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탐욕, 애버리스 (3)
애버리스가 보이는 노골적인 욕심.
그것은 신이라 자처하는 수준의 격에 비하면 저열해 보일 정도였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놈을 상대하는 타이니로선 좋은 일이었다.
‘확실히, 이용할 수 있겠어.’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기회가 왔다.
“합!”
초고속으로 공방을 이어 가던 와중에 크롬벨이 갑자기 기합 소리를 냈다.
사전에 상의 따윈 없었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타이니는 그것을 자연스레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순간, 지금까지보다 좀 더 빠르게 가속한 크롬벨과 그의 정령 오투스가 애버리스의 앞뒤 좌우에 말 그대로 폭풍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콰콰콰콰콰콰.
쩌저적.
“크……!”
애버리스가 육성으로 신음을 토해 냄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검은 피, 아니 그림자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성과를 만들어 낸 크롬벨 역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공격 직후 일순간의 급격한 속도 저하 탓에 확실한 빈틈을 보이고 만 것이다.
- 흐……! 저주받을 여신의 검.
분노 섞인 영파와 함께 애버리스의 검이 그대로 크롬벨을 관통하려던 찰나.
타이니가 그대로 녹턴을 애버리스에게 던졌다.
콰아아앙!
거대한 워해머가 공기를 찢는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는데.
- 호……!?
애버리스는 크롬벨을 공격하려던 것을 멈추고, 워해머의 궤도를 슬쩍 비켜 내며 그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까지 초고속 공방전을 벌이던 그의 급격한 행동 변화.
우드드득.
인간 형태의 육체에 과부하가 걸렸지만, 그의 본질은 어차피 그림자.
일순간 부하를 해소하기 위해 그림자로 돌아간 그의 손이 그대로 녹턴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지금의 상황, 녹턴에 이글거리는 노을빛 오러의 기세와 속도, 그리고 초월무구가 가진 주인 선별의 특성을 생각하면 투척 역시 훌륭한 공격 수단일 수 있겠지만.
- 어리석은 놈, 감히 신에게!
그 모든 것이 반신인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래, 그래야 했는데.
우드드득.
- 윽!?
녹턴의 손잡이를 움켜쥔 애버리스의 몸이 녹턴이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그대로 틀어졌다.
무슨 특수한 수법이나 오러 때문이 아니라,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녹턴의 무게 때문이었다.
일순간 반쯤 그림자로 화한 그의 육체로는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자연히 온몸에 허점이 드러나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 곤두세운 감각에 적의 모습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착각이었다.
상체를 거의 땅에 닿을 듯한 높이까지 숙인 채 태클을 걸어 오는 적.
정령 늑대를 타고 그 기동력을 바탕 삼아 초고속 공방전을 이어 오던 적의 체고가 갑작스레 너무 낮아진 탓에 한순간 괴리감을 느낀 것이었다.
‘무슨……?’
아주 짧은 순간의 혼란.
하지만 그것이 한 번 더 빈틈을 만들었다.
우드득.
그 사이 타이니가 애버리스의 발목을 잡아채고.
콰드득.
한순간 애버리스의 시각에서 사라졌던 월랑이 다시 나타나 녹턴의 손잡이를 쥔 손을 물어뜯었다.
- 어딜……!
제법이었지만, 그에겐 애초에 자신의 본질이 그림자라는 것을 간과한 공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애버리스의 몸은 일순간 의태를 포기한 채 그림자로 변해 그대로 녹턴만 붙들고 이탈했다.
아니, 하려 했다.
우우우웅.
그의 발목에서 시작된 노을빛 오러가 전신의 마기 패턴을 일순간 미미하게 흐트러트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 네가 신이라고?
- 무……?
파아아앙!
적의 비웃음 섞인 영파가 그의 정신을 강타하는 순간.
- 그럼 나는 신살자(新殺者)다.
애버리스가 미처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타이니는 그의 몸을 통째로 들어 휘둘렀다.
월랑이 턱이 깨져라 꽉 물고 있는 녹턴의 ‘망치 머리’를 향해서.
- ……슨……?
생각이 엇갈린 그 찰나의 순간은 서로에게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타이니와 애버리스 모두 초고속 전투 상태에서도 본능이 아닌 이성으로 반응이 가능한 초강자들. 그들의 생각이 교차하고 타이니가 애버리스의 몸을 들어 녹턴을 향해 휘두르기까지는, 그야말로 일 초를 수분의 일로 나눈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같이 싸우던 크롬벨이 몸의 과부하를 식히던 극히 짧은 순간에 벌어진 치명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꽈아아아앙!
- 끄아아아악!
애버리스가 처음으로 요란한 비명을 토해 냈다.
- 녹턴의 멸살의 권능은 망치 머리에만 있다. 가능하면 직접 후려치는 게 나아. 하지만…….
- 꼭 녹턴으로 때려야 하나? 적을 들어서 녹턴에다 갖다 박아도 되잖아.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참사(?).
그리고 이어진 엽기적인 폭력의 연쇄.
“신은 무슨!!”
쾅. 쾅. 쾅. 쾅. 쾅.
우르르르릉.
“더러운 마족 놈이!”
타이니는 애버리스의 몸이 마치 망치라도 되는 양 발목을 잡고 연신 사방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월랑은 그때마다 타격 지점에 절묘하게 녹턴을 가져다 대며 애버리스의 몸에 회복되지 않을 상처를 입혔다.
“하…….”
“저게……?”
“…….”
크롬벨과 에스티나가 순간 말을 잃고, 루나마저 모습을 드러낸 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광경.
그것은 고통스러워하던 애버리스가 타이니의 마력 방해 패턴을 파악하고 자신의 발목을 스스로 끊어 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 크아아악! 이놈! 용서 못 한다!
그리고.
스르르륵.
한순간 그림자로 변해 전장 멀리 이탈한 애버리스.
그림자의 왕은 그렇게 대수림의 서쪽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세계수의 힘으로 만들어진 성역을 한순간에 벗어나 버린 것.
얼핏 도망가는 것 같기도 했지만, 타이니는 쫓지 않았다.
- 성역이 아닌 어둠 속에서 그림자의 왕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 차라리 그 근방을 모조리 날려 버리고 허공에서 싸우는 게 낫죠.
전투 직전 크롬벨이 당부했던 교전 수칙 중 하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왜인지 놈이 도망가는 게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든 것이다.
‘자칭 신이라는 놈이, 자존심이 있겠지.’
그리고 역시나.
- 네놈들! 장난은 여기까지다!!!
우르르르릉.
그 순간 살벌한 영파가 울리며, 대수림의 어둠 속에서부터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대수림의 서쪽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소름 끼치는 살기.
그 근원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마기가 이내 한곳으로 수렴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크롸롸!
깨갱.
끼에에에에!
숲의 일각에 숨어들었던 마물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중심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솨아아아아.
동시에 주변의 대기가 일그러지더니, 그 근원에서 검은색 폭풍이 일어나며 하늘 위의 구름을 밀어 냈다.
“……도망친 주제에 거창하게도 쇼를 하는구나.”
손에 들린 놈의 잘린 발목, 아니 그림자의 일부를 신경질적으로 소멸시킨 타이니가 크롬벨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크롬! 저거 뭐 같아!?”
그 고함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크롬벨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실체가 파악이 안 돼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요점은 바로 탐욕, 스스로를 애버리스라 말한 칠죄종의 ‘진짜’ 전투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 상대의 장점을 조합한 모습으로 적에게 압도적인 절망을 심어 주는 것이 그림자 군주의 특징입니다.
- 하지만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탐욕은 자신이 최강이라 생각한 형태로 ‘진짜’ 전투를 치르죠.
- 상대를 보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정말 자신이 사냥하고 직접 잡아먹은 대상을 베낀 최고의 전투 형태로.
“고대의 탐욕은 어땠다고 했지?”
“마룡과 거대 마수들을 섞어 만든 9두룡 형태의 대마수였습니다. 에빌란이 자폭해서 핵에 타격을 입힐 때, 제가 성검으로 꿰뚫었지요.”
“아, 맞다.”
그 말에 타이니가 슬며시 서쪽의 어둠을 응시했다.
고대의 탐욕이 취했었다는 전투 형태는 말만 들어도 살벌하게 느껴졌으니까.
‘에빌란이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애버리스가 어떤 모습으로 나오건 크롬벨이 말한 그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만약 놈도 그와 비슷하다면, ‘용언’을 조심해야 합니다. 도플갱어의 왕은 잡아먹은 대상의 영혼에 새겨진 권능까지 사용하니까요.”
“알아. 알아들었어. 몇 번째 얘기하는 거야? 그럼 차라리 지금 공격할까? 저 근방 숲을 아예 날려 버리면……?”
“이 근처가 전부 숲입니다. 숨으면 답이 없어요. 아니, 설령 찾을 수 있다 해도 차라리 놈이 나오길 기다리는 게 나을 겁니다.”
“왜?”
“이것도 전에 말씀드렸……. 하, 놈이 도망쳐서 질투의 군세에 합류하기라도 하면 어떨 거 같습니까? 지금 그곳에 인류의 강자들이 죄다 모여 있는데.”
“아…….”
“기다리십시오. 최종 전투 형태로 변한 뒤에는 다시 그림자로 변신하는 데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그때는 도망도 못 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보고만 있자고?”
“도망치기 전에 단숨에 죽일 자신이 있다면 저 어둠 속으로 가 보든지요. 혹시 당신이 당하거나 실패하면 더 곤란해지겠지만요.”
“…….”
기분 탓인가.
분명히 존댓말을 듣고 있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타이니!”
그리고 그제야 원거리에서 전투 보조를 하던 에스티나와 루나가 한발 늦게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진짜로군요.”
“괜찮아. 동생이, 타격 많이 줬어.”
애버리스의 오러 분신을 상대하며 중상을 입었던 둘이었지만, 오히려 한 차례 전투를 또 치르고 난 지금이 더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전투 직전에 쓴 동족 강화의 권능이 제대로 효과를 본 것이다.
“오히려 전투 중에 회복이 되다니, 전보다 훨씬 효율적이군요. 회복에만 권능을 집중시킨 건가요?”
크롬벨이 뒤늦게 감탄할 정도였지만,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근데 지금 내 능력에나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이렇게 회복용으로 쓰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체 전력 강화를 하고 전투를 치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괜한 아쉬움에 다시 서쪽을 바라보는데.
우르르르르릉.
꽈아아아아앙!
거센 폭음과 함께 서쪽 숲 전체가 한순간에 날아가며,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의 적이 등장했다.
- 네놈, 용서치, 않는다.
쿵.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대지가 진동했지만.
놈의 모습은 크롬벨이 말한 고대의 탐욕과는 전혀 달랐다.
“저게 뭐야……?”
거대 괴수가 아닌, 인간형 마수와 같은 형태였던 것.
대략 3m 정도 되는 키, 온몸을 덮고 있는 검은색 비늘, 등 뒤에 펴진 두 쌍의 박쥐 날개, 그리고 용의 머리는 신화 속에서나 듣던 드래고니안을 떠올리게 했지만.
관자놀이에서부터 뻗어 나온 산양의 뿔과 무려 세 쌍의 손에 들린 6개의 장검은, 신화 속 용인(龍人)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악마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 기세만 해도, 일행의 모습을 섞어서 흉내 내었던 모습과는 현격히 달랐다.
다만, 그 악마적 분위기를 풍기는 괴물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저건…….”
세 쌍의 팔 중 한 쌍은 이미 이상한 각도로 부러진 채 늘어져 있었고, 오른쪽 발목은 완전히 으스러져 그림자 모양의 발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더구나 가슴에는 움푹 함몰된 상처가 있고, 안면의 반이 일그러진 용의 머리 위 본디 한 쌍이었어야 할 산양의 뿔은 한쪽이 완전히 박살 난 상태였다.
누가 봐도 제대로 중상을 입은 듯한 모양새.
“역시 회복은 못 한 모양입니다, 타이니 경.”
“허…….”
“내 동생, 최고.”
모두가 타이니에게 감탄하는 가운데, 정작 당사자는 애버리스의 모습을 보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놈이 어떤 괴물로 나타나건, 온전한 상태가 아닐 것이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었으니.
‘발목은 왜? 녹턴이 아니라 내 손으로 작살낸 건데?’
하지만 길게 의문을 가질 틈은 없었다.
- 갈기갈기 찢어, 끓여 마셔 주마.
[꿇어라!!]
우우웅.
“흡!?”
“뭐?!”
“이건……!”
지극한 분노를 담은 영파와 함께 무거운 기운이 킬로미터 단위를 격하고 그들의 전신을 찍어 누르는 순간.
“캬아아아아!”
용인의 형태를 한 애버리스의 입에서, 전방 전체를 뒤덮는 엄청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콰.
우르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