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동대륙?
“동대륙이라니?”
“갑자기?”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차원 관측기가 10일 후 강림이 있을 것으로 지목한 장소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곳이었다.
심지어 그 수도 이전과는 달랐다.
“게다가 세 군데?”
“허어…….”
소식을 접한 연합군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만약 강림 예정지가 이 대륙이었다면 진작에 난리가 났겠지만, 그게 동대륙이라 하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안도하는 이들까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잘 막아 냈기 때문일까요? 마족들이 동대륙을 먼저 정벌하고 이곳으로 오려나 봅니다.”
고대에 이미 마족을 상대해 본 용사가 놈들의 목적을 그럴듯하게 추정하자, 지휘부는 당혹감 속에서 다시금 서로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거,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하이넨이 고개를 갸웃하며 꺼낸 그 말처럼, 당장은 이렇다 할 대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10일 후라니, 동대륙에 소식을 전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기간입니다.”
“소식을 전한다 해도, 그곳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믿어 줄지도 의문이고요.”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의 말 그대로였다.
동대륙은 이천여 년 전, 마계 대전의 말미에 갑자기 나타났다.
당시 중간계에 강림해 있던 천계의 존재들이 인류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긴 했지만, 기존의 인류와 동대륙 사람들이 서로를 확실히 인지하고 교역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천 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현시대의 마력선으로도 무려 한 달이 걸리는 먼 거리가, 두 대륙의 관계를 오랫동안 단절시켜 온 것이다.
“연합군의 정예들이 그 먼 길을 떠나는 건 무리일 듯한데, 동대륙 사람들이 마족들을 이겨 낼 수 있을까요?”
에스티나의 그 말이 한순간 좌중에 침묵을 불러왔다.
그만큼 이 땅에는 여전히 동대륙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았으니.
그러다.
“아, 맞다. 타이니 너, 동대륙어 할 줄 안다고 하지 않았나?”
“오……!?”
갑작스레 나온 검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타이니에게 모여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뭡니까. 그 눈빛들은?”
그들 다수가 불신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에 타이니로선 살짝 울컥할 뻔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작게 한숨을 내쉬고 털어 버렸다.
“전생에 카룬이 박살 난 뒤, 거기서 살아남은 상인들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동대륙 무사들에게서 배운 겁니다. 말이나 글자는 대충 알고 단편적인 지식도 있습니다만, 그게 전부입니다. 아마 지금도 카룬에 있을 현지인들이나 상인들이 더 잘 알 겁니다.”
“물론 우리도 조사해 보긴 하겠지만, 당장은 네가 가진 지식이라도 필요하다. 이 자리에서 대략적으로나마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정말 단편적인 것뿐인데…….”
타이니는 작게 투덜거렸지만, 독촉하는 시선들에 이내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곳과의 가장 큰 차이라면, 그 대륙엔 마법사나 정령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사제들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뭐? 그럼 대체 어떻게 문명을 유지하지? 그곳에도 마물이 많다고 들었는데?”
“기사, 그러니까 그곳 말로 ‘무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우리 대륙의 기사보다 훨씬 강할 거라고 장담하더군요.”
“흥.”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봤자지.”
12대 기사들, 오러유저들이 거의 동시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마나연공법이 동대륙에서 전래했다는 것을 잊으셨나 봅니다. 동방의 마검에 대한 전설도 들어 보셨을 텐데요.”
그 결정적인 한마디에 인간족의 기사들이 모두 무언가를 떠올린 듯 ‘아!’ 하는 표정으로 저릭을 바라보았다.
엘프나 드워프, 수인족, 그리고 오크족을 제외한 인간족의 기사들은 마력회로가 아닌 마나연공법을 익힌 이가 대다수였는데.
그것은 500여 년 전 동방에서 건너온 한 흑발의 무사가 남긴 충격 때문이었다.
동방에서 온 마검.
그는 당시 이 대륙의 모든 인간 기사를 꺾은 뒤 오크 대전사에게 도전했는데, 수십 번의 격전에도 승부를 내지 못하자 그대로 이 대륙에 눌러앉았다.
그 뒤로 그를 추종해 온 인간의 무리에게서부터 체내 중심에 마나를 집중, 축적하는 방법인 마나연공법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 왜 날 봐?”
하지만 정작 현시대의 오크 대전사는 그 전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단지 타이니의 얘기가 신기한 듯 흥미를 보일 뿐.
“그럼 동대륙에는 겨뤄 볼 만한 전사가 많다는 건가?”
뜬금없이 투기를 보이는 저릭의 모습에 모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기대 어린 시선은 타이니의 고갯짓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뭐, 그거야 모르지. 다만 동대륙이 그 저력을 발휘해서 마냥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 기대해 보는 거야.”
“킁. 그런가.”
저릭이 아쉬워하며 투기를 거두자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전설에 따르면, 오러익시더급 가운데서도 강자에 속했던 동방의 마검은 동대륙에 자신만 한 강자가 아홉이 더 있다고 했답니다. 물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기대를 걸어 볼 만하겠지요.”
“아니, 오히려 그 정도면 전설의 오러마스터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거 아닙니까?”
그에 누군가가 전설 속 반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지만.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신성하고는 아예 연결점이 없을 테니까요.”
그 의문을 크롬벨이 쓴웃음으로 받아쳤다.
“그리고 록펠러 님, 이미 이 자리에 있는 오러익시더만 해도 모두 일곱입니다.”
“예? 아…….”
검제의 말에 시선을 움직여 일행을 훑어본 록펠러가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전쟁의 와중에 성장하신 분도 많으니…….”
광휘의 기사 타이니, 용사 크롬벨, 검제 에스가르드, 오크 대전사 저릭, 문나이트 실버 팽, 사신 루나, 세계수의 수호자 에스티나까지 모두가 틀림없는 오러익시더였다.
거기에 아직 오러유저임에도 기사단과 함께라면 그 이상의 전력을 낼 수 있는 북풍의 기사 제나스도 있고, 마찬가지로 오러익시더는 아니지만 8서클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마도 기사 아르곤도 있다.
심지어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웨폰 마스터 그리드도 무려 5개의 초월무구를 사용하는 초인이며, 기갑왕이라 불리는 하이넨의 무구들 역시 손에 꼽히는 것들이었다.
즉, 지금 대륙 12대 기사의 전력은 역사상 최강이라 봐도 무방했다.
자연스레 현실을 인식하게 된 연합군은 다시금 동대륙에 대한 평가를 이어 갔다.
“그럼 군단 하나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겠는데?”
“강림의 소식만 잘 알려 주면…….”
희망적인 관측이 나오기 시작하던 그때.
“하지만 그들에게는 초월무구가 없고, 심지어 아티팩트조차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우리 대륙에서 동대륙에 가장 값비싸게 수출되는 거라고요. 그러니 그곳의 최강 전력이 모두 뭉친다 해도, 칠죄종을 상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죠.”
타이니가 그 분위기에 확실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더구나 하나도 아니고 세 군단이 한꺼번에 강림하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경고를 믿어 줄지도 의문이고, 믿어 준다 한들 고작 10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소식을 전합니까?”
“……다른 나라는 몰라도, 카룬에는 동대륙에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통신구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드가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꺼내 보았지만.
“……어렵겠군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이, 모두가 머릿속에 떠올리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하던 한마디를 꺼냈다.
그러자 검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희는 마왕군이 동대륙을 점령하고 이 대륙으로 몰려올 때를 대비하는 게 낫겠습니다. 질투가 강림할지 모를 이곳 차원문에 확실한 정예를 배치하고, 카룬이나 대륙 동부 해안선에도 인류 연합군을 집중시킵시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꽤 많은 시간이 생긴 것이니,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요.”
그 말에 좌중의 얼굴에 저마다 안도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동대륙이 점령당한다고 해 봤자, 바다 건너 한참 멀리 있는 대륙의 멸망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동대륙에 소식을 전할 방법을 알아내서 경고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듯합니다. 시간상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럼 카룬 왕국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는 듯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여태 홀로 상념에 빠져 있던 크롬벨이 그 분위기를 다시 경직시켰다.
“……크롬벨 경, 무슨 뜻입니까?”
“남은 세 군단이 정확히 어떤 군단일지는 모르지만, 그중에 분노의 군세가 있다면 절대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분노의 군세. 마충 군단은 지상을 부화장으로 삼아 끝도 없이 번식합니다. 죽은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언데드 병단보다 증식 속도가 훨씬 빠른 괴물들이지요. 그리고 일단 동대륙이 멸망하여 마계화가 진행되면, 다른 군단 역시 그곳에 정착하여 수를 불려 나갈 겁니다.”
고대에 직접 마왕을 막아섰던 용사의 말에 천막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질투의 군세, 언데드 병단이 이곳에 강림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군요. 어쨌건 요점은, 절대 다른 대륙 일이라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동대륙으로 정벌을 떠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설사 어찌어찌 선단을 꾸려 떠난다 해도,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의 반론은 너무나도 타당했다.
하지만 크롬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소수라도 가야지요. 다행히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정령을 하루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자리에만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이내 그의 시선이 세계수의 수호자에게 향하자, 그녀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이상의 비행이라도, 카일룸은 셋 정도는 충분히 태울 수 있습니다.”
“제 오투스도 그 정도는 되겠지요. 이 시대에 깨어난 이후 정령이 바뀌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드는군요.”
- 크롬벨…….
그에 침묵 속에서 듣기만 하던 코끼리 수인과 검은 늑대의 정령이 움찔하긴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의 의견이 자연스레 수렴되는 듯했지만.
“지금 타이니와 크롬벨 경이 모두 동대륙으로 가겠다는 겁니까? 전 반댑니다. 이곳을 지킬 사람도 있어야지요.”
검제가 태클을 걸었다.
“그거야 남은 이들이…….”
“이번에 데스 로드 길로틴을 상대해 보면서 확실히 느꼈습니다. 적어도 저는 칠죄종을 정면으로 막아설 자신이 없습니다. 혹시 다른 분들은 자신 있습니까?”
그가 자존심을 버려 가며 내뱉은 말에 천막 안은 다시금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곳은 이 대륙입니다. 다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다.
“난 어쩌면 될 것도 같…….”
자존심이 상한 저릭이 괜히 한마디를 보태 보았지만.
“……아니, 그냥 짐작이 그렇다는 거였는데. 거참……. 알겠소. 미안하오.”
검제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고, 결국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니나 크롬벨을 포함해서, 적어도 12대 기사 중 반수 이상은 이 차원문을 지켜야 합니다.”
그 말에 다시 침묵이 이어지려는 찰나 타이니가 나섰다.
“그럼 내가 간다. 동대륙 말도 할 줄 아니까. 에스티나는 당연히 가야 하고.”
“나도, 나도!”
“어. 누나도 가야지.”
그림자에 숨어 한 사람분의 무게를 덜 수 있는 루나는 가장 선택하기 쉬운 옵션이었다.
‘루나를 포함하면 넷이 갈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한 명 더.
좌중을 훑던 타이니의 시선이,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저릭을 외면하고는 그 뒤에 숨어 있던 갈색 머리 청년을 지목했다.
“아르곤, 너도.”
저릭이 입을 뻐끔거리다 어깨를 축 늘어트릴 때.
“……나?! 왜!?”
눈에 띄지 않으려 침묵을 지키다 날벼락을 맞은 아르곤이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내, 내가 없으면 군단 스킬도…….”
“한동안 그거 쓸 일 없어.”
“그래도 딴 사람도…….”
“동대륙에 관한 정보가 반만 사실이래도, 마법 전력이 제일 부족해. 네 스승님을 모시고 가리?”
타이니의 시선이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을 향하는 순간.
“……X발.”
아르곤은 힘없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