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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355화 (355/500)

355화. 모용원호

‘하, X신 같은 것들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국의 왕이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싶었다.

“저 왕, 애초에 우리 말을 믿지 않는 거야.”

통역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에스티나의 그 말이 화를 더욱 부추겼다.

그래서 타이니는 바로 실력 행사에 나섰다.

이곳 말대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 번 묻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상황을 확실히 가르쳐 줘야겠고만요. 당신들 X 됐다고 말임더!”

기세를 가라앉히고, 오러익시더로 보이는 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자신의 동대륙어 말투가 비웃음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도, 그 순간에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자 일행을 제외하고 대전에 있던 모든 이의 얼굴에 한순간 헛웃음이 퍼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서쪽 대륙의 절대고수라? 잘됐군. 안 그래도 한번 겨뤄 보고 싶었네.”

모용원호. 자칭 이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기사, 아니 무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대전에서 다시 왕궁의 앞마당으로, 판이 옮겨졌다.

* * *

“지금 상황 애매해. 알고 있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에스티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확실히 아는 거야?”

“확실하게 박살 내야 한다는 걸 알지.”

모용원호와 대등하게 싸우거나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만한 왕에게 오히려 자신감을 심어 줄 뿐일 테니까.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에스티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뒤에 서 있던 아르곤 녀석은 갑자기 하늘을 보며 여신을 찾기 시작했다.

“……왜?”

“네가 질 거라는 생각은 우리 중 누구도 하지 않아. 압도하겠지.”

“당연하…….”

“하지만 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해서도 안 돼.”

“……어?”

“딱 봐도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잖아. 네가 아까 그 왕자라는 놈을 박살 낸 것도 그냥 무마해 버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아.”

“그런 인물한테 중상을 입혔다가는, 설득은커녕 동대륙과 전쟁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크게 다치지 않게, 하지만 완벽하게 ‘제압’해야 해. 할 수 있겠어?”

그제야 에스티나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게 된 타이니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그가 기감을 통해 파악한 모용원호의 수준은 기껏해야 최근에 각성한 실버 팽 정도.

물론 노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무력이 전성기의 수인족 오러익시더와 비슷하다는 것 자체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 외에도 큰 차이가 있었으니.

“저 양반 무구 좀 봐 봐. 동대륙엔 마법사가 거의 없다더니, 제대로 된 룬 장인도 없는 것 같아.”

바로 모용원호에겐 초월무구가 없다는 것.

들고 있는 검이나 장비는 모두 제법 튼튼해 보였지만, 거기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나에는 정형화된 패턴이 없었다.

즉, 초월무구는커녕 아티팩트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모용원호의 무력은.

‘문 아머와 라이트닝 로드를 장비하지 않은 사림 수준이겠지.’

동대륙의 무구가 튼튼한 것으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마법이 깃든 아티팩트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물론 서대륙에서도 아티팩트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 강자가 그저 품질 좋은 곡도 정도만 들고 있는 수준이라면…….

‘거기다 여기엔 사제들도 없다고 했지.’

무사들의 무력 수준이 아무리 높아 봤자 마계의 악마 귀족들과 칠죄종을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견적이 쉽게 나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크게 다치게 하지 말라는 거야.”

“알았다니까.”

일행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 그는, 에스티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돌아섰다.

‘박살을 내 주마.’

물론 몸이 아니라 마음을.

자신감이 드높은 자일수록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의 충격이 큰 법이니까.

타이니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검은 머리긴 한데, 백인 맞지?”

“말투 들어 봤어? 막 여기저기 섞인 사투리를 쓴다니까? 웃겨 죽는 줄…….”

“지방 잡상인들한테 배웠나 봐.”

맞다, 이 새끼들아. 니들이 가르쳐 준 것도 아니면서…….

우드득.

“그런데 절대고수라며?”

“그래?”

“그러니까 대장군님이…….”

웅성웅성.

서진의 왕과 신하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상황, 주변에 빙 둘러선 수많은 병사와 무사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왕성 앞마당의 중앙에 홀로 나와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악감정은 없소이다, 노인장.’

결코 자신의 말투를 비웃는 것에 열 받아서 화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인류를 위한 것. 확실한 설득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럼. 그럼.’

이상하게 그 대의를 위한 마음과는 별개로 손이 근질거린다는 생각이 들 때.

앞에서 여유로운 어조의 동대륙어가 들려왔다.

“준비는 끝났나?”

“애초에 준비랄 것도 없슴……니다.”

“어색한 말투를 그렇게 금방 고쳐 나가는 건가? 역시 그 나이에 절대고수가 된 인재답게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군.”

……조금 봐줄까?

‘좋은 사람 같은데.’

갑자기 마음속 대의가 살짝 흐려지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런 자네를 위해서라도,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 줘야겠네.”

이내 노인의 오만한 웃음이 그의 눈썹을 다시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누가 누굴 가르쳐?

“그 하늘, 내가 노인장께, 보여 드리겠슴……다.”

“자신감은 젊음의 특권이지. 오게나.”

아까 대전에서 자신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 대신 검을 까닥이며 도발하는 노인을 보며, 타이니는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까와 같이 손을 까닥여 보였다.

“노인장이 들어오십셔. 제가 먼저 가면, 기회 없슴다.”

그 말을 듣고서야 노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말보다 예의를 먼저 다시 가르쳐야겠군.”

이내 노인의 전신에서 스산한 기운이 피어오르며 영역이 급속히 확대되는 것이 보였다.

영역의 발현과 증폭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모습.

하지만.

“과연 누가 선생이 되겠슴까?”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타이니의 영역이 펼쳐지는 순간.

급속하게 확대되며 상대를 압박하던 모용원호의 영역이 한순간에 박살 나며, 도리어 그가 압박당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파지지지직.

둘 사이의 공간이 굴절되고 일그러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지자, 주변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모두 침묵에 잠긴 채 눈만 부릅떴다.

그리고 이내.

파지지직.

그 일그러지고 굴절된 균열이 조금씩 모용원호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여유롭던 모용원호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며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고, 반대로 그 모습을 보는 타이니의 표정에는 미소가 걸렸다.

‘놀랐겠지.’

두 영역이 겹쳐질 땐, 아무리 수준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 상쇄되어 사라지거나 무효화되기 마련.

그러니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킬 듯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는 것은, 저 노인의 상식에 위배되는 현상일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런 줄로만 알았으니까.’

탐욕 애버리스와 싸울 때, 그는 발현, 증폭, 변이, 진화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영역을 응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나를 다루는 감각과 지배력, 그리고 영격이 점점 성장하다가 어느 한계점을 돌파하고 나면, 일정 영역을 말 그대로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타이니는 영역의 힘만으로 탐욕의 권능을 상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영역, 에너지 필드가 힘의 흡수와 변이 혹은 컨트롤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이제 8단계 오러익시더를 넘어 그 너머의 경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에너지 필드 한계 돌파.

공간 지배.

파지지지직.

한순간에 흩어지는 모용원호의 영역.

동시에, 안색이 바위처럼 굳어 버린 노인의 몸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

파바박.

공간을 단축해 움직이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타이니의 코앞에 나타난 노인.

그 검에서 솟구친 찬란한 푸른빛 오러는 마치 생사결을 내려는 것처럼 번개같이 타이니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제법이군.’

이제는 그의 영역 전체에 자연스레 상시 펼쳐져 있던 ‘오러 신경망’이 그 압도적인 속도에 반응하며 시간을 가속시켰다.

극도로 증폭된 집중력에 따라 한없이 느려진 타이니의 시간 속에서 느릿하게 이동하는 모용원호의 검.

그것을 지켜본 타이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노인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채 자신의 공간 지배에 저항하는 푸른 오러의 갑옷이 더 놀라웠다.

‘이런 것도 가능한가?’

새롭게 개안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비기 중 하나인 철신갑의 압축 진화판 같달까.

푸른 오러와 영역의 힘이 합쳐져 권능에 가까운 공간 지배의 힘을 뿌리치고, 오러조차 무시할 수 있는 절대의 방어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노인의 움직임을 쭉 지켜보며 그 기술의 요체를 빼먹고 싶었지만,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확실히 움직이는 검은 그 정도의 여유까진 허락하지 않았다.

‘평가 조정. 사림보다 반 수 위야.’

물론 초월무구 없는 사림과 비교했을 때의 얘기지만.

우드득.

오러 신경망을 최대한 활용하며 움직이는 순간 몸에 막대한 부하가 느껴졌다.

하지만 충분히 견딜 만한 통증이었다.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는 검을 반 발자국 차이로 비껴 낸 타이니가 그대로 노인의 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그 주먹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목표에게 닿았다.

꽈아아아아아앙!

사람의 주먹으로 사람의 몸을 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굉음이 퍼져 나갔다.

‘컥!’ 하는 작은 신음 따윈 그대로 묻혀 버릴 정도로 엄청난 소리.

그와 동시에 모용원호가 핏줄기를 뿜어내며 뒤편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쾅!

“악……!”

우당탕탕.

뒤쪽에 서 있던 무사들 여럿을 날려 버리며 군중 사이에 나뒹구는 노인.

“대, 대장군!”

“대장군님이 일격에……?!”

“말도 안 돼!!”

사방에서 경악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합!”

그 사람들 사이에서 가볍게 뛰어오른 모용원호가 다시 타이니의 앞에 착지했다.

물론 이전과 같은 여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쿨럭.

착지하는 순간 살짝 비틀거리며 기침과 함께 옅은 피를 토해 내는 모습.

“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한순간에 산발이 된 모용원호가 놀란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는데.

“대장군님!”

“어, 어찌…….”

사방에서 염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내 그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요란 떨지 마라! 무사의 대결이다!!”

다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그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음을 알렸다.

그에 안도에 한숨을 내쉬는 이들을 뒤로하고, 모용원호의 눈이 다시 타이니를 향했다.

“자네, 검선(劍仙) 어르신과 무슨 관계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뜬금없는 말에 타이니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림까?”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그런데 어떻게 ‘절대 영역’을 쓰는 거지?”

“절대 영역?”

“자네가 쓴 그 기술 말일세. 상대의 영역을 지배해 버리는 기술.”

그 말에는 타이니의 눈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호? 동대륙에도 이걸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슴까?”

타이니의 마음속에서 동대륙의 무력 수준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상승하는 동안, 모용원호는 자신이 상대하는 자가 진실로 서대륙의 최강자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정말 나이에 비해 믿기지 않는 성취로군.”

노인은 상대의 실력에 진정으로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타이니는, 주변의 분위기와 무겁게 가라앉은 왕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의 무력시위가 제대로 먹혔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모용원호의 눈에서 투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하려는 겁니까? 승부는 이미 결정이 났을 텐데요?”

“자네가 사정을 봐주었음을 아네. 하지만 나도 체면이 있으니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지 않겠나. 이해해 주게나.”

“흠…….”

“그리고 내겐 검선 어르신을 상대하기 위해 연구해 온 수법이 있네. 자네에게도 제법 인상적일 게야.”

그 말에는 타이니도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줬잖아.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어, 타이니.]

에스티나의 목소리가 바람의 마나에 실려 그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동대륙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는 분위기만으로 상황을 짐작한 듯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니는 모용원호가 말한 수법이 궁금했다.

그러니.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 줘야지. 더 심각하게 느끼도록.]

그는 일행에게만 들리는 영파로 태연히 답하고는 그대로 모용원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좋습니다. 대신…….”

그리고.

“아우우우우우!”

그대로 월랑을 소환했다.

“신수?!”

그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늑대의 모습에 모용원호의 눈이 한순간에 커지고.

“헉!?”

“뭐, 뭐야. 저건!?”

“어찌 짐승이!?”

“신수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할 때.

영혼의 반려의 등에 올라탄 타이니의 몸에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기세가 퍼져 나오며 사방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쿵.

우르르르릉.

이내 그가 가볍게 내리친 녹턴이 전장의 지면을 뒤흔드는 순간.

그것을 지켜보는 서진 사람들의 눈도 같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더 험한 꼴 당할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물론이네.”

더욱 무거워진 표정의 모용원호가 그대로 검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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