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가능하면 그 ‘신의 술법’이라는 것도 배워 보고 싶었고, 자신도 그자에게 보법을 가르쳐 주며 교류를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자는 둔했다.
‘……정말 둔했지.’
승부 이후 친우로서 교류한 지 1년 정도가 지나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간단한 보법밖에 습득하지 못했고, 더욱이 ‘절기’에 속하는 것들은 도통 익히지를 못했다.
- 내게 ‘제약’이 걸려 있기에 더한 것이기도 하나, 우리 대륙의 기사들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요.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는데 왜 마나…… 그 기(氣)를 근육이 아닌 발바닥이나 핏줄에 보내야 하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요.
- 하, 그 양반 참! 핏줄이 아니라니까!! 혈도, 혈도! 핏줄로 직역하면 안 된다니까!!
결국 제대로 된 보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자는 자신에게 신의 술법을 가르쳐 주려 했다.
다만 그땐 반대로 자신이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뭔 여신? 난 그런 여자 본 적 없는데?
- 무엄한……!!
그것 때문에 대판 싸우고 다시 안 보게 되긴 했지만.
‘추억은 추억이지.’
그리고 모용원호는 그때의 경험 덕에 자신이 서대륙의 전투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안 덤비실 검까?”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아예 수준이 달랐다.
움직임이 투박한 것은 그자와 비슷했지만, 대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기(氣)를 잘 다뤘다.
신체를 움직이듯, 전신의 기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 같았다.
마치 기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육신이 있는 것처…….
……설마?!
“양신(陽身)?”
“뭐라는 검까? 안 오시면 제가 감다?”
“아니, 아닐세.”
황당한 가정이었지만, 그리 생각하면 대번에 이해가 된다.
물론 이제는 동대륙에서도 보기 힘든 도가의 양생술을 서대륙 사람이 익혀서 그 극한에 도달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말이다.
‘뭐, 말로만 들었던 신수의 계약자라면 가능하단 것일까?’
그렇다면, 저들이 처음에 타고 날아온 신조도…….
“씁, 급한 건 나뿐인 듯함다.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닌데.”
쿵.
우르르릉.
검은 머리 청년이 다시금 내리친 거대 망치가 지면을 움직이는 순간, 모용원호는 그대로 잡생각을 끊어 냈다.
믿을 수 없는 힘을 가진 상대.
심지어 저 무기와 장비는 말로만 듣던 마법 무구, 그중에서도 최고급임이 틀림없었다.
세상의 위기를 알리러 온 서대륙의 사절.
이제는 그 황당하기만 하던 이야기의 무게가 점차 깊게 와닿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떠나서 자신은 무인이다.
“미안하네. 그리고, 조심하게.”
지금은 그저 저 청년을 검선이라 생각하고, 그동안 갈고닦아 온 모든 것을 보여 줄 때였다.
검선을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를 대신할 만한 강적을 어디서 또 찾겠는가.
모용원호의 눈빛이 다시금 날카롭게 번뜩인 순간.
사방을 장악한 적의 기세 속에서, 그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혼세경에 오르며 얻은 영역의 힘과 성명절기라 할 수 있는 파랑보(波浪步)가 극한으로 발휘되며, 그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이름처럼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는 듯한 형태로 유형화된 기세는 전장을 장악한 적의 절대 영역을 순식간에 덮쳤다.
그리고.
콰드드득.
상대의 영역에 부딪힌 순간, 그 기세는 허무하게 깨어져 나갔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
그때부터 끝없이 밀려나면서도 진퇴를 거듭하던 기세는 상대의 절대 영역을 조금씩 뒤흔들며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해 나갔고.
그에 따라 모용원호의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호오?”
……된다!
적의 입에서 나온 나지막한 감탄사가 그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오랑캐가 검선 어르신의 절대 영역을 쓸 리 없다고 방심하지 않고.’
직전에 사용한 호신강기(護身罡氣)가 최소한의 호신을 위한 강기 활용의 극의라면.
지금 전개한 파랑개천세(波浪開天世)는 그 호신강기를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에서 탄생한 기술이었다.
한순간 전력을 쏟아부어 상위의 적조차 압박하는 무기. 실제로 절대 영역에 지속적으로 부딪치며 공간을 확보한 파랑개천세의 힘은 일순간이나마 상대의 움직임을 구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단숨에 허공으로 도약해 적과의 거리를 좁혔고, 동시에 휘둘러진 검이 짙은 푸른빛 검강을 싣고 적의 옆구리로 향했다.
오랜 갈망을 풀어 준 상대를 배려해 적당한 부상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흡!?’
카가가강.
그 필살의 검격이, 갑자기 상대의 몸에 덧씌워진 ‘갑옷’에 부딪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노을빛 불꽃처럼 일렁이는 철갑.
하지만 그의 감각은 이내 그것이 진짜 갑옷이 아니라 강기(罡氣)로 이루어진 무형의 갑옷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감각과는 별개로, 눈앞에 보이는 형태는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미친……!’
쓸데없는 재능 낭비의 극치.
그리고 그 괴리감과 충돌의 여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노을빛 불꽃이 일렁거리는 철제 장갑이 허공에서 균형이 흐트러진 그의 시야를 뒤덮었다.
콰드드득.
모용원호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문 순간.
파아아아아앙.
예상했던 타격은 간데없고, 거센 바람이 그의 정면에서 터져 나갔다.
그리고.
“영역에만 힘 다 쏟아부었슴까? 안타깝슴다. 다시 해보시겠슴까?”
정말로 아쉬워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크르릉.”
커다란 늑대의 앞발이 다시 균형을 잡은 그의 가슴을 툭 건드리고 있는 것이 그제야 인식되었다.
실제 전장이었다면, 기수만 신경 쓰다가 먼저 짐승의 앞발에 가슴이 꿰뚫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수도…… 있었지.’
완벽하게 패배했다.
파랑개천세를 쓴 대가로 탈력감이 몰려오는 몸에 짙은 패배감이 더해져 자연스레 고개를 떨구게 되는데.
“그 기갑옷 압축하는 법, 배우고 싶슴다. 더 보여 주시겠슴까?”
“……뭐?”
“배울 게 있으면 배워야지예. 이대로 돌아가실 검까?”
예의 그 이상하게 혼용된 변방 사투리가 헛웃음을 자아내는데.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 특히 주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없이 무겁게 내려앉은 그 눈빛.
“……그럴 수는 없지. 고맙군. 정신 차리게 해 줘서.”
“참고로 지금 수법은 괜찮았지만, 피하기도 쉬웠슴더.”
“……뭐?”
“상대가 기세 싸움 안 하고, 그…… 지금 저처럼 기의 갑옷을 만들어서 회피하면 끝. 자폭이나 다름없음다. 영역 겨루기에만 너무 집착하신 듯……합니다.”
“하…….”
그 말이 모용원호의 골을 띵하고 울렸다.
이십 년 전 검선의 절대 영역에 농락당하듯 패배한 뒤 이를 갈며 만들어 낸 파랑개천세에, 터무니없이 큰 약점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기술을 사용해서 상대해야 할 정도의 강적이 기세 싸움을 정면에서 받아 줄 거라는 턱도 없는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
오직 검선의 성향만을 고려한 반쪽짜리 기술이었던 것이다.
“하, 하하…….”
허탈함에 헛웃음만 나오는데.
“차라리 처음에 쓰신 그 기갑옷 응축 쪽이 더 효과 있슴다. 운신법이 뛰어나시니.”
이어진 적의 말이 다시금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기갑옷 응축, 호신강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응해 줘야 했다.
10년을 고련해 온 수법을 다시금 현실에 맞게 수정하기 위해서라도.
“……도와주겠나?”
“얼마든지.”
이게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아마도 지금부터의 대련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자신의 공격을 서대륙의 이 어린 강자가 철저하게 분쇄하는 모양새가 되리라.
‘무력시위를 원하는 거겠지.’
하지만 모용원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선다면 지난 이십 년의 세월이 그대로 물거품이 될 것 같았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었고, 또 찾을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쾅.
콰아앙!
“커헉!”
모용원호가 또 쓰러졌다.
서진의 대장군, 대해제일검(大海第一劍)이 서대륙에서 온 젊은 무사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저, 저. 저.”
“어찌 저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물 위를 걷는다는 파랑보는 적이 탄 늑대 신수의 발걸음을 쫓지 못했고.
콰아아앙!
날카로운 푸른 검강은 적이 가볍게 휘두른 망치나 주먹 한 방, 혹은 신수의 이빨이나 발톱에 여지없이 깨어져 나갔다.
그 와중에 적 역시 지친 건지, 타고 있는 늑대 신수와 전신에서 일렁이던 노을빛 갑옷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왕국 최강자가 형편없이 밀리는 현실을 가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 중 눈이 있는 일부는 그 광경 이면의 진실을 알아차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적이 지친 게 것이 아니라, 갑옷 형태를 이루던 노을빛 강기가 더욱 압축되어 그의 전신과 늑대의 피부를 감싸는 아주 얇은 천과 같은 형태로 변한 것이란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저자의 호신강기가 더욱 완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가…….”
“속히 대장군을 말리심이 나을 듯합니다.”
“이미 명예가 땅에 떨어졌는데 말이냐.”
“대장군의 노환을 핑계 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일없다. 그리고 저자가 저렇게 강하다면, 그 문서에 담긴 사실도 다시 고려해 봐야 한다.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어.”
왕의 시선이 점차 무거워지는 이유였다.
사실 그는 사절이 가져온 문서를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천 년 전 ‘개벽’이 이뤄진 이래, 그 이유에 관한 연구는 동대륙에서도 끝없이 이어졌으니.
수뇌부들은 서대륙의 마계 대전에 대한 전설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서진으로선 시간상 병력을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지목된 세 위치가 우리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
하지만 서대륙이 이미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면, 그들보다 ‘더욱 강한’ 동대륙은 쉽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왕은 생각했다. 이 ‘기회’를 이용할 방법을.
‘그래, 기회.’
왕은 이것을 기회라 생각했다.
대륙 서부의 군도만을 지배하고 있는 서진이 다시 이백 년 전처럼 육지에 영토를 만들 수 있는 기회.
사절의 말이 일부만 진실이라도 동대륙은 혼란에 빠질 것이며 특히 대륙의 지배자인 선 제국이 크게 홍역을 앓게 될 테니, 서진은 그 틈에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서진(西晉)이 아니라, 다시 진(晉)나라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생각이, 지금 눈앞의 광경 때문에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저런 강자가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극복한 위기라고? 거기다 서대륙의 모든 병력까지 동원해서?’
그렇다면…….
왕의 눈은 대련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