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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327화 (327/500)

327화. 대미궁의 종말

파바바바박.

콰콰콰콰콰콰콰.

들판을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은빛 늑대의 질주는 어마어마한 흙먼지의 폭풍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런 질주도, 기수의 마음에 차지는 못했다.

“가자! 가자! 더 빨리!”

그에 응답하듯, 월랑의 몸에서 노을빛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크헝!”

우우우우웅.

월랑이 새로 터득한 기술 적염갑에 육체 능력을 증폭하는 효과까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 역시 마나라는 명백한 소모값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젠장, 그 자식 무슨 짓을 한 거야!?’

혹시 모를 변수를 고려해 강림까지 9일가량 시간을 남겨 놓고 차원 균열에 도착하려는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난 최선을 다했어. 그래도 남은 놈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타이니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대수림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질주의 와중에, 갑자기 그의 영혼이 쭈뼛 서는 듯한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이다.

파지직.

“윽!?”

단순히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미 강해질 대로 강해진 그의 영혼에 전달되는 세상의 진동.

이 세상의 이면에서, 그 어느 한구석이 아예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이내, 초월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의 감각에 서쪽에서부터 전해진 미묘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이 세상의 서쪽 끝에서 시작된 것 같은 그 진동이 울린 순간, 주변 마나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당장 느껴지는 흐름은 미묘한 정도지만, 그것이 세상 전체에 일어난 변화라면 얘기가 달랐다.

서쪽 끝.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변화.

그 두 가지 단서에서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대미궁……?”

자연스레 한 인간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크롬벨!”

솔직히 대미궁의 큰 축인 고대의 폭식이 사라졌으니, 그곳이 이전처럼 형태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라고만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을 뿐, 이렇게 갑자기 충격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시점에 그런 변화가 생겼다면, 그것이 차원 균열에 미칠 영향이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강림 시간은? 칠죄종은? 대체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연히 마음이 급해지고.

“서두르자!”

“컹!”

마치 지상을 달리는 노을빛 유성이 된 듯한 질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타이니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이가 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끼루루루루루루!

- 타이니!

허공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음성.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지상을 달리던 월랑이 자연스레 허공으로 방향을 꺾었다.

파아아아아앙.

쎄에에에에에.

지상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는 유성과, 허공에서 고도를 낮추는 녹색 폭풍.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카일룸과 지상에서 비스듬히 올라가는 월랑이 공중에서 마주치려던 순간.

“에스티나!”

타이니는 그대로 월랑을 소환 해제하며 거대한 독수리 정령 카일룸의 등 뒤에 올라탔다.

“느꼈어!? 서쪽의 진동!?”

“당연하지! 아마도 크롬벨이 대미궁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걸 거야!”

“균열에 영향이 있을까!?”

“몰라, 가 봐야지!”

인사 따윈 생략한 채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어진 대화.

그에 카일룸은 다시금 속도를 높여 창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앙.

“루나 양은 도착해 있겠지?”

“그렇겠지. 이동 속도가 다르니, 한참 전에 출발했을 테니까.”

“그런데 만약 크롬벨이 대미궁에서 장군을 죽여서 질투가 강림한 거라면, 루나 양 혼자서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자신도 모르게 버럭 지른 고함.

그에 에스티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본 후에야 타이니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미, 미안. 아, 아니 내 말은…… 적어도 루나가 생각이 있다면, 칠죄종과 혼자 싸우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었어. 그리고 대미궁의 파장이 꼭 강림에 영향을 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횡설수설하듯 쏟아 낸 변명에 에스티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혹시나 해서 한 말이야. 칠죄종이 강림했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 테니까.”

성의 없는 사과를 진중하게 받아 주는 말.

그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 타이니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가리온 쪽은?”

“노네임을 잡았어. 거기에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된 거 같아.”

에스티나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지만, 타이니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뭘 잘했다는 거 같은데…….

“노네임? 무명?”

“언데드 병단의 일곱 장군 중 하나. 솔레인 님 말로는 고스트 킹이래.”

“아……!”

“전장을 감싼 안개 같은 놈이었는데, 그 녀석 때문에 좀 곤란했었나 봐. 아무튼 녀석을 처리하고 나서는 오렌 평야에서 출발한 정예들도 대다수 도착했고, 연합군의 숨통이 좀 트였어.”

“……다행이네.”

“솔레인 님이 만든 그 군단 스킬이라는 게 큰 도움이 된 거 같아.”

“군단 스킬? 그건 또 뭐야?”

“나도 한 번 봤을 뿐이라 자세히는 몰라. 일단 이쪽을 정리한 뒤 합류해서 확인해 보자고.”

“……그래.”

“도플갱어들은?”

“황궁에서 10마리를 잡았고, 나중에 10마리 더 처리했어. 루나가 17마리를 잡았다면 다 처리한 것일 텐데, 확인을 못 했으니…….”

“황궁에서 10마리?”

“응. 루나가 표식을 심지 못한 녀석 3마리가 더 있었어. 식겁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녀석들이 연합군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는 거 정도야.”

“확신하는 거야?”

“어. 한 놈 잡아서 고문해 봤는데, 적어도 그 부분은 진짜로 말한…….”

“고문!?”

“아, 그게…….”

“아니, 놈들한텐 그게 최선일 텐데 왜 안 갔지?”

“정말 칠죄종끼리 알력이 있는 걸지도…….”

옆길로 샐 뻔한 두 사람의 대화는, 알맞게 호응해 준 에스티나 덕에 다시 마계 군단 얘기로 넘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긴장한 채 지상을 내려다보던 그들은, 본래 차원 균열이 있던 곳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루나의 모습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전부터, 와 있었는데, 균열은 변화 없었어. 아까 서쪽에, 진동이 있을 때도.”

차원 균열은 40일 전 그들이 흩어졌을 때에 비해 더욱 커진 채 짙은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다행이네.”

“그럼 아마 원래대로?”

“그 49일이란 것도 그냥 추론이었는걸. 뭐, 더 빨라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쨌건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야.”

그 말에 에스티나와 루나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왜?”

“그게…….”

“조금…….”

“이상해.”

동시에 같은 말을 꺼낸 에스티나와 루나의 눈이 마주쳤다.

두 여자 사이에 일순간 공감대가 흐르는가 싶더니.

“가설이긴 하지만, 정말 부하들의 목숨으로 강림의 시간을 당길 수 있는 거라면, 탐욕이라는 놈도 이미 자기 부하들 대다수가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 변화가 없어. 그게 더, 불안해.”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이 한가지 결론을 말했다.

그리고 타이니가 듣기에도 분명 그것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건 그렇지. 흠.”

“아, 아니면 우리 가설이 틀렸을 수도 있어.”

타이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에스티나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지. 만약 알면서도 변화가 없는 것이라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제일 희망찬 가정은, 놈에게 강림의 시간을 당길 방법이 더 이상 없다는 건데.”

“그건 정말, 희망 사항.”

“그렇지.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뭐가 있을까?”

“…….”

추론도 사전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애초에 일곱 장군의 목숨이 강림의 시간을 당기는 요소라는 생각도 가정에 불과할 뿐.

세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 뒤, 조금 더 커지고 마기가 진해진 차원 균열 앞에 크롬벨이 도착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완전히 얼음처럼 굳어 버린 마족의 몸을 들쳐 업고.

* * *

대미궁의 생성 자체가 자신의 과오라고 말하던 고대의 용사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심히 궁금했지만.

“그건, 굳이 아실 필요 없습니다.”

크롬벨은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쿵.

“앞으로 더는 마역의 침식이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줄어들겠죠. 대미궁 내 초월급이나 악마급 마족도 더는 생성되지 않을 겁니다.”

마족의 몸뚱이를 내려놓으며 그리 말하는 크롬벨의 표정은 확실히 밝아 보였다.

무언가 맺힌 것을 털어 낸 듯한 모습.

심지어.

“뭐, 그중 9할은 타이니 경과 루나 경 덕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정중히 예까지 표하는 그 모습은, 마인드 킬링으로 정제된 인격을 뚫고 진심을 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류는 세상의 미래를 망칠 수 있는 독 하나를 제거한 것이니.

타이니는 굳이 그에게 사정을 캐어 묻지 않았다.

“잘됐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상황에 대한 우리 생각이…….”

다만 며칠간 고민했던 탐욕의 강림 문제에 관해 그에게 의견을 구할 뿐.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크롬벨의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자신의 군단 상황을 알았어도, 숨기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뭐?”

“칠죄종들은 마왕 아래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입니다. 다른 칠죄종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테지요.”

“……그래서 위험을 알면서도 머리를 집어넣겠다?”

“위험이라…….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신의 자존심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선상에서 놓고 보시면 안 됩니다. 아마 애초에 군단 따위 없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특히 탐욕이라면 더욱.”

“탐욕이라면 더욱? 왜? 아니 그 전에, 당대의 탐욕은 모른다며?”

“그렇습니다만, 그 성향은 고대에도 현대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 칠죄악의 힘이 기본적으로 그 성향을 결정하니까요.”

“무슨 힘이 성격까지 결정한다고?”

“신성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으면서, 절대로 변화시키지요.”

크롬벨의 그 모순적인 말에는, 논리를 떠나 대번에 납득하게 되는 묘한 힘이 있었다.

“허…….”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고대에 칠죄종 모두와 싸워 봐서 압니다. 적어도…….”

“아니, 믿어. 적어도 칠죄종에 관해서는 경험자의 말을 믿어야지.”

“신성은 단순히 칠죄종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니의 그 말에 뭐라 반박하려던 크롬벨은 이내 피식 웃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뭐, 전혀 안 변하는 사람도 있죠…….”

타이니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내뱉은 크롬벨은 이내 다시 원래의 주제에 관해 말을 이었다.

“일단 ‘탐욕’은 칠죄악 중에서도 조금 특이합니다. 신화시대에는 ‘인색’이라 불리던 것이 고대에 와서 변화한 것이거든요.”

“음? 신성은 안 변한다며?”

“정확히는 개념이 확장된 겁니다. 남에게 나누지 않는 욕심, 그래서 인색이었던 칠죄악이 남의 것까지 욕심내는 탐욕으로 확장된 거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

“그림자 군단은 탐욕의 그런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군세입니다. 대상의 정체성과 기억, 힘, 생명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빼앗는 도플갱어지요. 인색이 탐욕으로 바뀌고 철갑 군단이 그림자 군단으로 바뀌면서, 탐욕의 서열도 칠죄종의 최하위에서 5위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탐욕은 계속해서 욕심을 부릴 겁니다. 같이 강림한 질투의 군세가 공을, 카르마를 독차지하는 것이 더 싫을 테니까요.”

“카르마는 뭘 말하는 거죠?”

“아니, 그 전에 폭식도 우리 손에 죽었는데 그냥 들이밀 거라고?”

“그건, 바보 아냐?”

세 사람의 반문이 어지럽게 섞이는 가운데.

크롬벨은 그중 폭식 얘기를 꺼낸 타이니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미궁에서 확인했습니다. 고대의 폭식, 굴라가 가진 원죄의 흔적을. 그렇다면 당대의 폭식은 원죄의 힘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했을 테고, 자연히 탐욕은 폭식을 자신과 동격이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원래도 서열은 더 높았으니까요.”

“그런…….”

“어쩌면, 부하들이 먼저 다 죽어서 강림의 시간이 빨라진 것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진짜, 바보.”

“그게 우리에겐 희망적이지요.”

“흠.”

“자, 일단 많이 달라졌을 수는 있습니다만, 제가 겪었던 고대의 탐욕의 능력과 특징에 대해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경향은 비슷할 테니까요. 변수는 알아서 방비하시는 걸로 하지요.”

크롬벨의 말이 이어질수록 타이니를 비롯한 청자들의 눈이 빛났고.

그로부터 다시 사흘 뒤.

완벽히 점검을 마친 일행은 마지막 남은 탐욕의 장군, 크롬벨을 닮은 마족의 핵을 차원 균열 앞에서 꺼내 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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