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정리
“시국이 이래서…….”
“그래서 전하께서…….”
라프탄은 기사들이 다가오는 걸 보고 몸을 벽에 더욱 바싹 붙였다.
설마 쭉정이들만 남아 있다는 그리마의 왕궁 기사들에게 들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그동안 잠행을 통해 길러진 습관이었으니까.
그렇게 완전히 벽으로 의태하여 기척을 죽인 그는, 기사들이 지나가자마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국의 왕성 내부를 홀로 활보하다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눈동자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것만큼이나, 인류 연합 내부를 단속하는 일도 중요하다.
- 너희들이 그 중심 역할을 해 줘야겠다.
나아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만 하던 그에게 비로소 삶의 목적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과분하게도, 공작가나 제국도 아닌 인류 전체에 공헌할 수 있는 임무였다.
- 이름을 널리 알리진 못할 거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너를,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 부탁한다, 검은 날개. 제이…… 그리고 라프탄.
대륙에서 명망 높은 최고의 기사, 소드 엠퍼러가 그것을 보증했다.
게다가 황실의 정보 조직인 용의 눈까지 이번 일에 협력하고 있다는 것은, 제국의 황제도 간접적으로나마 이 임무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번 일만 해도, 그들의 손을 빌려 대륙 전역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사전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니.
‘반드시 해낸다.’
- 가리온의 왕성에는 타이니 경이 직접 갔다.
- 그곳 일을 처리한 후 그리마의 왕성에도 들를 예정이라지만, 한시가 급한 마당에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맞는 말이었다. 타이니 놈이 누군가를 쉽게 설득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심지어 국운이 걸린 일이니, 가리온 왕실에서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타이니의 신분으로 암살을 할 수도 없을 테니.
- 그리마의 왕을 죽여라. 마족의 짓으로 위장해서.
이런 임무가 내려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섰다.
- 제가 하겠습니다.
- 라프탄? 자넨 암살 훈련을 받은 적도 없지 않나?
- 제가 지금 그리마에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 그래도…….
- 맡겨 주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그 사명감이 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일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 랑켄 평야에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거야 전하께서…….”
다시금 다가오는 인기척을 피해 벽에 의태하면서, 라프탄은 어금니 뒤쪽에 심어 둔 가짜 이빨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 혹시나 실패하여 정체가 발각된다면, 우리는 너와의 관계를 전면 부인할 것이다.
-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걸 먹고 죽어 다오. 흡사 마족이 죽는 것처럼 온몸이 마기에 오염되겠지만, 고통은 없을 것이다.
지금 대륙엔 도플갱어라는 것들이 판을 친다고 하였던가.
그러니 의태 능력이 있는 자신이 이 환단까지 쓴다면, 최악의 경우라도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마족에게 씌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임무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레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괴물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 마적단 같은 거 만들 생각은 안 해 봤어? 막 아무거나 부수고, 약탈하고, 강도질을 하는 거 말이야. 세상이 싫었다며?
참 무시무시한 질문이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도…….
- 제 분노를 엉뚱한 곳에 풀려고 한 것이 얼마나 추한 일이었는지 깨달았단 뜻입니다. 명예롭게 살진 못해도,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랬더랬지.
만약 그때 자신이 녀석과 얽히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도.
‘정령술로 사람들 등쳐 먹고 살았겠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럽고 추했다.
그런 식으로 오래 살아 봤자 남는 게 뭐가 있을까.
- 내 이름을 세상에 새길 거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자긍심이나 자부심의 상징과 같은 녀석.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본 자신에겐, 더 이상 추한 삶에 대한 미련 따위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삶.
그 삶에 대한 동경을 그대로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그렇기에 라프탄은,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우우웅.
‘이 정도야 쉽지.’
제국 황궁의 마나 동결 결계에 한참을 못 미치는 그리마의 수호 결계는 자신의 잠입을 막지 못한다는 것.
6단계의 정령술사, 그리고 이제는 전투 훈련을 받으며 2단계 마나유저로 성장한 자신이다.
‘난 여기 죽으러 온 게 아니야.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살아 돌아간다. 그리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다.’
발렌티아 공작가와 제국 황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라프탄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신속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그리마 왕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화려한 문.
그는 그 앞에서 시간을 가늠해 가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혹시나 자신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노파심에 불과했다.
‘지금쯤…….’
그렇게 기다린 지 1시간 정도가 지나, 달이 동쪽 하늘에 비스듬히 걸렸을 무렵.
왕실의 시녀들이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빙고!’
확인한 정보대로였다.
침전에서 식사를 마친 왕의 식기를 챙겨 나오기 위함이다.
이번 강림 이후, 각국의 국왕들은 도플갱어라는 괴물들의 등장으로 인해 칩거를 권유받았는데.
그리마의 왕은 그 권유대로, 숙식과 집무마저도 보호 마법이 걸린 침전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호 마법은.
딸랑.
“들어가겠사옵니다, 전하.”
‘지금.’
이 시녀들처럼 사전에 등록된 사람이 문을 열 때만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라프탄은 그 틈을 타서 소리 없이 방 안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찾았다.’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같은 색의 풍성한 수염을 귀밑부터 하관까지 이어지도록 기른, 주름살 많은 노인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마 국왕, 오트만 2세.’
강림 이전,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뻔했던 악마 릴리스에게 조종되었다가 수도에서 일어난 비극 속에서 타이니와 마도 기사의 조력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자.
그래 놓고서는 최근 연합에 병력 철수를 요구한 뻔뻔한 자.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그러거라.”
왕의 말에 시녀들이 그대로 문을 닫고 물러날 때.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라프탄은 방에서 나간 시녀들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잠시간 왕을 지켜보며 호흡을 골랐다.
그런데 그때.
“인간들은 참, 재미있단 말이지?”
얌전히 창가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던 왕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뭐?’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당혹스러운 마음에 좀 더 기척을 숨겨 보려는데.
오트만 2세가 뒤를 돌아보더니, 소문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라프탄이 의태한 벽을 바라보며 웃었다.
설마…….
“약자가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면 바로 쳐 죽이면 될 것을, 괜히 뒤에서 요상한 짓거리를 한단 말이야. 나야 그 덕에 편해졌지만…….”
스릉.
“명분이라니, 그거 참 이상하지 않아?”
이윽고 왕이 허리에 찬 예식용 검을 꺼내 자신에게 겨누는 순간, 라프탄은 일이 꼬였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즉시 결단을 내렸다.
‘라미!’
우우웅.
의지가 움직이는 순간, 그의 영혼의 파트너가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소리도 없이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황상 거대화나 피어 같은 능력을 쓸 수는 없었지만, 라미는 의태만 해도 충분한 전투 스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스스슥.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스아아아.
몸을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주변 환경과 완벽히 동화했으며.
콰드득.
적을 덮치는 순간에는 그 어떤 칼날보다 날카롭게 발톱과 이빨을 세워 목표를 물어뜯었다.
그래, 그랬어야 했다.
콰직.
늙은 왕의 검이 라미의 머리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 크아아아아앙!
“정령이라……. 정말 혐오스럽군.”
미간에서 시작된 강력한 통증에 라미가 역소환되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사실 실체화된 정령인 라미에겐 단순한 육체적 통증쯤이야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빌어먹을!’
우우웅.
왕의 검에는 정령이 가장 싫어하는 진득한 마기의 결정체, 칠흑같이 새까만 암흑 오러가 덧씌워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쿨럭.”
라프탄 역시 라미가 역소환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의태가 잠시 풀리며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왕이 웃었다.
“잘 왔다, 침입자. 안 그래도 너무 심심했는데 말이야. 설마 소리를 지르지는 않겠지?”
암흑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벽을 향해 겨눈 왕이 입을 쭉 찢어 보이자, 그 안에서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는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빛을 발했다.
……X발.
‘도플갱어.’
X 됐다.
똥파리 잡으려다 똥을 밟았…… 아니, 똥통에 빠진 꼴이라.
‘타이니 녀석, 다 잡았다는 거 아니었어!? 젠장, 젠장! 빌어먹을!’
라프탄은 황급히 다시 의태를 써서 몸을 숨긴 채 움직였지만.
“참고로 이 방에 걸려 있는 보호 마법이 제법이더라고. 나도 너와 비슷한 방법으로 들어왔거든. 시녀는 참 맛이 없었단 말이지.”
왕, 아니 괴물의 눈동자가 그대로 자신을 따라오는 게 보였다.
‘X발, 무슨 색적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재수 한번 더럽게 없군.’
그 순간, 라프탄은 조용히 놈을 처리하거나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대로 고함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악!!”
- 악악악악악악!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넓지만 좁은 방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고함이 아니었다.
라미의 3번째 권능, 피어의 힘. 약자를 굴복시키고 스스로의 기세를 북돋우는 정령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다니까.”
살벌하게 웃는 괴물의 얼굴은, 피어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어느새 라프탄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암흑 오러를 담은 검이 그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푸우우욱.
“끄아악!”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라프탄은 한껏 악을 썼다.
허벅지가 꿰뚫린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목소리를 듣고 밖의 기사들이 들어와 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 반응하는 것은 눈앞의 왕, 아니 괴물뿐이었다.
“더. 더! 더! 비명을 질러라, 인간!”
환희에 찬 얼굴로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괴물은 라프탄이 비명을 지를수록 더욱 즐거워할 뿐이었다.
“사람 살려!!! 사람……!”
“끌끌끌끌. 내가 아까 ‘소리를 지르진 않겠지?’라고 말했다고 해서, 정말 딱 그 반대로 행동하는 건가? 제대로 낚였구나. 재미있어. 인간이란 생물은 참 재미있단 말이지.”
놈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라프탄은 더 이상 악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던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일어선 뒤, 챙겨 온 검을 꺼내 들었다.
챙.
“오호? 싸워 보려고?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지랄 마, 더러운 마족 새끼가!!”
- 가아아아……!
물론 방 밖으로 소리를 전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발악, 아주…….”
히죽.
“……좋아.”
어느새 다시 눈앞에 나타난 괴물의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희미한 마나가 둘러진 라프탄의 검이 두부처럼 맥없이 잘려 나갔고, 이내 그 검을 들고 있던 그의 오른손까지 놈이 그리는 궤적에 들어가고 말았다.
스각.
종잇장이 갈라지는 것 같은 아주 가벼운 소음.
그 순간 라프탄은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자 비어 버린 오른쪽 어깨가 눈에 들어왔고, 이내 팔이 잘린 단면에서 피 분수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으아아악!”
심리적 공황과 육체적 통증이 그대로 느껴지며, 처음으로 의도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괴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한 나라의 국왕을 죽이러 온 암살자가, 진짜 아파하는 거야? 뭐야? 그럼 안 되잖아? 얘가 아는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건데?”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콕콕 짚어 가며 히죽 웃는 괴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라프탄은 재빨리 놈과 거리를 벌렸다.
물론 부질없는 반항이라는 것은 알지만.
- 난 포기 안 해. 절대.
어느새 동경의 대상이 된 ‘친구’의 말이 다시 떠올랐기에, 이대로 죽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 녀석이 날 친구라고 생각해 줄까?’
이내 그런 생각이 떠오른 탓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괴물 또한 다시 히죽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일부러 팔만 자른 건데.”
대항은 부질없다. 차라리 방에 걸린 보호 마법을 뚫고 나가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어어. 그쪽으로 눈 돌리면 섭섭하지.”
적어도 이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놈에겐 날 단번에 죽일 생각은 없어. 어떻게든 빈틈이 생길 거야…….’
라프탄이 그런 기대로 눈을 굴리는 동안.
“그럼…….”
히죽.
“이번에는 다리……?”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괴물의 몸이, 어느 순간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흡!?’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오르는 순간.
“뻥이지롱! 낄낄낄.”
푸슉.
비웃음과 함께, 그의 왼쪽 옆구리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크…….”
털썩.
한순간에 어질어질해진 라프탄이 제대로 착지도 못 하고 주저앉자.
“어, 어? 벌써 반항을 포기하면 안 되는데? 나 그동안 진짜 지루했다고. 좀 더 즐기게 해 줘!”
괴물이 히죽거리며 끔찍한 소리를 토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창문을 깨고 날아들어 온 새까만 무언가가, 괴물의 몸을 강타하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꽈아아아아앙!
“컥!?”
콰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전하!?
- 침전이다!!
그에 방 안의 보호 마법이 깨어져 나가며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순간.
“나랑 즐기자, 이 X발 놈아! 감히 내 친구를……!!!”
친숙한, 그리고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라프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