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49화 (349/500)

349화. 어디라고?

그리마 왕국의 왕성, 이그니온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전장에서 마족과 싸우고 있어야 할 12대 기사 중 몇 사람이 갑자기 왕의 침전에 난입해 국왕을 시해하고는, 그 이유조차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왕국에 얼마 남지 않은 신전의 사제들을 닦달해서 끌고 오더니, 왜 거기 있었는지 모를 남자의 잘린 팔을 붙이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당장 붙이라고!! 팔 하나도 못 붙이는 놈들이 무슨 사제야!?”

“아, 암흑 오러를 어찌…….”

“하라면 해!”

우우웅.

수십의 사제들이 모여 한 사람을 치료하는 진귀한 광경.

“흐, 내가, 광휘의 기사와 친구라…….”

치료를 강요하는 사람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동안, 정작 치료를 받는 사람은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그 요상한 광경 뒤에는, 분노하고 당황한 기사들과 그런 기사들을 설득하는 엘프의 모습이 있었다.

“여기 시체를 보세요. 이게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시나요? 흘러나오는 마기만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기 사제님들이 제 말을 증명해 주실 겁니다.”

“허어…….”

다행히 왕성에 난입한 이들 중 비교적 차분한 엘프의 설명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고.

끌려온 사제들 역시 그 주장에 동의해 주었기에, 그 난리는 어찌어찌 수습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왕성에 있는 기사나 병사들의 무력으로는 대륙 12대 기사 중 최강자가 포함된 초인 셋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마족에게 먹히셨다니.”

“그럼 연합군을 다시 지원하는 방안도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니오?”

“지금 그게 문제요? 왕실의 후계부터……!”

“아니, 왕실 재정이 파탄 나기 전에 그 문제부터…….”

“어찌 그런…….”

그리마 신하들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지만, 이미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오트만 2세가 마족에게 먹혔고 그 마족을 광휘의 기사가 처리했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왕실의 곤란을 핑계 삼아 인류 연합에서 빠진다는 선택지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와중에 다행인 점이 있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후계자는 적당히 내세우고, 왕실의 비상금이라도 끌어와서 연합을 지원하는 수밖에.”

국왕이 불명예스럽게 사망해 버린 탓에 그리마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

그 말인즉, 그들이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게 없다는 뜻이었다.

자연히 신하들의 의견 수렴은 빨랐다.

“그럽시다.”

“뭐, 우리가 책임질 것도 아니니.”

“왕실에 쌓아 놓은 돈부터 써야지요.”

적어도 왕실의 돈줄이 완전히 말라 버리기 전까지, 우리 창고는 열지 않을 것이다.

신하들은 저마다 그런 결심을 하며 결론을 냈다.

그리고 왕성에 파란을 일으킨 타이니 일행은, 그리마 왕실의 미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인류 연합에 대한 지원 약속만 받고서는 바로 돌아가 버렸다.

* * *

“시원하군.”

휘이이이이잉.

카일룸의 등에서 맞는 찬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라프탄에게 듣기론 도시 국가 연합 쪽은 검제가 이미 손을 써 놨다고 하니, 타이니 일행은 바로 랑켄 평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걱정했던 후방의 문제를 예상보다 빠르게 봉합한 것이니 마음이 홀가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필이면 남아 있던 도플갱어가 그 왕을 잡아먹었을 줄이야.”

“덕분에 설득하는 과정이 줄어서 좋지, 뭐. 가리온에서는 꽤 귀찮았다고. 설득이라는 거, 생각보다 힘들더라니까.”

타이니로선 진심을 말한 것인데, 일행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타이니, 정말 그걸 설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설득……?]

억울했다.

‘정말 힘들었는데.’

가리온의 왕성에 지진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 냈던 그때, 그는 은밀하게 기세를 일으켜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한 명도 다치지 않게 했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표정을 관리하긴 했지만, 그때 순간적으로 짜낸 기력은 사실상 유성 떨구기를 연달아 사용할 때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동료들의 생각은 사뭇 다른 듯했다.

“그건 협박이야, 타이니.”

[무서운 협박. 이었음.]

그 말에 타이니가 그들 몰래 입을 삐쭉 내밀었다.

‘협박 아닌데.’

그에게 설득은 ‘올바른 일을 위해 말로 상대를 구슬리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협박은 ‘옳지 않은 일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일’이었으니.

그로서는 양심에 걸릴 것 없이 진실을 말한 거였지만, 자신의 사상을 굳이 강요하기도 싫었던 터라 타이니는 그냥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잘 처리했으니 됐지.”

“……그래. 그런데 이제 와서 탓하자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가 걸려.”

“응?”

“도플갱어, 완전히 다 잡은 거 맞아?”

“음, 그때 우리가 몇 마릴 잡았는지 확인을 못 해서…….”

“왜? 루나 양이 처리한 숫자랑 비교해 본다고 했었잖아?”

그 말에 타이니가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카일룸의 등판에 늘어진 그들의 그림자에서 대신 대답이 들려왔다.

[했는데, 계산을 못 했어.]

그 말에 에스티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롬벨과 합류해서 탐욕을 대비하기 직전에 그걸 확인하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그냥 타이니와 루나에게 맡겨 버린 사실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루나 양, 그때 날 만난 이후로 몇 마리나 처리했어요?”

[15마리 더.]

“그런데 우리가 총 몇 마리 잡았는지, 계산이…… 안 돼서. 그리고 당시 상황이 급하기도 했고.”

에스티나는 루나가 말한 숫자에 타이니가 예전에 말했던 머릿수를 합쳐서 단숨에 결론을 냈다.

“그럼 두 마리가 남은 거니까, 오트만 왕을 잡아먹은 놈을 빼면 한 마리가 더 남아 있다는 거네요. 이런…….”

“진짜!?”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갑자기 튀어나온 고함에 찔끔한 타이니가 다시금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데.

“젠장, 그럼 어디에 또 한 마리가…….”

에스티나가 답지 않게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남은 시간 동안, 그놈 찾아? 아직 40일 정도, 남았는데.]

40일. 질투의 강림 시간을 말함이다.

물론 수뇌부의 추정대로라면 질투가 제시간에 강림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예정된 시간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질투가 강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서 다시 49일이 지나면, 다른 군단들이 강림한다. 확실하지, 타이니?”

“전생에 글러터니는 분명히 그리 말했었어. 자신이 강림한 이후 49일 뒤라고.”

[그리고 크롬이, 강림 이후가 아니라, 차원 구멍이 완전히 뚫린 이후, 49일이랬어.]

“그랬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결론이었다.

지금으로선 그들이 세상 전체를 뒤지며 남은 도플갱어 한 마리를 찾으러 다닐 수도 없다.

그러니.

“……왕국 연합의 왕들만 확인하고 다시 랑켄 평야로 가자.”

“그래.”

[동의.]

그로부터 일주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국 연합에는 더 이상 도플갱어에게 잡아먹힌 왕이 없었다.

대신 그렇게 일행이 방문한 왕국의 왕들은, 그들을 크게 환대하며 인류 연합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약속했다.

물론 그 왕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 남은 도플갱어 한 놈. 어디로 간 걸까.

그 불안감이 남았지만, 당장은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 * *

질투와 싸울 정예들을 제외하고, 랑켄 평야에 모여 있던 인류 연합군은 이미 대륙의 중심부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병사들의 피로도를 고려해 이동 속도를 조절하되, 최종 목적지는 락스턴 왕국과 제국의 국경에 있는 이너빌로 잡았다.

다음 강림이 대륙 어디에서 벌어질지 모르기에,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관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랑켄 평야에 남은 것은 12대 기사들과, 다섯 성물의 가호 아래 영혼살을 버텨 내고 칠죄종과 싸울 최정예 천여 명뿐이었다.

그렇게 40여 일이 더 지나, 마침내 강림의 예정 시간이 도래했을 때.

랑켄 평야에 남겨진 최정예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끝없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강림해 주면 고마울 텐데.”

검제의 말에 주변의 모두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랑켄 평야를 물들인 마기를 완전히 씻어 내지는 못했지만, 칠죄종을 상대할 준비는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무엇보다 고작 넷이서 탐욕을 소멸시킨 전력도 고스란히 이곳에 대기 중이니.

전설에나 나오는 칠죄종의 강림을 대비하면서도 그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바로 어제까지 실버 팽과 아르곤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었던 타이니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크롬벨에게 다가왔다.

“만약 질투가 제때 안 나오면 다음 강림은 어떻게 진행될 거 같나, 크롬?”

“……다음 군단. 아니, 여태까지의 패턴을 보면 군단‘들’이겠죠. 그 군단들이 강림한 이후에나 질투가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게 확률이 가장 높죠.”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수록 짜증 나는 말이기도 했다.

“하씨, 치사한 자식들. 나라면 일단 들이박고 봤을 텐데.”

“그랬으면 우리도 참 좋을 텐데요.”

“……너 지금 나 욕한 거지?”

“그냥 진심이었습니다만? 뭐, 그렇게 들렸다면 유감입니다.”

“하…….”

만날 때마다 말다툼이 벌어지는 건 여전했지만, 이제 그들 사이에 이전처럼 살벌한 기세 싸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가 거슬릴 정도로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목표가 같다는 것만큼은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특히.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문나이트와 마도 기사 둘 다 힘 조절이 어설프던데요.”

크롬벨은 이미 타이니를 가슴속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할 만해. 동료들의 실력이 올라갈수록 우리가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데, 왜 안 하겠어?”

그에겐 타이니가 바로 지금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대단한 자…….’

사실 말이 대련이지, 방어로 일관하는 타이니에게 문나이트와 마도 기사가 공격을 퍼붓는 것이 지난 한 달간의 일정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가끔 사신이 끼어들기도 했다.

전장에서 죽다 살아나거나 격을 초월한 적에게 쫓겨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동료들.

타이니는 동료들이 그렇게 얻은 힘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스스로를 희생하느라 온몸이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였고, 덕분에 한 달 동안 매일같이 크롬벨과 갓 핸드에게 신성력 샤워를 받아야 했다.

괴물 같은 몸으로 오러로 인한 후유증까지 다 극복했다고는 해도,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여전할 텐데.

그 실력을 떠나, 경지가 상승한 동료들의 실험체(?)를 자청한 희생정신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고민해 봤는데, 너 그거…… 설마 반발 이용해서 자폭하는 데 쓰려는 건 아니지?”

이제는 이렇게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고 있었으니.

‘재미있는 자란 말이지…….’

마기 때문에 가끔 치솟는 폭력성도 이럴 때는 주춤하기만 했다.

“……무슨 소립니까?”

“마기 말이야, 마기. 그걸 굳이 남겨 놓은 이유가 설마 신앙 때문은 아닐 거 아냐? 목표 이루겠다고 영혼도 갈아 넣는 놈이.”

“하하, 상상이 과하시군요. 다르게 활용할 방법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 누가 걱정을 한다고 그래!! 나 참, 어이없게…….”

버럭 고함을 지르다 투덜거리며 돌아서는 타이니의 모습에 크롬벨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직후.

- 이제 곧 관측 시간이 다가옵니다.

지휘부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평야에 모인 이들 모두가 긴장감 어린 눈길로 장비를 점검했다.

이윽고.

우우우우우우.

콰지지지직.

차원문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 온다!!

그렇게 모든 이의 시선이 차원문을 향하는데.

“음……?”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안 나오나?”

“역시…….”

그곳에 있는 대다수의 얼굴에 안도와 실망감이 교차할 때까지, 차원문은 더 이상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의 시간이 더 지날 때까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결국 그들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예들은 이 차원문 앞에서 대기한다. 그리고 이후에 다음 강림 예정지가 측정되면, 그때 어찌 움직일지 정한다.”

사실상 인류 연합군 최정예 모두가 이 차원문 앞에 묶여 있는 셈이 되었지만, 다른 기책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40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

강림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 그 위치를 특정하는 차원 관측기가, 충격적인 예측을 전달해 주었다.

“어디?!”

“어디라고?!”

“그게…….”

소식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제각기 다양하게 변해 갔다.

혹자는 안도하고, 혹자는 어이없어하고, 혹자는 걱정하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표정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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