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진혼곡
주먹만 한 붉은 구체.
전장에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그 물건은 인류에게도, 언데드에게도 생소하기만 했다.
“저게 뭐야?”
“뭐, 뭔데?”
갑작스러운 후퇴 명령에 의해 물러서는 와중에도 연합군 병력이 저마다 의문스러운 시선을 던질 정도.
하지만 이내.
꽝!
꽈아아앙!
콰르르릉!
쾅!
그들은 그 붉은 구체의 비가 언데드 진형을 초토화시키는 불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서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꾸에에에!”
쿵.
하급 마수는 물론 제법 강력해 보이는 4, 5단계 마물들까지, 수십 번의 폭발에 휘말려 불타오르는 대지에 몸을 누였다.
한순간에 전장을 가로지르며 폭발하는 붉은 비를 뿌린 거대한 새들이 다시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꾸어어어!”
“크르륵!”
그 순간 다시 발작하듯 움직이기 시작하는 죽은 자들의 무리.
하지만 그로부터 채 십여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등장한 거대한 새들이 또 죽음의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 이건 또 뭐……!
그러자 적진 가운데서 울려 퍼지는 낭패한 영파와 함께 언데드 병단 진영의 가운데서 검고 투명한 보호막이 솟구쳐 올랐지만.
콰콰콰콰콰콰쾅.
미처 보호막 아래 들어가지 못한 언데드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앙에 휘말려 한순간에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 마리 새가 교대로 서쪽 어딘가로 왕복하며 지속적으로 쏟아 낸 폭뢰가 재앙의 비가 되어 전장을 불태웠다.
우르르르르릉.
그리고 그렇게 짧고도 긴 재앙의 비가 그치는 순간.
언데드 병단의 숫자는 급감하여 1/3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저게 대체……?”
“우와…….”
“우, 우리 무기인 거지?”
그 소름 끼치는 결과에 지켜보던 인류 모두가 멍해 있는 것도 잠시.
“우와아아아아!”
“시체들을 몰아내자!!”
연합군의 사기가 하늘 끝까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 전군 반전!! 언데드들을 섬멸하라!!!
총사령관 검제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각국의 진영에서 미친 듯이 휘날리기 시작한 깃발이 그 명령을 미처 듣지 못한 이들에게까지 신호를 전달했고, 연합군은 언데드 병단을 거침없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개전 이래 두 번째로 적들을 몰아붙이며 가장 크게 전과를 거둔 인류 연합군은, 그렇게 매우 유리한 상태로 전선을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전황이 극적으로 변한 전장의 후방에서는.
“나, 날 죽일 셈이었지, 영감!?”
“이놈아, 나도 에스티나 양이 전언으로 시킨 대로 한 거라니까!”
가장 큰 전과를 세운 영웅이, 온통 검댕투성이에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검제에게 징징거리고 있었다.
* * *
“우와아아!”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
마치 전쟁이 다 끝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병사들.
물론 완전히 승리를 거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 전투가 끝난 것만은 확실했다.
개전 이래 최장기간, 무려 3일 동안 이어지던 지루한 공방전이 극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대마도사 솔레인의 개천 마법과 타이니의 등장, 그리고 폭뢰 투하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연합군.
사기가 잔뜩 올라간 채 행진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 전진을 멈추었다.
그들의 앞을, 검고 투명한 보호막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또 뭐야?”
“오렌 평야에서도 봤던 거야.”
“그럼…….”
“해결 가능할 거야. 그때도 그랬으니까.”
“광휘의 기사가…….”
오렌 평야에서의 전투 경험이 있는 인류의 정예들은 그 장벽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처럼, 언데드 병단은 갑작스레 펼쳐진 강력한 보호막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적들의 속셈은 모르지만,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인류의 지도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전장의 광기에 몸을 맡긴 채 전투를 치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 인류 연합군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일반인에게 초인이라 불리는 기사들이나 진짜 초인들이나, 모두 기력 바닥난 채 최소한의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던 만큼 차라리 달가운 상황이었다.
* * *
“탐욕을 잡았다고? 그래, 잘했다. 참 잘했어.”
서부의 강림. 그 결과를 보고하자 돌아온 검제의 대답은 아주 간결하기만 했다.
타이니로선 그 반응이 다소 불만족스러웠지만, 불평을 토할 수는 없었다.
전신에 흐르는 살기와 달리 퍽퍽해 보이는 검제의 얼굴은, 그가 지금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3일째 전투 중이었다고요?”
“그래.”
“그럼 이제까지는 어떻게 버틴 건데요?”
“……놈들은 주로 낮보다는 밤에 전투를 했으니까 말이야. 저 먹구름이 저렇게 진해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럼 재수 없으면…….”
“그래, 반나절 뒤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 뭐, 저 보호막은 처음 보는 거니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우리에게도 필요한 휴식이었다.”
“……허.”
“그러니까 너도 전투가 재개될 때까지는 푹 쉬어 둬라. 그때는 반드시 끝장낼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타이니는 검제의 말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없는 물자를 쥐어짜 연합에서 마련해 준 조악한 막사 안의 침상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그나마 회복된 기운으로 마나 샤워를 해서 이물질을 털어 낸 것이 취침 준비의 전부였다.
‘피곤해.’
그럴 만도 했다.
크롬벨과 에스티나가 폭뢰를 가지러 황도에 가는 동안, 그는 월랑을 타고 쉼 없이 질주해 랑켄 평야에 왔다.
그 상황에서 바로 싸움에 뛰어들었고, 심대한 타격을 받은 상태로 여력을 쥐어짜 싸웠다.
물론 그만한 성과는 거두었지만, 그의 몸 상태는 검제의 말 그대로 휴식이 절실했다.
그렇게 그는.
와지직.
쿵.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침상이 그대로 부서져 제 몸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도 모른 채, 그대로 꿈속에 빠져들었다
“타이니! 다쳤……?”
“동생! 나 임무 완수……!”
꿈결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그조차 아련하게 멀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음?”
푹신.
잠결에 몸을 뒤척이던 타이니의 손에, 침상이 아닌 누군가의 살결이 닿았다.
그 순간 눈이 번쩍 떠지는데.
“일어났어?”
“……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에스티나의 얼굴에 당황한 것도 잠시, 곧 감각이 돌아오며 상황이 인식되었다.
박살이 난 침상을 대신해 제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던 에스티나.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
에스티나 역시 피곤할 텐데 이게 뭔 민폐일까.
홧홧하게 달아오른 볼에는 왜인지 부드러운 살결의 느낌도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해 더더욱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리 오래 잔 것도 아니고, 고생했잖아. 그냥 바닥에서 자게 둘 수도 없고.”
“그럼 그냥 나무 베게라도 갖다 끼워 주지…….”
“그건 어제의 영웅을 너무 푸대접하는 거잖아.”
싱긋 웃는 에스티나의 모습에 더는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상…… 같은 건가?’
타이니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스티나와 시선을 마주치기가 괜히 힘들어 애꿎은 막사의 천장만 바라보았고, 그러다 보니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그러다 이내.
“에휴…….”
작게 한숨을 내쉰 에스티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얼추 상태 점검하고 나가 보자. 그런데 분위기가 생각보다 좋지 않을 거야.”
“왜!? 그새 무슨 일 있었어!?”
그 순간 타이니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솔레인 님이, 결국 돌아가셨대.”
“뭐?!”
“전선은 여전히 교착 상태지만, 그 때문에 마법사들 분위기가 좋지 않아. 아르곤 경도 그렇고.”
“아…….”
전생에는 이미 마수병단이 강림했을 때 세상에 없었던 대마도사, 현자의 마탑주 솔레인.
그의 존재는 아직 자신에겐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가진 의미만큼은 알고 있었다.
초전에 발동했다던 군단 스킬이라는 것도 그 위력이 대단했다고 들었고, 당장 그가 어제 보여 준 개천의 마법만 해도 전황을 바꿀 정도였으니.
“……이런.”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기에 인간적인 정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죽음이 인류 전체의 큰 손실이라는 생각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인류가 이렇게 몰리진 않았을 걸세.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가 전생에 했던 그 말을, 솔레인은 몇 번에 걸쳐서 증명했다.
- 아쉽구먼. 내가 몇 년만 젊었어도 이 역사적인 전장에 함께하는 건데 말이야.
오렌 평야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와 느물느물 웃던 그의 얼굴이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당신은 이미 충분한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영감님.’
깊지 못한 유대감과는 별개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좀 더 길게 얘기를 나눠 봐야 했을까.”
“음?”
“그 영감님의 수명이 다해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어떻게 해 볼 생각을 안 했어. 살리려고 노력해 봤으면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는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손을 쓰지 않았어. 내가…….”
혹시나, 내가 인류의 가능성 하나를 놓친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도 더해졌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한 걸까?’
한계에 달했다는 생각에 그저 피로를 떨치기 위해 잠들었던 어제의 자신마저 바보같이 느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꽉 쥐어진 타이니의 주먹 위에, 에스티나의 손이 포개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건 네 잘못이 아냐. 어떻게 사람 수명을 늘려?”
“그래도…….”
“넌 할 만큼 했어. 아니, 그 이상으로 했어. 말도 안 되는 일로 자책하지 마, 타이니. 이건 정말 아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길. 그 안에 담긴 걱정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때.
갑자기 그림자에서 루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흡!?
반사적으로 떨어지는 두 사람.
평소에 루나가 자주 하던 말을 생각하면, 그들 스스로 놀림거리를 더해 준 것이 틀림없는 상황.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나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장례식, 한대, 깨어났으면 가자.”
그 무거운 표정에서 나온 말이, 그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이끌었다.
* * *
인류의 큰 별이 진 직후, 언데드 병단이 거대한 보호막 안에 숨어 버리면서 전투가 끝난 덕에 치를 수 있었던 장례식.
그것은 거창했지만, 또한 단출했다.
“대마도사 솔레인 님을 비롯하여 이 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영웅을 위하여!!”
쿵.
검제가 그 말과 함께 땅에 검을 박으며 고개를 숙인 순간.
십수만의 병력이 모인 드넓은 전장, 랑켄 평야에 완벽한 침묵이 흘렀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상황.
적들을 바로 앞에 두고 완전 무장한 채 포위망을 형성한 전 병력이, 어지럽게 휘둘리는 깃발의 신호에 따라 죽은 전우들을 향해 일제히 애도를 전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검제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에 가장 가까운 꼭대기에 대마도사의 시체가 올려진 장작더미 아래에서, 아르곤이 횃불을 들었다.
“모, 모든 영웅을 전부 모시지 못한 점, 지켜보시는…… 흐읍, 지켜보고 계실 모든 영령께서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울먹이면서도 끝내 흐트러지지 않는 아르곤의 목소리가 마법을 타고 전장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마법사들이 일시에 고개를 떨구는 동시에.
화르륵.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자연의 불을 붙인 장작더미가 일순간에 거대한 화마에 휩싸이며 어두워진 밤하늘을 밝혔다.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이 가까이 있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열기를 전할 때.
챙!
“신분이나 능력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인류가 이곳에 목숨을 걸었다! 남은 우리는 그 피와 목숨의 무게를 딛고 우리의 세상을 지킬 것이다! 너와 나,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한다!”
결의에 찬 목소리와 함께 검제의 오러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충!!!!”
그 뒤를 따르는 제국 기사들의 복창 소리가 터져 나오고.
“따르겠습니다!”
“너와 나,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모두를 위해!!!”
“인류를 위해!!”
“우와아아악!!”
뒤이어 엄청난 함성 소리가 랑켄 평야 전역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 어떤 목소리보다 우렁찬 진혼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