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변수
“끄르르륵.”
- 아, 안 돼!
“돼!”
사지가 잘린 구울 로드, 프린스가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지르며 찬란한 빛살 속에서 석상처럼 굳어 갔다.
신성력과 마나가 결합된 크롬벨만의 봉인 마법이 완벽하게 장군급 악마를 봉인한 뒤로, 남은 언데드 병단의 발악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나절 후.
전투가 끝났다.
“이, 이겼다…….”
“어, 어무이…….”
“우와아아악!”
“이겼다고! 우리가 이겼어!!!”
마지막 남은 언데드가 쓰러진 순간, 전장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울고, 웃고, 끌어안고, 절규하는 온갖 군상들이 저마다 극한에 다다른 감정을 토해 내며 랑켄 평야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다 이내.
“릭, 죽었냐? 죽었어!? 야 인마!!”
“내 팔……. 내 팔!!!”
“아아악!”
참혹한 현실을 직시한 대다수 병사들의 눈빛이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할 때쯤.
인류의 수뇌부들은 차원문 근처에 주저앉은 타이니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잘했다.”
“수고했어, 타이니.”
“고생 많았습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홀가분함이 맴돌았다.
전쟁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고비를 넘었다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웃음을 만든 것이다.
‘간사한 거지.’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의 특성이라.
타이니 역시 홀가분한 표정으로 동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덕담을 이어 갔다.
“별거 아닙니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요, 뭐.”
“…….”
그 겸손이 아직 남아 있는 미래의 재앙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는지, 한순간 분위기가 굳었다.
그에 타이니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많이 남은 게 아니라 일단 한고비는……. 후, 죄송합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다.
털썩.
석상처럼 굳어 버린 프린스의 몸뚱어리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자연스레 타이니의 시선이 돌아갔다.
‘카르마에 대한 것부터 확실히 물어봐야지.’
그렇게 결심하며 크롬벨을 바라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야, 저놈? 왜 여태 저 모양이야?
“크롬벨 경.”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전보다 확실히 예의가 발라진 크롬벨이었지만, 타이니는 그의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마기 서클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히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방법을 말해 줬는데? 알아들은 거 아니었어?’
그런데 타이니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크롬벨이 먼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이제 칠죄종이 원래대로 움직이냐가 문제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무리 자신감이 넘치는 칠죄종이라도, 이미 둘이 소멸했습니다. 과연 자신의 군단이 전멸하고 탐욕마저 소멸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래대로 49일 뒤에 강림할까요?”
그 말은 타이니가 처음 하려던 말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차원문으로 마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도 확인했어. 게다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강림을 안 한다고? 탐욕이 강림할 때 반신의 오만 어쩌고 운운했던 것은 너였어.”
석상처럼 굳어 버린 프린스의 상태를 확인하며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자, 크롬벨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이 아닙니다. 기껏 차원 장벽을 뚫어 놓았으니, 강림을 하긴 하겠죠. 다만 우리가 예상하는 시기에 할지 안 할지의 문제입니다.”
“할지 안 할지? 무슨 뜻입니까, 크롬벨 경?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사이 다가온 검제가 타이니 대신 반문하자, 자연스레 크롬벨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칠죄종이 강림하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최소 기간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
“예를 들면, 당장 이 구울 로드를 우리가 소멸시켜 차원 장벽이 뚫린다 해도, 질투가 내키지 않으면 강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타이니 경, 당신의 전생에서도 폭식이 딱 343일 만에 강림하진 않았을 텐데요?”
“허…….”
“그럼, 녀석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질투를 경계하면서, 그다음에 강림할 칠죄종의 군단을 상대할 준비도 해야겠지요.”
“으음.”
그 말에 듣고 있던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제가 질투라면 다음 군단이 강림할 때까지는 기다릴 것 같습니다. 폭식은 몰라도, 탐욕이 죽은 것은 쉽게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질투는 의심하는 자이니, 특히나 조심스레 행동할 확률이 높습니다.”
“죄악의 이름, 그 신성이 부여한 성정은 변하지 않는다라…….”
검제가 크롬벨의 지난 충고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찜찜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타이니가 다시 반문했다.
“꼭 그러리란 법 있어?”
“물론 놈들이 반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강림한다면, 그러니까 저놈을 죽이는 순간 튀어나온다면 우리야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만……. 그럼 전 놈을 바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크롬벨의 눈빛이 마치 다 너 같은 줄 아냐고 말하는 듯해 순간 울컥했지만.
어느새 모여든 동료들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마당이라, 타이니는 ‘끙’ 소리와 함께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49일씩 7번, 그게 최소 기간이라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공작. 적어도 고대에는 지금처럼 장군들을 갈아 넣어서 강림의 시간을 앞당긴다는 극단적인 술수는 쓰지 않았었지요.”
“그때에 비해 놈들이 발전하는 바람에 우리는 곤란한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만 많아지겠군요. 그럼 어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제가 칠죄종의 심리를 다 아는 건 아니니, 섣부른 짐작이야 할 수 없지요. 실제로 여태까지의 예상을 뒤엎고 질투가 곧바로 강림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겠지요.”
“다만, 요즘 들어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무슨……?”
“분명히 고대에 비해 마계가 훨씬 유리한 입장인데, 왜 이런 극단적인 술수를 고안했을까 하는 의문이요.”
크롬벨의 말은 모여든 영웅들 사이에 침묵을 가져왔다.
그러다 이내.
“칠죄종에게 직접 묻지 않는 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네요. 그런 걸 고민할 시간에 대책을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에스티나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끊어 냈고, 크롬벨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그럼 대체 그 말은 왜 꺼낸 거야?”
순수한 궁금증을 참지 못한 타이니가 한마디를 던지는 순간.
다시금 날카로운 눈빛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한 번쯤 생각해 보시라는 말이었습니다.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이 답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왜인지 그것이 이번 마계 대전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이 상황에 예감이라니…….”
“다른 분들은 몰라도, 타이니 경은 제 말을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죠?”
“응. 내 동생, 똑똑해.”
옆에 있던 루나의 엉뚱한 대답에 다시금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놀랍게도 타이니는 정말 크롬벨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 단어가 그에게 와닿았다.
‘예감이라…….’
반신의 벽을 두드리게 되면서 얻은 번뜩이는 영감.
희미한 근거만으로 논거를 뛰어넘어 결론에 이르는 그 능력은, 이미 타이니가 장군의 생명을 희생하면 강림 시간이 빨라진다는 사실을 맞춤으로써 그 가치를 증명했다.
게다가 그와 수준이 비슷한 크롬벨까지 그런 예감을 느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흠, 일리가 있어. 내 직감도 그러하네.”
하이넨이 그렇게 끼어든 순간, 그것이 개소리일 확률이 더 높아졌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하아…….
“……일단 염두에는 두는 걸로 하지. 어차피 당장 답을 구할 수는 없으니.”
타이니는 크롬벨의 말에 긍정하는 대신 보류를 택했다.
그러자 바로 검제가 결론을 냈다.
“일단은 49일 뒤, 혹은 저놈을 죽인 뒤 질투가 강림하는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때가 되어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시 고민해 보지요.”
그러자 이내 초인들 사이에서는.
“그럼 답 없는 문제 대신 당장 해야 할 일에나 집중하지. 연합군의 편성은 어떻게 할 것이며, 위치는 어디로 옮길 건가?”
“일단 성물의 가호를 받을 수 없는 대다수 병사들은 미리 이동시켜 놓는 게 나을 겁니다. 칠죄종과 싸울 사람은 정예들만으로 충분합니다.”
“병참에 대한 것도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 겨울도 끝나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국의 오렌 평야도 지반이 박살 나고 이곳 랑켄 평야도 오염됐는데, 내년 소출이 벌써부터 걱정이군요. 이대로라면 전쟁이 최소 내년까지 이어질 텐데…….”
“그 무기, 폭뢰라고 했나? 그거에 관해서도 할 말이…….”
타이니가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긴 대화는 타이니의 눈빛이 완전히 흐려진 뒤에나 끝이 났고, 당연히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타이니는 멍한 얼굴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다음날, 검제가 회의 결과 중에서 그가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추려서 전해 주었다.
“일단 연합군의 총병력은 일주일 이상 휴식을 취한 뒤에 대륙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행군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중심부?”
“아무래도 다음 강림의 장소가 어디일지 모르니, 일단은 이동에 용이한 곳을 선점할 생각이다. 제국과 왕국 연합의 국경 부근을 목표로 움직이다 보면 다음 강림의 위치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
“그러다 또 여기면?”
그 쓸데없는 태클에 검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질투의 강림이나 대비하거라.”
“쩝…….”
사실 이제 타이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여태 해 왔던 일의 반복뿐이었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최상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싸한 느낌이 들지?’
크롬벨이 한 말 때문인지, 계획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 씨…….”
쫌!!
‘제발 다른 변수 좀 없게 해 주세요, 여신님.’
자신도 모르게 생전 찾지도 않던 신을 찾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연합군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가리온 왕국과 그리마 왕국, 그리고 자유 도시 연합에서 무기와 식량 지원을 거절했습니다. 게다가 병력을 돌려보내 달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습니다!”
강림과 전투만을 신경 쓰고 있던 연합군에게,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왕이 미친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검제마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지를 만한 소식.
“더 이상 병력 손실과 자금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답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자기들 나라가 먼저 망하게 생겼다고…….”
“세상이 멸망한다고!! 그 나라 왕실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할 머저리들만 있는 거야?!!”
“대가리에 똥만 찬 머저리들이!!”
“아니, 그리마는 마족 때문에 그 난리를 겪었으면서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일제히 분노를 터트리는 순간.
거기에 더 안 좋은 소식이 더해졌다.
“제국의 서부 국경에 모여든 오크들의 무력 시위가 격해지고 있습니다. 저릭 공이 직접 가서 설득하는 게 빠를 것 같다고…….”
“그건 또 뭐야!”
“대체 지금 상황이 어떤 줄 알고……!?”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저릭에게 몰리자.
“젠장, 내가 해결하고 오겠소. 뭔가 확실히 잘못된 게 틀림없소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오크 대전사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전략이나 정치에 관해서 얘기할 때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타이니가 바로 반응했다.
“가만, 그거 그림자 군단 때문에 생긴 문제 같은데?”
“뭐?”
“오크 부족에 숨어든 도플갱어들 쳐 죽이면서 문제가 남은 듯한데, 잠깐만……. 루나!?”
타이니가 시선을 돌리자 눈이 마주친 루나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죽인 애들, 몇 놈 남아 있을 것 같긴 했는데…….”
그 대답에 타이니 역시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는데.
“혹시 그럼 그 왕국 쪽에도……?”
“무슨 뜻이냐? 자세히 말해 봐!”
“그게…….”
초인 중에서 가장 정치적 소양이 얕은 타이니와 루나가 연합이 당면한 문제의 원인으로 유추되는 바를 설명했다.
꽤 그럴듯한 얘기에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가 찾아가서 확인하고, 맞으면 때려죽이고 올게.”
타이니가 아주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어놓았다.
물론 당연하게도 바로 반발이 일어났다.
“무슨 미친 소리냐!!?”
“만약에 아니면!? 아니, 맞더라도 왕을 때려죽이는 행위 자체가…….”
“그럼 어쩌려고? 이대로 연합군 쪼개지게 놔둬? 정말 도플갱어가 왕을 잡아먹은 거라면 확인 가능한 건 나뿐이야. 안 그래요, 영감님!?”
타이니가 태연하게 응대하며 녹턴을 들고 일어서는 순간.
“그런 극단적인 대응은 결국 연합군의 결속에 문제를 만든다, 타이니. 일단 참고 다른 대책을 강구해 보자.”
검제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차분해진 얼굴.
그런데.
[설령 왕들이 도플갱어가 아니더라도 죽여라.]
타이니의 귀에만 들린 검제의 목소리는, 그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