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언데드 병단 (2)
‘빌어먹을.’
실버팽은 초조했다.
그는 웨어비스트의 최정예 수백과 함께 싸우면서도 악마급 셋에게 가로막혀 있었으니까.
눈이 붉게 달아오른 콜드 버서커 상태에서 벼락의 주인과 문 아머, 두 개의 초월무구를 전력으로 가동해야 상대할 만한 적이 셋.
그 조합도 최악이었다.
콰콰콰콰.
- 피가 맛나네?
“끄아악!”
몸을 안개로 바꿨다가 박쥐 떼로 바꾸기도 하며 웨어비스트의 정예들을 광범위로 습격하는 엘더 뱀파이어 하나와.
쾅.
주르르륵.
- 묵직하군, 짐승.
전면에서 그의 공격을 차단하는 암흑 기사 하나.
스아아아아.
그리고 뒤에서 틈틈이 대마법과 저주를 날려 대는 아크 리치 하나까지.
“끄르륵.”
“대장군님!”
최대한 분전해 보지만, 정예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생소한, 참담한 전장이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그리고 더욱 짜증 나는 것은, 눈앞의 이 강적들이 언데드 병단의 장군조차 아니라는 점이었다.
- 악마급도 네 단계로 나뉘어. 그중 4단계, 후작급이 되어야 장군이 되는 거야.
- 그게 무슨 차이인데?
- 영역의 활용 능력에 따라…….
물론 이제야 오러익시더급의 세상을 살포시 엿보고 있는 실버 팽으로서는 잘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반면에 현재 그의 눈에 확실히 와닿는 광경이 있었다.
바로 이 전장에서 멀지 않은 곳.
- 콰콰콰콰콰콰.
꽈아앙!
불과 몇 달 전에 경지에 오른 마도 기사가 장군 중 하나를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군이, 자신의 눈앞의 세 악마급과는 확연히 다른 수준의 무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심지어.
- 어, 어떻게 이, 이놈이!!? 두, 두고 보자!
아르곤이 그런 놈을 쫓아내고 미소를 지으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놀라웠다.
그리고 그만큼 참담했다.
‘내가…….’
마도 기사는 장군급 마족과 동급이거나 그보다 약하고, 그런 마도 기사보다 약한 게 바로 자신.
이 더럽게 기분 나쁜 공식이 자연스레 연상된 것이었다.
물론 대단한 동료를 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동료도 동료 나름이었다.
‘내가 저 오줌이나 지리는 꼬마보다 못하다고?!’
그 사실에 자괴감이 들고 초조해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오래 한눈을 판 것일까.
우우우웅.
- 통했다. 키키키키.
‘이런!?’
아크 리치의 웃음기 어린 영파와 함께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이내 몸이 굳어지며 전신에 힘이 빠졌다.
무슨 사태가 일어났는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마비, 약화, 실명.
수인족의 정예들을 향해 광범위하게 흩뿌려지던 마법이 한순간 자신에게 집중되며, 문 아머로 증폭되어 있던 저항력마저 뚫어 버린 것이다.
퍼트렸던 마법을 이런 식으로 한곳에 집중시키는 게 가능한 거였던가?
황당했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순 없는 일.
- 짐승, 죽어라!
- 우리의 동지가 되어라!
이내 앞뒤에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살기가 엄습해 왔다.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꺼져!!!”
우르르르릉. 쾅!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샛노란 벼락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비기, 천둥 늑대의 포효를 전신으로 발산한 것이다.
비록 그 위력은 다소 약해졌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 끼아아아!
- 지독한…….
그에게 집중되었던 저주 마법이 씻겨 나감과 동시에.
뒤를 덮치던 흡혈귀가 비명과 함께 물러서고, 전면에서 쇄도해 오던 암흑 기사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었다.
쿨럭.
“이 짜증 나는 것들이……!”
신체 내부에서부터 터트린 벼락의 힘이 그 자신에게도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
- 멍청한 놈이로구나!
- 푸하하하! 짐승, 지쳤다.
- 자,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까?
쾅.
지면을 터트릴 듯 박차고 도약한 암흑 기사가 실버 팽에게 돌진해 오는 순간.
안개로 변한 엘더 뱀파이어가 그의 전신을 조여 오고, 아크 리치가 그 위로 강력한 저주를 쏟아 냈다.
‘젠장…….’
생명의 위기 앞에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콰드드드득.
그 순간, 눈앞에서 피 보라가 일었다.
자연스레 커진 두 눈에, 제 몸을 희생해 가며 암흑 기사의 질주를 막은 부하, 아니 동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끄으윽.”
오랜 친구인 1군단장, 갈색곰 수인족, 갈색 바위가 암흑 기사의 창을 몸으로 막아섰고.
“대, 대장군, 부디 보중…….”
한때는 그에게 반발했던 2군단장, 여우 수인족, 잿빛 번개가 그를 향해 쏟아지던 죽음의 저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그리고.
“사, 사림, 난, 괜찮…….”
록, 내 친구……!
- 버러지들이, 귀찮게.
콰직.
콰아아아앙!
암흑 기사가 창을 비트는 순간, 그를 보며 억지로 미소 짓던 갈색 바위의 몸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안 돼!!!!!!”
뚜둑.
가슴속에서 심장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실버 팽의 머릿속이 한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젠장, 젠장, 젠장!’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대장군님을 지켜라!”
“막아!”
뒤이어 그의 충실한 부하인 왕국의 정예들이 강적들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내, 허무하게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아악!”
“자, 장군.”
- 발악하긴! 흐흐, 넌 내가 먹어 주마.
안개가 되어 다가오던 엘더 뱀파이어의 송곳니가 그의 목 가까이에서 실체화되는 순간.
실버 팽은 친구의 복수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다.
‘내 잘못이다.’
- 몸을 아껴라. 우리 목숨은 칠죄종을 잡기 위해…….
타이니나 검제의 말 또한 이 순간 잊었다.
‘웃기지 마!’
우르르릉.
일순 그의 마나가 샛노란 벼락의 오러로 변형되어 신체 내부를 내달렸다.
이미 한 번 무리를 한 탓에 너덜너덜해진 몸에 다시금 강력한 벼락이 내달리며, 거의 모든 신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시간은 마치 주변이 정지된 것처럼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중 가속 천둥 늑대의 폭주, 중첩 사용.
극의, 무한의 질주.
콰직.
멈춰진 세상 속에서 홀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
한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올라왔다.
공간 전체가 강철의 장벽이 되어 전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실버 팽은 연달아 몸을 움직였다.
‘괜찮아.’
콰득.
콰지직.
우드득.
‘할 수 있어.’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통증이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마저 녹아내렸는지, 갑자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낌과 동시에 모든 것의 한계를 넘어섰다.
쿠쿠쿠쿠쿠쿵.
강철 같은 공간의 저항을 억지로 찢고 나가며, 가장 먼저 자신의 옆에 다가와 있던 엘더 뱀파이어의 머리를 손톱으로 파고들었다.
안개로도, 박쥐로도 변신하는 놈의 핵이 어디쯤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
콰직.
그대로 가볍게 부숴 주었다.
- 뭐…….
영파조차 느리게 들려올 만큼 가속된 시간.
그 속에서 그의 시야의 들어온 것은, 감히 친구의 생명을 빼앗고 그 시체마저 박살 낸 암흑 기사가 창을 거두고 있는 광경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세상 속에서도 느릿하게나마 움직이고 있는 놈의 손.
실버 팽은 자신의 할버드, 라이트닝 로드를 거세게 휘둘러 그 손부터 확실히 잘라 냈다.
쩌어어어억.
- 끄……?
콰드득.
연이어 휘둘러진 할버드, 라이트닝 로드가 암흑 기사의 창을 부쉈고.
콰콰콰콰콰콰콰.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곧 놈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 으……?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진 친구의 시신보다 더욱 잘게, 가루조차 남지 않도록.
너무 빨라진 시간 속에서는 놈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육체가 한계에 달했기 때문일까.
그 순간부터 다시 주변의 시간이 제 속도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 끄아……!?
기대했던 암흑 기사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금세 가루가 되어 사라진 만큼 그 영파의 비명도 아주 짧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자.
- 갑자기, 어떻게!!?
아크 리치가 공포에 질린 듯한 영파를 울리며 하늘 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 못 친다.
우드득.
아주 짧은 순간 한계를 넘은 후유증 탓에 이미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한 번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둥 늑대의 포효.’
우르르릉.
할버드, 라이트닝 로드에 다시금 샛노란 벼락의 오러가 맺히고 그대로 놈에게 쏟아지려던 찰나.
그의 눈에 위험한 상태의 아르곤이 보였다.
- 꾸어어어!
바닥에 쓰러진 채 뭐라고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바둥대는 마도 기사.
그 주변에 접근하는 거대한 언데드 마수와 괴물들.
생의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이 일격을 어디로 뿌려야 할지는 분명했다.
‘기껏 악마급 마족 하나 잡는 것보다야.’
인류의 미래를 구하기로.
번쩍.
꽈르르르릉.
전방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엄청난 벼락이 아르곤의 주변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아아앙!
“꾸어어어!”
기다란 송곳니를 자랑하던 거대한 맹수 형태의 뼈다귀 괴물이, 샛노란 벼락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빛과 신성력만큼은 아니지만, 불과 벼락 역시 예부터 삿된 것을 쫓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으니.
실제로도 그 일격은 죽은 자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쿵.
쓰러져 있는 아르곤을 위협하던 주변의 언데드들이 그 순간 일소되었다.
언데드도 공포심을 느끼는 걸까?
동시에 아르곤을 향해 다가서던 나머지 언데드 군단 병력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흐…….”
털썩.
그 광경을 지켜본 실버 팽이 힘없는 미소와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막아서야 하는데…….’
더는 남은 힘이 없었다.
“장군님!?”
“대장군님!”
“후퇴!!”
“장군님을 모셔!!”
다급하게 쏟아지는 목소리들에 뭐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온몸에 감각이 없었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너무…….’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 너는 전생에 죽을 때까지 7단계를 못 벗어났어.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네 도움 없이도 넘었다, 이놈아.’
미친 듯이 자신을 괴롭히던 놈. 하지만 왕국과 자신을 구해 준 악우.
그토록 염원하던 벽을 넘었는데, 자랑을 들어 줄 그놈이 옆에 없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게다가 기껏 마지막 일격으로 구해 낸 마도 기사도, 어쩌면 자신처럼 이 전장에서 죽게 될지 몰랐다.
‘안 되는데…….’
고작 두 번째 고비를 넘지 못한 지금, 벌써 12대 기사 중 둘이 죽으면 안 되는데.
남은 강림의 시간에서 몇이나 더 죽을까.
타이니 그놈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혼자서 다 막아 낼 수 있을까.
‘이제야 비로소 녀석 옆에 제대로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일까.
- 누가 멋대로 죽……!
흐릿해지는 감각 속에서,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죽을 때 생각나는 게, 그놈이라고?’
속으로 쓴웃음이 나는데.
꽈아아아아앙!
우드드득.
흐려지는 감각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짜릿한 충격이 바로 옆에서 전해져 왔다.
그리고 이내.
우우우우웅.
갑자기 몸 안으로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흘러들어 왔다.
‘이건……?’
마나가 극한까지 뭉쳐져 태어난 파괴의 권능.
‘……오러?’
어떤 미친놈이 타인의 몸 안에 오러를 쏟아부을 생각을 할까.
당장 자신이 그와 비슷한 짓거리를 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자신의 몸에 더 강력한 오러를 쏟아붓다니?
‘어떤 멍청이가…… 에?’
순간, 애초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놈이, 그리고 그럴 만한 힘을 가진 놈이 여럿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니?’
그리고 그 직후.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우우웅.
몸 안에 쏟아진 그 엄청난 오러가 녹아내린 신경망과 핏줄, 근육, 내장의 모습까지 그대로 흉내 내며 체내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죽어 가는 와중에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감각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지.’
오러로 육체의 구성 부분을 흉내 낸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런다고 그게 진짜 육체처럼 작동할 리는 없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근.
‘……어?’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러로 만들어진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고.
찌리릿.
‘윽!?’
오러로 만들어진 신경이 끊어진 근육과 핏줄을 이어 감각을 되살렸다.
그리고.
우우웅.
우드득.
- 누가 멋대로 죽……
오러로 만들어진 근육이 완벽하게 구성되며, 어긋나고 망가졌던 그의 육체가 다시금 조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청각까지 살아나는 순간.
“……으래!? 정신 차리라고, 멍청아! 집중해! 오래 유지 못 해! 수인족의 재생력 뒀다 뭐 할 거야!! 재생하라고!! 당장!!”
반갑고도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