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47화 (347/500)

347화. 설득, 성공적

“저기가 왕궁이야.”

“음…….”

휘이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사위를 휘감는 상공, 독수리 정령 카일룸의 등 위에서 타이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전투의 전장이었던 랑켄 평야의 주인, 가리온 왕국. 그곳의 왕성은 그 나름의 멋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엔 그 고풍스러운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 설령 왕들이 도플갱어가 아니더라도 죽여라.

- 마계 대전을 극복할 때까지, 인류 연합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머릿속에 맴도는 검제의 말이 마음에 걸렸으니까.

- 이러다 세상 망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망하겠다.

그 핑계가 비록 이기적이라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왕을 악인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막말로 남의 목 날아간 것보다 자기 손톱 밑에 박힌 가시에 더 괴로워하는 게 사람이다.

‘세상의 멸망보다 자신의 파산이 더 무섭다는 게,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대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악인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자를 죽인다?

그건 타이니의 사상과도 미묘하게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 갈등을 느꼈을까.

“일단 목적은 설득이야. 알지?”

에스티나 역시 한 번 더 당부의 말을 건넸다.

“알고 있어.”

도플갱어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공식적으로는 어떤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은 초인.

인류 연합 내부 균열을 봉합하기 위해 광휘의 기사가 나서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했으나, 에스티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타이니,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음? 갑자기?”

“대답해 봐. 빨리.”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갸웃한 타이니였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부숴야지?”

“열쇠를 찾아야지!!!!”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그 태평스러운 대답에 에스티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생각이 왜 자연스레 그쪽으로 흘러가 진짜!? 잇!”

신경질적으로 타이니의 옆구리를 꼬집던 에스티나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몸뚱어리만 튼튼해서…….”

그녀는 루나처럼 독하지 못했으니, 꼬집기 위해 오러를 쓴다는 발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오크 쪽 설득하는 게 저릭이고, 왕국 연합을 설득하는 게 타이니라니.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야…….”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대표적 인물 둘이 무려 ‘설득’을 맡은 상황이다.

“불안할 만해.”

에스티나의 말에, 뒤에서 듣고 있던 루나마저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녀 역시 타이니와 같은 가문이며 무소속이라는 이유로 이번 여정에 따라붙은 것이다.

“그나마 저릭 아저씨는, 오크들이 잘 따라. 근데 여기 왕이, 타이니 따를까?”

루나의 그 말에는, 검제가 타이니에게 전한 전성을 듣지 못한 두 사람이 같은 걱정을 하는 이유가 완벽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이니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차라리 왕이 진짜 도플갱어였으면 좋겠다.’

그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시 내가 따라오길 잘했어. 타이니 너, 내가 말리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았지?”

인간과 대립하던 오크나 드워프와는 달리, 정령사와 엘프는 선하다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기에 에스티나까지 사절 격으로 동행을 자처한 것이었다.

무려 오러유저 셋이 동행하는 사절.

굳이 시종을 붙이는 등의 구색을 갖추지 않아도,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지방의 왕국에는 충분한 압박이 될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불안한 점이 있다면.

“……내가 대표로 말해야 하잖아?”

본래의 명분상 광휘의 기사 타이니가 사절의 대표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엘프는 착하다는 이미지가 있더라도, 에스티나는 종족을 대표하는 신분인지라 각국의 이권에 관해 얘기하기에 민감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음……. 우선 예상 대화를 생각해 볼까?”

“그럴 시간 없어. 일단 설득해 보고, 안 되면 그때 생각하자.”

“안 되면 뭘 어떻게…… 타이니!!”

타이니는 에스티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카일룸의 위에서 그대로 지상을 향해 뛰어내렸다.

* * *

가리온 왕국의 수도, 앱실론 왕성.

“흐아암…….”

왕성 수비군으로 복무 중인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하품을 하다가 순간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곁에 있는 동료 롬멜은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 본 사람 없구나.’

인류의 생존이 달린 전쟁이 왕국의 랑켄 대평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건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왕성의 정예들이 차출되고 수비대 소속인 자신의 교대 업무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빼고는, 그에게 실질적으로 체감되는 것은 없었다.

‘아니다. 뭐, 이게 심각한 거 맞지.’

밤을 새우고 나서 정오까지 근무를 서다니.

이따위로 근무 시간을 정한 분대장 놈의 면상을 찍어 버리고 싶었지만, 모두가 피곤한 상황이니 참아야 했다.

“멜, 일어나. 곧 교대 시간이야.”

“으, 응? 아, 하아암. 벌써……?”

“아마도 곧…….”

에릭이 하늘에 떠오른 해를 보며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보려는데.

그런 그의 눈에, 점점 커지고 있는 새까만 무언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얼핏 사람 같은 형태였는데, 왜 하늘에서……?

‘잠이 덜 깼나?’

순간적으로 멍하니 그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 사람이다!”

롬멜이 먼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현실감을 일깨웠다.

그 순간.

꽈아아아앙!

우르르르릉.

쩌저저적.

그들의 뒤쪽에서, 왕성의 돌바닥이 부서지고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 모양 돌덩이였나?

그 비현실적인 상황에 혼란스럽기만 한데.

“이거 생각보다 먼지가 많이 나네.”

솟구치는 흙먼지 속에서 정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작정 뛰어내리면 어쩌자는 거야!? 조용히 착지할 수도 있었잖아!?”

“이목을 좀 끌어야지. 우리가 지금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잖아.”

“동생. 행동력 짱.”

심지어 한 명이 아니다?

혼란 속에서도, 에릭은 훈련받은 대로 피어오르는 먼지 속 인영을 향해 창을 겨눴다.

“누, 누구냐!?”

“저, 정체를 밝혀라!”

롬멜 역시 그를 따라 소리를 지르자, 두 동료의 시선이 부딪쳤다.

똑같이 겁에 질린 표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이내 눈빛의 대화를 시작했다.

- 미친놈아, 소리를 왜……!?

- 네가 먼저 질렀잖아!

하늘에서 떨어져서 지상을 폭파시켜 버린 괴물들을 상대로, 고작 병사 둘이서 뭘 할 수 있을까.

- 우린 죽었다.

- 엄마 보고 싶다.

원래부터 친하기는 했지만 서로 이렇게까지 텔레파시가 통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죽음을 앞두고 보니(?) 특이한 능력이 생긴 걸까.

그런 헛생각까지 들던 그때.

휘이이이잉.

한순간 불어닥친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날아가고, 이내 얕고 넓게 패인 구덩이 위에 서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중 검은 머리를 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치도록 살벌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병사들인가?”

“예, 옛!?”

“국왕 전하께 전갈을 부탁하지. 광휘의 기사를 비롯한 12대 기사 중 세 사람이 전하를 뵙기 위해 전장에서 바로 날아왔다고.”

“우린 왜, ‘중’에 포함?”

“시끄러…….”

흙먼지를 날려 버린 노을빛 마나와 검은 마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그 앞에 선 가녀린 양 두 마리가 덜덜 떨고만 있던 그때.

“아, 너무 겁먹지 말아요. 우린 인류 연합군 ‘동맹’의 사절로서 온 겁니다.”

따스한 녹색의 바람이 그들의 정신을 환기시켰다.

“사, 사절이시라고요?”

“예. 그러니 국왕 전하께 전갈을 부탁드릴게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엘프가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을 달래자.

“옙!”

한순간에 영혼이 지옥과 천국을 왕복한 두 사람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성 안쪽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 * *

“저 사람들이…….”

“신분 확인했어?”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저건 오러가 맞습니다. 누가 흉내 낼 수 있을까요.”

“그럼 정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귀를 간지럽힐 때.

타이니는 피로에 찌든 얼굴의 늙은 왕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아니군.’

도플갱어가 아닌 인간이다.

판단이 서는 순간, 그는 왕이 내려다보는 융단 위에서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쿵.

“광휘의 기사 타이니 외, 12대 기사 중 2인이 가리온의 군주를 뵙습니다.”

“군주를, 뵙습니다.”

루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타이니의 행동을 따라 하는데.

에스티나는 왕 앞에서도 고개만 살짝 숙이며 그대로 서 있었다.

“저 엘프는……?”

“12대 기사라면, 엘프의 수장이니까…….”

지켜보는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인류 최강의 기사와 세계수의 수호자, 그리고 사신……인가?”

얼굴만큼 노쇠하고 지친 음성의 주인이 씁쓸한 어조로 그 인사를 받았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인사치레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타이니는 마음이 급했다.

‘이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거더라?’

지금은 엄연한 전시 상황이니 마음 같아서는 거추장스러운 예의 따위 지키고 싶지 않았지만, ‘설득’을 하러 온 입장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타이니가 머릿속으로 귀족의 예법을 억지로 떠올리려 하고 있을 때.

“병력 철수 건 때문에 12대 기사들이 직접 온 것인가? 그것도 고작 하루 만에? 대단하군. 이 노구에게는 과분한 성의야.”

노왕이 먼저 허례허식을 집어치우고 직접적으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심지어 일국의 군주인 스스로를 ‘늙은 몸’이라 칭하면서.

“……맞습니다. 전하께서 다시 한번 연합군의 사정을 고려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연합군의 사정이라…….”

“인류는 멸망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직 몇 번의 고비를 더 넘어야 하는데, 병력 철수와 지원 거부는 연합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 다시 결단을 내려 주십사 하는 마음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오! 오늘따라 말이 잘 나오는데?

타이니가 속으로 스스로의 언변에 감탄하는 순간.

“……그 전쟁 때문에 가리온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힘든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금은…….”

“일주일 전에, 내 셋째 아들이 랑켄에서 죽었다는 부고를 받았네. 정의감이 넘치는 녀석이었지.”

“……예?”

매끄럽게 나온다 싶었던 말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타이니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에스티나에게로 향하는데, 그녀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도 몰라. 처음 들어.]

그들은 들은 바 없는 일이었지만,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장에서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니까.

게다가 실질적인 전력도 아닌, 왕국 연합의 일부인 가리온 왕국의 셋째 왕자가 전사한 일이 그들에게까지 보고가 될 리도 없었다.

혹은 보고되었지만, 그들이 흘려들었을 수도 있고.

“……아들의 소식은 둘째 치더라도, 우리의 정예 병력들도 벌써 사분지 일이 전사했네. 랑켄 평야도 절반이 오염되었고. 묻겠네, 기사여. 이 손실을 우리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

“광휘의 기사,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기사여. 그대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몇 번의 고비가 더 남았다고. 그럼 그 전쟁을 이겨 낸 뒤에, 이 왕국은 어찌 될 거 같은가? 존속이나 할 수 있겠는가? 대답해 주시게나, 경.”

훅 들어온 국왕의 반격은 타이니의 눈동자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국왕의 노쇠한 눈빛은 짙은 피로감 속에서도 굳은 결심을 품고 있었다.

완고해 보이는 노인이 명분을 쥐고 고집을 품었다.

즉, 답이 없다.

[……어떻게 하지?]

타이니가 에스티나에게 전언으로 급히 답을 구해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말해. 가리온의 존속과 영토, 손실 보상에 대해서는 인류와 모든 종족의 이름으로 보장하겠다고. 그것도 부족하면…….]

그러나 그녀의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가리온의 뜻은 이미 정해졌네. 연합군의 입장을 헤아려 달라고 했던가? 반대로 연합군에서 우리 왕국의 입장을 헤아려 주었으면 하네. 돌아들 가시게.”

왕은 자신의 할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돌아가 주십시오, 기사님들.”

왕실 기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일시에 일행을 포위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애초에 마음을 굳히신 모양이군요, 전하.”

쾅.

“엇!?”

“우와악!”

우당탕탕.

그 순간 터져 나온 노을빛 기세가 그런 기사들을 그대로 찍어 눌렀다.

굳이 손을 쓰지 않고도, 뿜어낸 기세만으로 왕실 기사들을 혼란에 몰아넣은 타이니.

“죄송하지만, 저희도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는 입장이라.”

“마, 막아!”

그가 옥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다시금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파바박.

“조용. 움직이지 마.”

일순간 기사들의 갑옷 사이에 박힌 작은 뼈 칼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구속했다.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쉰 엘프가 이마를 짚을 때.

“뭐, 뭐 하는 건가!? 자네가 이러고도 기사……!”

분노한 얼굴의 노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말은 집어치우시죠, 영감 전하. 아니, 전하 영감인가?”

타이니는 더없이 무도한 말로 노왕의 말문을 막았다.

그리고 노왕의 앞을 막고 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눈을 마주했다.

“제 일행이 뭐라 자세히 설명해 줬는데, 내가 그걸 전부 기억하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꿀꺽.

검은 눈동자 아래, 이글거리면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늙은 왕이 침을 삼키는 순간.

“기억나는 내용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이 왕국의 존속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지원을 계속해 주십시오.”

“뭐, 뭐라?”

코앞까지 다가온 초인이 특별히 무슨 짓을 한 게 아닌도 그의 눈 속에서 지옥의 풍경을 본 노왕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으로 이 왕국의 존속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걸로 부족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턱없이 부족하다.

왕은 그리 말하려 했다.

하지만.

쿵.

“아니면, 내 손으로 먼저 이 왕국을 지워 버릴까요? 왕국은 몰라도 왕실 정도는 확실히 지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르르릉.

“꺄아악!”

“뭐, 뭐야!?”

엄청난 말과 함께 솟구친 노을빛 기세가 대전의 천장과 바닥을 뒤흔들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파리해진 안색의 노왕이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 냈다.

“불가능할 거 같습니까? 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럴 수 있다 쳐도, 그랬다가는 우리의 정예들이 용서치…….”

우르르르릉.

쩌저저적.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려던 왕의 말은, 결계 속에 보호받던 대전의 대리석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지는 순간 끊어졌다.

“용서하겠죠. 죽기 싫으면 말이죠.”

이게 사람이 기세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던가?

왕실의 온갖 사료를 통해 수많은 전설과 신화를 접한 왕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시겠습니까, 전하.”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는 괴물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하지만 왕은 알 수 있었다.

거절하는 순간, 이 괴물은 정말로 왕실 멸망을 실행에 옮길 수도 있다는 것을.

“……자네 이름으로, 왕국의 존속을 보존한다고 했던가?”

결국 왕은 코앞까지 다가온 멸망의 위기를 체감하며 고집을 꺾어야만 했다.

그러자.

“물론입니다, 전하.”

멸망이 미소로 응답했다.

설득,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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