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황궁의 그림자 (1)
“설마!?”
늦었나?
황궁에서 솟구친 연기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은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쾅.
우르르릉.
황궁 안에서 퍼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의 파장을 느낀 후에는 오히려 안도할 수 있었다.
왜 도플갱어들이 숨어들지 않고 도리어 소란을 피우는지는 모르지만.
“……황궁이 놈들과 싸우고 있다.”
확실히 좋은 소식이었다.
“나도 도울까?”
“아니, 고작 7마리 가지고 뭘. 연합군이 더 급하다며? 어느 쪽이건 시간이 없어.”
“그럼 맡긴다?”
“물론. 가.”
그 말을 끝으로 타이니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그대로 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동시에 소환된 월랑이 그를 태우고 황궁을 향해 내달렸다.
“아우우우우우우!”
파아아아앙.
아세리안의 하늘 위로 은빛 유성이 내리꽂히며 울려 퍼지는 하울링.
그것은 지상에서 다급히 움직이던 사람들의 시선을 대번에 잡아끌었다.
“늑대!?”
“저건!”
“광휘의 기사다!”
“타이니 경!!!!”
비명인지 환호인지 알 수 없는 엄청난 호응을 들으며, 타이니는 황궁의 심부에서 날뛰고 있는 오크 형상의 괴물 7마리의 기척을 포착했다.
확실히 소울 사이트 없이는 마기조차 잘 느껴지지 않고, 정말 오크로 보일 만한 것들이었다.
초월급 마족 7마리.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절망적인 전력이었겠지만.
“너희들, 잘 걸렸다.”
지금에 와서는 쌓여 가는 스트레스를 풀 분풀잇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타깃이 된 놈들의 행태가 조금 황당했다.
“오크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다!!!”
쾅. 쾅. 서걱.
황궁을 사실상 반파시키고 있는 오크 일곱.
대놓고 오러를 뿜지는 않았지만, 황궁의 마나 동결 결계 안에서 위력적인 도끼를 휘두르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부수고 있었다.
건물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감히!”
쾅!
“컥!”
익스퍼트나 블레이더급으로 보이는 황궁 기사들이 오크들에 의해 속절없이 쓸려 나가고 있었다.
“인간 따위!!!!”
“하찮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오크들, 아니 괴물들의 목소리.
애초에 허락받지 않는 자는 마나를 쓸 수 없는 결계 안에서 황궁기사들을 저렇게 썰어 버리는 게 일반 오크일 리 없겠지만.
“끄아아악!”
“오, 오크들이……!”
“오크들이 쳐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시종들은 그런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서야 타이니는 이 소란의 이유를 깨달았다.
‘하, 이 새끼들 봐라?’
분명 크롬벨은 마족이 완벽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8단계, 악마급에 올라 이름을 얻고 난 후라고 말했다.
전생에 그가 싸워 봤던 마수병단 역시 악마급을 제외하면 이성이 있다고 할 만한 놈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 말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저놈들은 7단계, 초월급 주제에 굉장히 음흉하게 인류의 분란을 조장하고 있었다.
- 도플갱어는 다른 마족들과 결이 다르긴 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지요.
‘단순히 인간을 잡아먹고 흉내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건 들었지만.’
어처구니없게 이런 계략까지 꾸미다니.
저놈들이 지능이 있는 마족이라는 것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데,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능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그러자면 몇 놈을 사로잡아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뭐, 실험해 볼 가치는 있겠어.”
파아아아앙!
타이니는 그대로 허공에서 가속하며 오크로 변한 도플갱어 중 한 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뭐……?”
목표가 된 놈이 뒤늦게 놀란 얼굴을 들어 올리고, 위기를 감지한 몸에서 설핏 암흑 오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콰아아아앙!
가볍게 휘둘러진 녹턴은 그런 반응을 무시한 채 그대로 놈을 깔아뭉갰다.
그리고 타이니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난 오크의 몸뚱이를 보고 난 후에나 아차 싶었다.
‘그래도 명색이 초월급 마족인데 머리 깨졌다고 죽지는…….’
스르륵.
아, 녹턴.
‘……죽었네.’
그림자로 변한 오크의 시체가 그대로 소멸되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뭐, 입은 몇 개면 족하니까.”
“킁?”
“시끄러워. 셋은 네가 잡아라. 죽이지 말고.”
“컹!”
그 말과 동시에 오크들을 향해 튀어 나가는 월랑.
이내 타이니 역시 너른 황궁의 다른 쪽에서 난장을 부리고 있는 오크들의 기척을 쫓아 몸을 날렸다.
* * *
“킁?”
빈손으로 돌아온 타이니를 보며 월랑이 의문을 표했다.
“……미안. 좀 욱해서.”
오크의 형상을 한 마족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 광경을 보니, 손에 힘이 좀 많이 들어갔다.
그림자 마족의 내구가 생각보다 약했던 탓도 있지만.
“네가 잡아 둘 거라 믿었지. 고맙다.”
타이니는 월랑의 발밑에 깔린 오크들, 아니 도플갱어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킁.”
8단계에 오른 이후로 자연스레 타이니와 같은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월랑.
이번에 보니 녀석은 블랙홀의 힘을 응용해 만든 방어용 기술 흑영갑에 폭발의 힘까지 더해, 불꽃같이 일렁이는 오러의 갑옷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대단한 놈.”
그것은 단순한 보호막이 아니라 공수 양면에서 압도적 힘을 발휘하는 기술이었고, 그 덕에 월랑은 초월급 마족들을 손쉽게 사냥했다.
“그건 적염갑(赤炎鉀)이라고 부르자.”
“컹!”
팔다리가 전부 잘린, 아니 뜯겨 나간 마족들이었지만 어쨌건 다 살아 있으니.
‘입만 멀쩡하면 되지.’
그렇게 전투가 끝난 황궁을 다시 둘러보고 있자니, 그제야 그들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타이니와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타이니 경!? 왜 여기에……!?”
“……익실란 님.”
황제의 곁을 지켜야 할 황실 기사단장이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사하시지요.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고 나오던 참인데, 이렇게 다 해결해 버리셨군요. 왜 지금 여기에 계시는지는 몰라도…… 어쨌건 감사합니다, 타이니 경.”
불미스러운(?) 첫 만남 때와는 달리, 황궁 기사 익실란은 타이니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사실 지금 광휘의 기사라는 이름에 맞먹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옛 인연의 바뀐 태도를 보니 새삼스레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게 되었다.
한편 그런 감상보다 황궁의 난리에 더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기사단장 익실란의 시선은, 이내 월랑의 발아래에 깔린 오크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끄르르.”
“오크를……”
“해방하라…….”
팔다리가 잘린 상태로도 연기를 계속하는 마족들.
주위에 모여든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와락 찌푸리는데.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것들은 그냥 오크가 아닙니다. 마족이죠.”
“마족이요?”
쾅!
타이니의 발이 오크 하나의 머리를 터트리는 순간, 익실란의 반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우우우웅.
스르륵.
죽는 순간 시체를 남기지 않고 그림자로 화해 사라지는 마족.
그러자 그 즉시, 익실란이 아니라 월랑에게서 반응이 왔다.
“컹!”
사로잡으라더니 왜 죽이냐고?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2마리나 더 있으니.
‘길게 설명하는 게 더 귀찮아.’
타이니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익실란과 황궁 기사들의 안색도 확 변했다.
“이건…….”
“도플갱어. 칠죄종이 거느리는 그림자 병단의 정예 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지요. 그리고 지금 서부 국경에서 오크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긴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람을 잡아먹고 모습을 바꿔, 그 사람인 척 행동하며 분란을 조장하는 괴물이죠. 다만, 이렇게…….”
“캬악!”
머리가 터진 채 꿈틀대던 오크가 입가에서 암흑 오러를 내뿜으며 타이니의 발목을 물어뜯으려 할 때.
쾅!
“암흑 오러까지 쓰는 초월급 마족이라는 게 문제지만요.”
“아…….”
월랑이 노을빛 오러가 불꽃처럼 일렁이는 앞발을 휘둘러 오크의 머리를 제압하자, 그것을 본 익실란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익실란 님, 고문 기술자를 불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살벌한 표정으로 이어진 타이니의 말은, 그를 더 황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
“변신한 마족이 인류처럼 고통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놈을 고문해서 동료들에 관한 정보를 토해 내게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예에?”
“사실 여기에 오래 머물 순 없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이놈이 딴짓 못 하게 제가 참관하겠습니다. 힘도 좀 빼 놓고…….”
“왜 굳이 마족을……?”
마족을 고문한다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발상이었다.
“아, 루나가 표식을 못 남긴 놈들도 있다고 해서요.”
그건 또 뭔 소린데?
“이, 일단 황제 폐하를 뵙고 나서…….”
“그럴 시간 없어요.”
고문할 시간은 있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더 혼란스러워졌지만, 결국 익실란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황궁의 소란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비상사태가 유지되고 있던 만큼 상시 대기해 있던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성을 수리했고, 경계 인력도 금방 재배치된 것이다.
그리고 황궁의 지하 한구석에서는, 그때부터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그, 그만!”
달궈진 부지깽이가 이빨 사이를 파고들자 월랑의 발에 짓눌린 오크, 아니 마족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크의 몸이 부르르 떨릴 때마다 넘실거리기는 마기.
그 마기는 노을빛 오러가 움직이는 순간 완벽하게 지워지고 있었지만, 마족의 모습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보통의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행히 고통은 느끼는 것 같은뎁쇼……?”
황궁의 고문 기술자가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데.
“아는 거 다 토해 내면 편히 보내 준다. 불어.”
아주 잘됐다는 듯 살기에 찬 미소를 지은 타이니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슬쩍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괴, 괴물…….’
황궁의 지하에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어두운 일만 해 온 고문 기술자 한스는, 끔찍한 기운을 뿜어내는 오크보다 뒤에 서 있는 이자가 더 무서웠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드는 기세를 뿜어내는 야만적인 복장의 거한. 심지어 난생처음 보는 검은 머리에 거대한 은빛 늑대까지 다루는 자라니.
고문 대상이 마족이라고 하더니, 사실 그게 의뢰인 얘기였나 싶은데.
“이 새끼가, 내 말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 같은데? 다시.”
그 검은 머리의 손짓에 따라 한스는 다시금 익숙한 기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손이 덜덜 떨리기는 했지만, 거한의 지시 덕분에 고문은 더욱더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이 정도면 다 정리가 되었을까요?”
한스는 힘겹게 알아낸 정보를 가득 적은 양피지를 내밀며 거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피식.
“이게 되네……. 역시 마족 놈들이라 동료애 따위는 없는 건가?”
오크의 형상을 한 마족 둘을 거의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을 눈 하나 깜짝 않고 감상한 거한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똑똑한 마족도 쓸데가 있네.”
타이니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괜히 하루를 낭비하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열흘을 더 번 것 같았다.
“한스라고 했나? 수고했다.”
넝마가 된 마족들이 그림자로 화해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한스는 한 점의 트집도 잡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 무언가 찜찜한 것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저, 저기 그런데…….”
“음?”
“방금 저놈. 죽기 전에, 웃었는데요…….”
“그게 뭐?”
“가끔 그런 놈들이 있습니다. 술술 다 불어 버리는 것 같지만, 정작 가장 치명적인 정보는 숨기는 놈들. 그런 놈들이 마지막에 그런 표정을 짓……습죠.”
“뭐!?”
한스의 그 마지막 말에 괴물, 타이니의 표정이 일변했다.
‘가장 치명적인 정보를 숨긴다……!?’
타이니의 시선이 정보가 적힌 양피지를 다시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