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마계의 결정
- 이대로는 곤란한데…….
마계의 군주들에게 나른한 영파가 전해졌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여느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
숨죽이고 있는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나태, 슬로스는 자신의 영파를 들은 이들 중 하나를 꼭 집어 다시 의사를 전했다.
- 그린 아이,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칠죄종 중 질투, 언데드 병단의 주인을 겨냥한 영파.
여느 때라면 바로 반박했을 그린 아이였지만, 이번에는 그의 반응 역시 달랐다.
한참 동안 침묵만 이어지던 어느 순간.
-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가 홀로 남은 마계의 무덤 안에서, 오랜만에 녹색 귀화 한 쌍이 피어올랐다.
나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린 아이의 질문은 바로 이어졌다.
- 왜 그분께서는 7종 연좌의 술을 비롯해 강림의 시간을 빠르게 하는 수법을 개발하신 건가?
궁지에 몰린 그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 같았지만, 그린 아이는 그것이 현 상황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생각했다.
7종 연좌의 술.
칠죄종 아래의 일곱 장군이 사망하였을 때, 그 카르마를 이용해 차원의 장벽을 얇게 하는 수법.
‘분명 강림이 시작되기 전에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희생을 전제로 한 수법을 만들었다.’
물론 군단 내 21개체의 악마급 마족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희생 없이 군주를 소환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수법 역시도 목표는 매한가지였다.
- 우리가 최대한 빨리 중간계에 강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분께선 어찌 먼저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지?
나태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 대신 다른 군주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 그렇군.
- 확실히 일리가 있다.
- 슬로스, 대답하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나태가 입을 열었다.
다만 그 대답은 다른 군주들이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 모든 것은 어긋난 순리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그분은 그 일에 속도를 더하고자 하셨을 뿐.
구체적인 사유를 묻는 질문에 원론으로 대답한 격이었다.
당연히 다른 이들의 반발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 우리를 바보로 아는 것인가, 슬로스?
- 그분의 칩거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 제대로 대답하라, 나태여!
그러자 나태는 도리어 그들을 비웃는 듯한 영파를 흘렸다.
- 칠죄의 힘을 이은 반신들이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된 것인가? 역시 마계 대전을 겪지 못한 애송이들이란…….
- 뭣이!
- 슬로스, 그대가 아무리 그분의 대리인이라 한들……!
- 애송이라? 그렇다면 그 애송이에게 가르침을 주실 의향이 있으신가, 슬로스!? 이 내가 친히 찾아가겠다!
분노, 라스의 살기 어린 영파까지 울려 퍼지면서 대화는 개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그린 아이, 질투는 다시 의심했다.
‘왕이 무언가를 안다. 중간계 정벌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거야.’
그러면서도 숨겼다.
‘그렇다면 이유는?’
의심하고 시기하는 자, 질투. 그 원죄의 힘이 자신의 군주를 향했고, 바로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어쩌면 원죄의 힘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유는 자명했으니까.
군단을 잃고 자부심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진 반신은, 오만을 버리고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휘하 7인이 희생되면 차원에 우리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뚫린다. 그렇다면, 우리 칠죄종이 전부 희생되었을 때는?’
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되면 그분, 마왕이 중간계에 강림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사라진다. 아니, 적어도 크게 줄어든다.
“하…….”
얼핏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몰랐다.
마계의 왕이자 신인 마왕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홀로 남아 무엇을 하겠는가.
하지만.
‘나도 그랬다.’
칠죄종 간의 서열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자신보다 높게 평가되는 탐욕이 죽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부하들 따위는 어찌 되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특히나 그의 언데드 병단은 결국 자신만 멀쩡하면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으니, 오직 소모되는 카르마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물론 그게 제법 비중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은 부하들의 희생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분도, 마왕도 그럴 수 있다.’
무엇보다 영혼의 격은 상위의 경지일수록 같은 수준끼리의 역량 차이가 커지니.
반신인 그들보다 한 단계 위인 마왕은 진정한 신으로서, 그 힘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면, 설령 칠죄종 전부가 죽어 마왕의 강림을 당기는 데 소비되더라도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길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다.’
순환의 고리를 억지로 부숴 버린 여신과 천계는 그 대가로 강림할 기회조차 잃어버렸으니.
마왕이 중간계에 현신한다면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정말로 그럴 만해.”
죽은 자들의 왕은,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자각하고는 죽은 몸에서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할까?’
다른 칠죄종들은 정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가만히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그저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신성이 가져다준 오만이 그들의 시야를 가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알면서도 다른 ‘경쟁자’들을 방심시키기 위해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으니, 질투의 좌를 이어받은 이래 처음으로 맞닥뜨린 초유의 위기감 속에서 그린 아이는 고민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때.
- ……결론을 내자면, 모든 군단이 정상적으로 강림할 시간이 지나면 천계와 중간계가 다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 그것도 희박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 고작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그분께서 그런 술법들을 만들어 내셨다고?
- 희박한 확률조차 없애기 위함이다. 납득하지 못하는가?
- ……아니, 납득할 수야 있지.
- 그렇게 말한다면야 인정할 수밖에.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다른 칠죄종들은 어느 정도 합의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에 그린 아이는 대화에 뒤늦게 끼어들며 물었다.
- 뭐라고?
- 또 딴생각에 빠져 있었나 보군, 그린 아이.
- 그래서, 우리 칠죄종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겁쟁이는 이미 뚫린 길을 언제 걸을 생각이신가?
- 천계와 중간계가 연결된다니? 무슨 소리지?
- 이거 어린 마족도 아니고, 우리가 너의 보모라도 된 것 같나, 그린 아이?
- 대화에조차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주의가 산만하다니.
- 겁에 질린 칠죄라, 거참 부끄럽도다.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온갖 비난이 날아들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발작했을 터이나.
- ……다른 군단이 강림한 이후에 그 혼란을 틈타 내가 나설 생각이다. 그러니 말해 다오.
그린 아이는 한번 자존심을 접고, 실리를 택하기로 했다.
- 오호?
- 스스로 겁쟁이라 인정하는 것인가?
- 놀랍다. 하지만 이해할 만하다.
- 말 그대로다. 정상적으로 강림의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그 말미에 중간계와 천계 사이의 통로가 다시 열릴 수도 있다는 뜻이지.
- 창조주가 안배한 균형의 이치가 그러하다지만, 우리에게는 명백히 억울한 페널티지.
- 물론, 그 확률이 높지는 않다 하나…….
질투의 발언에 다른 칠죄종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나태의 반응만은 달랐다.
- 실망이군, 그린 아이. 선대의 질투, 인비디아는 그리도 용맹했거늘.
그린 아이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슬로스는 알고 있을까? 알고도 저러는 것인가?’
칠죄종의 죽음으로 마왕의 강림이 빨라지는 거라면, 그 대상에는 나태, 슬로스까지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왜…….’
스스로 결론을 내린 이후에도 따라붙는 의문은 많았지만, 그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따지고 들지 않았다.
원죄의 힘은 놀라운 것이지만, 만능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결정했다.
‘나는 결코 홀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중간계에서 일어난 작금의 변화는 모두 그 운명의 변수 탓일 터였다.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은 것.’
그것을 조심하며, 또 다른 군단의 틈새에 끼어 실리를 취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몸을 낮춘다.
- 나보다 서열이 높은 애버리스가 소멸했는데, 어찌 내가 죽을 것이 뻔한 함정에 고개를 들이밀까.
- 죽은 자들의 왕이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 우습구나.
- 그러나 합리적이다.
다행히 다른 이들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듯 더 이상 그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나태는 예외였다.
- 다른 군단이 만들어 낸 혼란을 노리겠다? 뜻은 좋으나 그럴 기회가 있을지 의문이로군.
언제나처럼 나른한 그 영파에는 옅은 비웃음까지 실려 있었으니.
- 무슨 뜻이지?
- 역시나 대화를 듣지 않았군.
- 한심하다, 그린 아이.
- 뭐, 그러니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
이내 다른 이들의 비웃음과 함께 나태의 폭탄선언이 이어졌다.
- 혹시나 모를 중간계와 천계의 재연결을 방비하고 현재 중간계에 생긴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오만과 분노, 색욕의 군단이 함께 강림한다.
- 뭐라고? 전에 두 군단이 동시에 강림한 것도 무리한 것이라 하지 않았나?
- 이번에는 괜찮다. 그에 따른 카르마는 온전히 그분께서 감당하기로 하셨으니.
- 뭣이!?
자신이 잠시 딴생각을 한 사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에게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이 나겠군. 나 역시 적극 협력하겠다.
그린 아이는 오랜만에 진실로 그 결정을 환영했다.
그런데 그때.
- 과연?
- 협력할 수 있을까?
- 우리야 그래 준다면 고맙겠지만, 별 의미도 없을 것 같고.
오만, 휴브리스(Hubris). 분노, 라스(Wrath). 색욕, 러스트(Lust)의 묘한 영파가 울려 퍼졌다.
마치 그린 아이와 자신들의 강림이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
- 무슨 뜻이지?
그린 아이가 묻자, 상상도 못 한 대답이 돌아왔다.
- 우리는 다른 대륙으로 향한다.
- 이미 준비된 함정을 피해서.
- 전혀 준비되지 않았을 것들을 먼저 점령하여 발판으로 삼기 위하여.
- ……다른 대륙?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목표에, ‘다른 대륙’이라는 단어는 들어가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 아……!
짧은 탄성과 함께 마계의 무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녹색 귀화가 크게 일렁였고, 다른 칠죄종들이 바로 그 탄성에 반응했다.
- 그래, 너도 알고 있겠지.
- 본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대륙.
- 다른 차원에 뿌리를 둔 인간들의 대륙을.
그들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선대 혹은 마왕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니.
고대 마계 대전의 말미, 차원이 크게 흔들렸던 그때의 일 대해서 모두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빌어먹을. 그렇다면…….
그러니 그린 아이 역시 세 칠죄종의 말뜻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이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도.
‘그럼 나는,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움직여야 하는가? 안 돼. 그래서는 늦어. 이걸 어찌한다…….’
그린 아이가 다시금 고민에 빠질 때.
- 그래, 존재하지 않느냐? 중간계의 용사 놈이 그분과 싸우기 위해 중간계의 카르마를 대량으로 소모했을 때.
- 존재력이 무너진 세상의 틈을 뚫고 흘러들어 온 대륙이.
- 그리고 우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의 대지가.
기대감에 일렁이는 영파가 울려 퍼지고.
- 그래. 세 군단은 동대륙으로 강림한다. 그곳의 인간들은 우리에 대해 들었어도 믿지 않고 있을 터이니.
나태가 다시 나서서 영파를 울리기 시작했다.
- 세 군단은 강림하는 즉시 군단장의 소환을 제1순위로 하라.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일시에 그 대륙을 멸망시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원래의 중간계를 친다.
이내, 그가 선언하듯 결론을 내렸다.
-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