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제압
- 막아라!! 시간을 끌고, 그분을 위한 제물이 되어라!!
데로드의 영파와 함께 언데드 군단이 다시 진군을 시작할 때.
“네놈!?”
“저놈이 살아 있었다고!?”
그 전면으로 나서던 뱀파이어 로드 샹귀스와 구울 로드 프린스가, 연합군의 선두에 선 타이니를 보고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그 뒤쪽, 아크 리치 데로드가 있는 마법진의 중심.
그 위에는 한 겹의 두꺼운 마법진이 하나 더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상공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막기 위한 것처럼.
- 다시 죽여 주마, 인간!!!
그리고 그 마법진은 이내 형태가 변형되더니, 소름 끼치는 마기를 뿜어내며 타이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무언가 강력한 일격을 막기 위한 마법진이 반대로 그런 일격을 쏘아 내기 위한 것으로 바뀐 듯했다.
- 칠죄종끼리 서로 경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 공유 정도는 할 겁니다.
‘정말이로군.’
크롬벨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말에서 약간의 허점이 느껴지긴 했다.
‘날 죽였다고 생각했을 텐데, 저런 준비를 했다고? 흠, 정보 공유가 완벽하진 않은 거 같은데…….’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는 당장 확인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대로 가속한 타이니는 눈앞에 보이는 언데드 병단의 전선, 시체들의 파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전신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노을빛 갑주의 형상을 떠올린 채로.
철신갑&몸통 박치기, 변형.
유성 박치기.
꽈아아아아앙!
한순간에 박살이 나 흔들리는 시체들의 파도.
“전부 꺼져라!!”
타이니는 그 파도를 타고 노를 젓듯 녹턴을 휘둘렀고.
콰콰콰쾅!
그 노질에 따라 시체들의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며 거침없는 질주가 이어졌다.
두 눈을 벌겋게 물들인 누더기 피부의 구울 로드가 그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
- 죽어!!!
꽈아아아아앙!
살기 가득한 영파와 함께 몸을 날린 프린스의 몸통 박치기가 그의 질주를 막아선 것이다.
쾅. 쾅.
꽈앙!
“캬악!”
연달아 이어진 녹턴의 공격을 암흑 오러의 갑옷을 두른 몸으로 때우는 수법부터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움직임까지.
저번에는 놈이 저릭과 싸우던 와중에 자신이 끼어든 것이라 판단하기가 애매했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비슷한데?’
타이니로서는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히 자신에게 정면 승부를 걸어오는 놈을 피할 생각은 없었으니.
꽈아아아앙!
“컥!”
그대로 날려버렸는데, 어쩐지 그때만큼 손맛이 나질 않았다.
“버텨?”
분명 제대로 충돌했음에도, 프린스는 고작 십수 미터 정도 튕겨 나가는 데 그친 것이다.
우르르르르릉.
콰콰콰.
충돌의 여파가 뒤늦게 후폭풍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더욱 의외의 결과였다.
- 이전처럼은 안 될 것이다, 인간!
- 그래, 너도 장군급 악마다 이거지? 하지만 그래 봤자…….
쾅!
타이니는 영파로 놈을 비웃으며 그대로 파고들어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 감히!
- 감히는 무슨……!
콰콰콰쾅!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해머의 공세.
그 모든 일격에 담긴 힘도 우세인 데다가, 월랑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타이니의 공격은 속력 면에서도 프린스를 월등히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림!”
쾅!
“없다!”
콰드드득.
한쪽 팔을 희생해 녹턴의 공격을 흘려 내면서 몸을 내던지듯 들이박는 프린스의 전투 방식 탓에,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짜증 나게.’
엉뚱한 상대에게 발목이 잡혀 시간이 지체되겠다 싶던 순간.
[내가, 상대할게.]
귓가에 살짝 걸친 그림자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고, 동시에 프린스의 그림자에서 루나가 튀어나왔다.
푸슉!!
마치 프린스의 복부에 검은 오러가 돋아나듯, 그녀의 검이 놈의 몸을 뒤에서부터 꿰뚫었고.
- 감히! 누가!!
콰콰콰쾅.
이내 검은 그림자 갑옷을 둘러친 루나가 어둠의 공간 속에서 프린스와 격렬히 치고받기 시작했다.
죽음의 오러는 언데드 마족에게 그리 상성이 좋지 않음에도 루나는 쉽게 밀리지 않았고.
“흡!”
그 사이 타이니는 그대로 그 전장을 지나쳐, 다시 차원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의 목표는 강림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니.
40여 일 전에 발동한 군단 스킬로도 처치하지 못했다는 초월급 마족들, 리치들과 아크 리치 데로드가 자리한 중심을 노려야 했다.
“하!”
조금 전의 충돌은 군대의 기세를 살리기 위한 것일 뿐이었고, 이미 압도적으로 유리해지고 있는 전장에서 굳이 잔챙이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대로 허공을 내달린 월랑이 빠르게 차원문을 향해 질주하자, 타이니의 시야에 전황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돌격!!”
“악마들을 몰아내자!”
“괴물들을 박살 내라!!”
우르르르릉.
전장에는 장군급 마족 3마리에 더해 악마급 마족 7마리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상당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인류 연합은 밀리기는커녕 압도적으로 놈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전면에는 당연히 그의 동료들, 12대 기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샹귀스를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저릭이나 악마급 둘을 홀로 상대하는 검제가 아니었다.
바로 대군의 선두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악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악마급 암흑 기사와 그레이트 미라를 동시에 몰아치는 아르곤의 모습이었다.
녀석은 머리 위로 요상한 구체를 띄워 그레이트 미라의 붕대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는데.
[疾風(질풍)]을 온몸에 휘감고 [破滅(파멸)]의 힘까지 두른 녀석의 초월무구 마기아가 그 압도적인 무력의 근원이었다.
두 가지 마도 검술이 동시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녀석이 8서클의 벽을 허물었다는 뜻.
그것도 충분히 놀라웠지만, 아르곤이 녀석답지 않게 몸을 사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전투를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런데 그 뒤쪽으로는 더욱 기가 막힌 광경이 보였다.
‘저건 또 어떻게 한 거야?’
제나스를 중심으로, 200명이 넘는 블루윙의 기사가 옅은 오러를 두른 채 한 몸처럼 움직이며 악마급 마족 셋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허…….’
전생에는 훨씬 약했던 동료와 전생에는 없었던 초인의 놀라운 발전.
요란하게 이어지는 전장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자니, 전세가 인류 연합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변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지던 그 순간.
그의 목표가 있는 곳에서, 소름 끼치는 영파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웅.
동시에 차원문 위의 마법진이 분해되더니, 그 힘이 데로드의 전면에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사이 지상의 마법진의 힘까지 끌어다 쓴 것인지, 예상보다 훨씬 큰 에너지의 유동이 느껴졌다.
- 피할 수 있다면 피해 봐라!
찌이이이이이잉!
이내 데로드의 비웃음 섞인 영파와 함께, 거대한 검은 빛이 전면을 메우며 쏟아져 왔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가속되는 시간.
그림자 도약을 쓰거나 방향을 비트는 것만으로 그 마법을 피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등 뒤의 검제와 아르곤을 비롯한 동료들이 저 검은 빛에 휩쓸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아가, 공격 직전에 울려 퍼진 데로드의 영파가 무슨 의미였는지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이니는 오히려 웃었다.
‘바라던 바.’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이내 느릿하게 내밀어지는 녹턴의 망치 머리에서, 검은빛 구체가 크게 확대되며 전면을 가로막았다.
찌이이이잉.
오크의 영역에서 처음 발현했을 때와는 그 크기도 위력도 차원이 달라진 블랙홀의 힘이, 전면을 뒤덮어 오는 마기를 그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이니의 몸 안에서 실시간으로 무시무시한 힘이 차올랐다.
- 어……떻……게!?
느려진 시간 속에서, 놀란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데로드의 영파가 들려왔다.
- 글쎄, 이게 되네?
사실 타이니는 그 원리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냥 변죽을 울리는 길을 택했다.
만약 데로드가 자의로 조종 가능한 수준의 마법을 썼다면, 오히려 이렇게 쉽게 흡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진을 이용해서 임시로 끌어모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는 결국 의지가 담기지 않은 ‘주인 없는’ 힘일 뿐이었으니.
확대된 블랙홀의 흡입력이, 데로드가 통제할 수 없는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삼켜 버린 것이다.
물론.
“흡!”
콰아아아아아아앙!
그중에서도 놈이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만큼은 완벽히 흡수하지 못했기에, 타이니는 그 여파를 뒤집어써야 했지만.
“크크크크.”
우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
- 어떻게 인간이……!
적어도 하루 이상 공들였을 아크 리치의 마법을 고작 수십 미터 밀려나고 약한 내상을 입은 것만으로 막아 냈으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더욱이.
우우우우웅.
그렇게 흡수한 에너지는 이미 그가 필살기를 쓸 수 있도록 녹턴으로 몰려들고 있었으니.
애초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전세를 예상하면서도 동료들과 합을 맞추지 않고 먼저 뛰어든 이유, 그리고 동료들보다 수백 미터 이상 앞서서 질주한 이유를 보여 줄 때였다.
쾅!
“그대로……!”
대지를 폭발시키며 튀어 나간 타이니의 녹턴에는,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노을빛 파괴의 힘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뒈져라, 뼈다귀!!”
- 빨리, 그분을……!
한순간에 단축된 거리.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영파.
거대한 재앙이 덮쳐 오는데도 차원문 안으로 마기를 쏟아 넣고 있는 수십의 리치들.
그 모든 광경이 타이니에겐 우습게만 보였다.
그리고.
- 이대로는……!
아크 리치 데로드의 로브 속에서 흔들리는 녹광이 크게 확대되는 순간.
씨익.
타이니의 미소와 함께, 노을빛 파멸의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
---------!!!!!!
폭발음조차 들리지 않는 노을빛 공간 속에서 주변의 모든 것이 소멸했다.
그 파멸의 힘 앞에서는 악마급 마족의 힘도, 언데드의 불사성도 소용이 없었다.
수백 미터 직경의 노을빛 파멸이 사방을 휘감고.
- 안 돼에에에……!!!!!
전신이 사그라드는 데로드의 마지막 비명조차 완전히 소멸한 순간.
쿵.
“크…….”
또다시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 낸 타이니가 그 중심에서 주저앉을 때, 그때도 전장에는 그 일격이 만들어 낸 휘몰아치는 후폭풍과 지면의 떨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우르르르르르릉.
움푹 파인 크레이터 밖에서 쏟아지는 공포와 경이, 놀람이 섞인 시선들.
언제 보아도 뿌듯한 그 시선들을 즐기며, 타이니는 쓴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반쪽짜리 성공인가.’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 빅뱅을 쓰면서도 최소한의 전투가 가능한 힘을 남기고자 했던 것은 실패했다.
아직은 기껏해야 간신히 몸을 가눌 만한 여력을 남겨 둘 수 있을 뿐.
‘차차 나아지겠지.’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 아크 리치 데로드를 토벌했다. 남은 잔당을 쓸어 내라!
전장을 울리는 영파를 쏟아 내며 허세를 부리는 것 정도.
실제로는 크게 소리 지를 힘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영파를 쏜 것이었지만.
“우와아아아아!”
“적을 끝장내라!!”
“죽은 자들을 죽여라!!”
그 영파의 일갈로도, 다시금 연합군의 사기를 극대화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탁.
“괜찮아. 일단 기대.”
“……고마워.”
어느새 하늘에서 뛰어내려 그의 옆을 지키는 에스티나처럼, 그 허세를 눈치챈 이도 있었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 장군 한 놈은 살려 둬야 하는데…….”
“말해 뒀잖아. 알아서 하겠지. 넌 그대로 기력이나 회복해.”
“……응.”
우우웅.
그렇게 바닥이 난 기력을 억지로 다시 끌어모으다 보니,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차원문 안으로 막대한 마기가 흘러 들어가는 광경 너머에, 무언가 이질적인 흐름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게……?’
타이니의 시선이 다시금 멀리 전장을 향했다.
- 신의 권능을 대리하거나 신성을 사용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카르마(Karma)입니다.
멀리서 전투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진두지휘하며 갓 핸드와 함께 언데드들을 소멸시키고 있는 크롬벨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