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하루만, 쉬자
꽈꽈과꽈광.
“이, 이럴 수는…….”
미친 듯이 몰아치는 녹턴의 세례는, 타이니의 오러가 흐려지고 용마인 애버리스의 튼튼한 비늘이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없어.”
“있다니까, 새꺄!”
꽈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격렬한 충격파가 암흑세계 전체를 진동시키고, 타격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밖에 없는 지반이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탐욕의 왕이 본신의 격을 손상시키면서까지 탄생시키려 했던 군세는, 그 군주의 의지가 침몰함에 따라 다시 사그라들었다.
“끄으으으. 어떻게…….”
애버리스는 끝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윽고 녹턴에 깃든 노을빛 오러가 사라지고, 타이니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순간.
쾅.
콰직.
마침내 놈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그 육신이 그림자로 변해 흩어졌다.
그리고 반경 수 킬로미터를 어둠으로 뒤덮었던 놈의 권능 암흑세계가 사라지고, 다시 세계수의 성광이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고 불길한 기운을 뿌려 대던 차원 균열은 이미 사라진 상황.
쏟아지는 성광 너머로 보이는 저물어 가는 태양이, 이 전투의 승리를 축복하는 듯했다.
“타이니!”
“타이니 경!”
그 순간, 흐릿해진 타이니의 시야에 보이는 일행의 얼굴들.
“해냈…… 쿨럭, 어…….”
내상을 입을 때까지 마지막 힘을 쥐어짠 타이니가 히죽 웃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쿵.
푹 꺼지는 땅바닥.
더 이상은 중력 속성을 유지할 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달려오는 일행들을 보며 파리한 안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더, 던지지 마…….”
아직도 치가 떨리는 경험을 떠올린 타이니는 반사적으로 약한 소리를 내뱉으려다가, 지금 일행 중에는 그때 그 구름 위 헹가래에 일조한 무도한 동료들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머쓱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러나 곧.
쾅!
“참 잘했어요!”
“컥!”
먼저 달려온 크롬벨의 몸통 박치기(?)에 피를 토하고 말았다.
쿨럭.
“너, 너 이 새끼, 일부러…….”
“아. 하. 하. 실. 수. 네. 요.”
이 새끼…… 마인드 킬링으로 인격을 조율한다더니, 그거 다 연기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뭐 아무래도 좋았다.
“너, 지금, 뭐 하는……?!”
“뭐 하는 거죠! 크롬 경.”
한 발짝 늦게 다가온 에스티나와 루나가 격렬한 항의를 퍼붓는 순간.
“아, 그냥 좀 격하게 축하해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하, 여신의 빛이여.”
바로 웃으며 신성력으로 타이니를 회복시키는 크롬벨을 보니, 정말로 그가 진짜 동료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뭐 하는 건지, 참.”
“바보들이다.”
이 정도 장난이야 저릭이나 실버 팽과도 수없이 하던 짓이었으니까.
물론 병 주고 약 주는 듯한 그 치유에는 고마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너, 이 새끼. 나중에 두고 보자.”
“실수라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찌릿 노려보다가도.
“……풉.”
“푸하하하하하하!”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함께 사선을 넘으며 쌓인 유대감 때문일 것이다.
크롬벨에 관한 작은 껄끄러움조차 이 순간만큼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후아.”
“힘들, 었어.”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지친 얼굴과 상처투성이 몸으로나마 무사하다는 것.
그리고.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겼다.’
그 기분 하나가, 모든 것을 웃으며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잘했어, 모두. 정말 잘했어.”
“너야말로, 타이니.”
“동생이, 최고 고생,”
“저도, 한 몫 제대로 한 것 같습니다만.”
“크롬. 이번엔, 인정.”
“당연하죠. 고생하셨어요, 크롬벨 경.”
“하. 이제야 인정받는 건가요? 이거 뿌듯하군요. 하하하.”
“흠. 뭐, 나도 인정하지.”
“감사합니다. 근데 루나 양, 왜 절 크롬이라고 부르십니까? 아까 타이니 경도 그러는 것 같았는데요?”
“네가, 우리한테, 밝힌 이름.”
“아니, 그거야 사정이 있어서였지요. 다 아실 텐데…….”
“몰라. 넌 크롬.”
“허……?”
만담을 하는 크롬벨과 루나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재밌네.”
“응. 정말, 차원문이 두 군데서 열린다고 들었을 때는 암담하기만 했는데…….”
웃으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 준 일행은, 한동안 말없이 승리의 여운을 만끽했다.
싸움의 여파로 초토화된 대수림의 하늘 위로 석양이 질 때까지.
“영차, 이제 가 볼까?”
멍하니 노을을 보던 타이니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까지 이 기분을 즐기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 두 번째 고비조차 아직 온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벌써?”
“그래. 이제 가리온의 가렌 평야였던가? 거기로 가야지.”
“랑켄, 평야.”
“……그거나, 그거나.”
“많이, 달라.”
중요하지도 않은 말에 괜히 태클을 거는 루나도.
“씁. 아무튼 슬슬 움직이자고. 거기는 아직도 싸우고 있을 것 같은데.”
“어쨌건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 다행이네요.”
아직은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짓는 에스티나도.
모두가 다소 숨이 막혀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이런…….’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다.
목숨을 건 격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이다.
사실상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던 재앙을 간신히 처리했는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
육체의 피로와 상처 따위야 신성력이나 마나로 어떻게든 회복하면 그만이지만, 영혼이 마모되어 가는 듯한 이 본질적인 피로감은 그런 것으로 치유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실제로 말세로 치달아 가던 전생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가 1년 넘게 이어졌던 그와 동료들의 전투력이 실시간으로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었다.
전투 시의 흥분 상태를 몇 날 며칠이고 유지하다가 승리한 직후에 한순간 기절하듯 뻗어 버리는 일을 반복했던 시절.
그 긴장감을 최근 몇 달 사이에 몰아서 느끼고 있을 동료들의 상태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스트레스가 극심한 것은 타이니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하루……. 딱 하루만 엘븐하임에서 쉬고, 만전의 상태로 가리온으로 가자.”
고작 하루.
그것으로 모든 스트레스가 풀릴 리도 없거늘, 일행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좋아!”
“좋은 생각입니다, 타이니 경.”
“괜찮을까?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나을 수도…….”
에스티나는 조심스러운 우려를 전했지만,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전의 상태로 가는 게 나아. 카일룸과 오투스라면 가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긴 하지만…….”
“어이 크롬, 네 정령도 한 명은 더 태울 수 있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크롬이라고……?”
“그럼 됐고.”
“애칭. 받아들여.”
“…….”
타이니의 무시와 루나의 확인 사살에 크롬벨은 멍하니 입만 벙긋거렸고.
또 하나의 칠죄종 처치라는 위업을 달성한 그들은, 조금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엘븐하임에 귀환했다.
* * *
“칠죄종, 탐욕을 처리했다!!! 우리가 승리했다!!”
일행이 돌아온 순간, 에스티나가 카일룸을 타고 허공을 순회하며 외친 목소리에 엘븐하임 전역이 들썩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세계수의 수호자 만세!”
“광휘의 기사 만세!!!”
“근데, 저기 흰 갑옷 입은 사람은 누구?”
“몰라! 하여간 만세!!”
“멍청이들, 그 용사잖아? 크롬…… 뭐시기!”
“아무튼 만세다!!”
“우와아아아!”
엘븐하임의 엘프들도,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 그 안에서 무장을 가다듬고 있던 오크의 전사들도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항상 갈등만 빚던 두 종족이 세계수의 그늘 안에서 하나가 되어 더없이 기쁜 모습으로 어울리는 광경은 아름답고도 놀라웠다.
탐욕과의 전투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
- 사기 진작은 이럴 때일수록 더 필요해. 잠깐의 쇼만 하자고. 그게 우리한테도 기분이 좋을걸?
타이니의 제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체감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살짝 안색이 묘해진 사람이 있었다.
‘이 와중에도, 나만…….’
타이니를 따라 오랜만에 천천히 걷는 월랑의 등 뒤에 탄 루나는, 굳이 공용어로 환호하는 엘프 중 그 누구도 사신의 이름을 말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물론 죽음의 신이라는 이명이 대놓고 환호할 만한 이름은 아니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초월무구 움브라-테그멘의 작업을 위해 엘븐하임에 머물던 때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적잖이 느꼈었는데, 이 순간에도 그런 분위기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생각해 보면, 엘프들은 늘 그랬어.’
마수병단의 강림 전, 대륙 서부의 초월급 마수들을 석 달 동안 토벌하며 명성을 떨쳤을 때도.
움브라-테그멘의 이름을 서서히 알려서, 수염 없는 그란돌이 무려 초청을 받아 테르티우스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때도.
엘프들은 유독 그녀에게만 야박했다.
‘쪼잔해. 엘프.’
다른 동료들에게만 환호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머쓱하니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는데.
“사신, 아니 루나 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와 한 송이 꽃을 건네는 엘프가 있었다.
“에……?”
그것을 받아 든 루나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자, 엘프는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모든 엘프가 하프 엘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엘븐하임에 머물던 몇 달 동안의 경험을 무시하게 만드는 말. 하지만 에스티나를 제외하고는 처음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엘프의 말이었다.
더구나 왜인지 익숙한 얼굴.
엘븐하임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자주 봤던 것일까?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보며 물었다.
“……당신, 이름은?”
그런데 그 순간 엘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내.
“……굳이 기억할 가치는 없는 이름이에요. 그저 영웅을 칭송하고 싶은 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세요.”
억지로 웃음을 짓는 엘프.
기껏 꽃을 받았는데, 준 사람이 이름을 밝히려 하지는 않는다.
이건 차별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칭송일까.
루나는 형언하기 애매한 기분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월랑의 발걸음을 따라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런 일행의 모습이 인파에 묻혀 사라져 갈 때쯤.
금발의 엘프는 멀어지는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떨궜다.
“잘 자라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정말…….”
칭송이 아닌, 아주 작은 목소리의 사과와 함께.
“아!”
“음?”
갑작스러운 탄성에 타이니가 루나를 돌아보았다.
웬만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는 루나가 탄성을 지르니 신경이 쓰였던 건데.
“아니, 그냥 이 꽃.”
“그게 뭐?”
“보라색 장미. 왠지 익숙하다 싶었는데, 기억났어.”
“……실없긴.”
“어릴 때, 아빠 있을 때, 내 방에 많았었어.”
“아, 미안…….”
“아니, 아니야. 좋은 기억도 아닌데…….”
그리 대답하면서도 루나는 보라색 장미꽃에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꽃 한 송이.
자신의 머리 색과 같은 보랏빛이라는 것은, 이 꽃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준비했다는 걸까?
오늘 엘븐하임에 바로 돌아오게 될 것은 자신들도 예상 못 했는데?
왠지 싱숭생숭한 마음에 자꾸만 꽃을 들여다보는데.
“……꽃말이라는 게 있어요. 알아요, 루나 양?”
어느새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갑자기 다가온 에스티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꽃의 말?”
“그 꽃을 건네는 의미라는데요. 음, 보라색 장미 꽃말이 뭐였더라……?”
“뭔데?”
“아, 까먹었다. 장미는 사랑이긴 했는데, 보라색이 뭐였더라?”
장난스러운 에스티나의 태도에 루나가 샐쭉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좋은 뜻이니 기억해 두라고요, 루나 양.”
“좋은 뜻?”
“엘프의 문화도 루나 양으로 인해 조금씩 바뀌어 갈 거예요. 저기 봐요.”
에스티나가 가리키는 곳.
그곳에는 ‘보라색’ 꽃가루를 뿌리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엘프 아이들이 있었다.
“♬♪!”
“바보야, 공용어로 해!”
“언니! 멋져요!!”
“우리보다 어릴걸?”
“어쨌건 좋아. 이뻐! 멋져! 저 단검도!”
“사신도 멋져!”
어른 엘프들과는 달리, 어린 엘프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혹시……?”
긴말은 하지도 않았지만, 에스티나는 그녀의 의도를 즉각 알아채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가 시킨 게 아니에요. 저 아이들이 좋아서 하는 거지. 아무래도 살벌하게 생긴 아저씨들이나 지위 높은 나보다는, 루나 양이 더 마음에 드는 거 아니겠어요?”
“아…….”
“오늘 하루는 푹 쉬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 다시 힘내 보자고요.”
“……응.”
탐욕의 군주를 꺾은 날.
온갖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채 풀리지도 않은 날이었지만.
루나는 그날 유독 행복한 꿈을 꾸며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