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랑켄 평야
왕국 연합 중, 대륙의 동부 해안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자유 도시들과 접경한 나라 가리온.
길쭉한 국토를 가진 그 가리온 왕국의 남부, 랑켄 평야에는 수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반경 5km는 넘을 듯한 너른 들판의 중심, 텅 빈 공간을 기준으로 넓게 포위망을 짜고 있는 듯한 묘한 진형.
하지만 그것도 멀리서 보았을 때나 그런 것이지, 막상 거기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리에 아군이 넓게 흩어져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 즈음일 텐데, 왜 아직도…….”
저물어 가는 석양빛을 보며 검제가 초조한 듯 말끝을 흐렸다.
“범위가 너무 넓은 거 아닐까요? 혹시나 저희가 무언가를 놓쳤다거나…….”
제나스의 말에 검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사방을 노려보았다.
“오렌 평야보다 좁은 곳이야. 넓어 보인다면 병력의 문제지.”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와 보병 대다수는 오렌 평야에서 마수병단과 결전을 벌였던 연합군의 최정예가 아니었다.
왕국 연합에서 급하게 차출된 인원들이 머릿수만 메꾸고 있는 것.
매와 같은 검제의 눈에는, 전열에서 긴장감 없이 하품을 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있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기강부터 제대로 잡았을 텐데.’
속이 타는 심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거기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리온 왕국은 근위 기사단까지 대다수 보낸 모양입니다만, 다른 왕국들은 좀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예비 병력 중에서도 2진급을 보낸 것 같습니다.”
제나스의 말에 검제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발등에 불 떨어진 게 가리온뿐이라 생각하는 건가? 어리석은 자들.”
마수병단과의 싸움이 쉽게 마무리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가 적은 수인족과 드워프들은 이미 오렌 평야에서부터 전사들을 거의 다 보냈었고, 오크 전사들은 소문만으로도 엘븐하임으로 몰려가고 있다는데 어째서 인간들만…….”
제나스가 한탄하듯 말했지만, 이 X 같은 상황의 이유를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욕심이지. 오렌 평야에서의 승리가 왕들의 욕심을 부추긴 거야. 아무래도 왕국 연합은 서로 연맹이면서도 경쟁하는 사이니까.”
“이번 전투를 극복해 내고 나면 그 왕들부터 갈아 치워야겠군요. 이러다 안에서부터…….”
“말조심해라, 제나스. 듣는 귀가 많다.”
분노로 이어지려던 말을 검제가 잘랐다.
솔직히 그도 제나스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분란을 일으킬 만한 말이 새어 나가선 안 되니까.
“……예.”
제나스가 그답지 않게 얼굴을 구기며 반 박자 늦게 대답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무슨 명분이라도 갖다 붙여서 연합의 왕들을 싹 갈아 치우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그에겐 당연히 그럴 명분도, 시간도 없다.
검제는 답답한 마음을 숨기며 다시금 여유를 가장했다.
“다행히 최정예들은 모두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으니 괜찮다. 해낼 수 있어.”
그 목소리가 조금 크게 울려 퍼지며 주변에까지 전해지자, 당장 그 뒤에 도열해 있던 블루윙의 기사들부터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전체 병력도 부족하고, 초인 중 최강의 전력들도 이탈해 있는 마당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사람이 간절해지면, 희망에 매달리게 되니까.’
자연히 지금 그의 말은 병사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갈 것이다.
‘명색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꼼수뿐이라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데.
파아아앙.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아르곤이 그의 옆에 내려섰다.
“성물 점검과 마법진 활성화. 전부 준비되었습니다, 영…… 아니, 각하.”
“……영, 뭐?”
검제가 꼬투리를 잡자,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확연히 날카로워진 푸른 눈이 움찔 떨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 성물의 힘이 지난번 출력의 반 정도만 나올 거라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솔레인 님이 어떻게든 보조해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는 듯 황급히 말을 잇는 아르곤.
그 모습에 검제는 헛웃음이 나오며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조금 풀어졌다.
‘이 녀석도 재밌는 녀석이란 말이지.’
속으로야 웃음이 나왔지만, 전쟁을 앞둔 마당에 군대 전체는 몰라도 최소한 수뇌부만큼은 기강을 잡아야 했다.
전술 따위 무시하고 혼자 날뛰어도 되는 괴물은 타이니 하나뿐이니까.
“타이니와 어울려 다니더니 자네도 간이 부은 건가, 아르곤 경!?”
자연스레 뿜어진 기세에 의해 그의 영역, ‘중압의 고리’가 아르곤의 몸을 짓누르는 순간.
삐이이이잉.
갑자기 아르곤의 품 안에서 튀어나온 회색 구체가 그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영역의 효과까지 반감시키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음?”
“어, 어울린 게 아니라 강제로 끌려다닌……. 죄, 죄송합니다!”
황급히 변명해 보려던 아르곤이 바로 고개를 숙이는데, 검제와 제나스의 황망한 시선은 그 회색 구체를 향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보물.
“이건 뭔가? 설마 초월……?”
“아! 일전에 그 괴물 자…… 큼, 타이니와 함께 황궁에 들렀을 때 브레들리 폐하께서 하사해 주신 초월무구, 동글이라고 합니다.”
“초월무구 이름이 동글……?”
제나스의 어이없다는 듯한 소리에 아르곤이 빠르게 반응했다.
“아, 그건 제가 지은 이름이고 원래는 케레브룸(Cerebrum)이라고 합니다. 마법의 시전 속도를 보조해 주는 능력도 있고, 보시다시피…… 전자동 방어 기능도 있지요. 아, 물론 저는 자동 방어 기능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법 보조 능력 때문에 선택한…….”
그에겐 화제를 돌릴 구실이 필요했으니까.
아르곤이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 갔지만, 이미 두 사람의 시선은 그보다는 동글, 아니 케레브룸이라는 초월무구를 향해 있었다.
“폐하께서, 그것도 타국의 인재에게……. 허허, 정말 연합의 왕들도 좀 본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용케도 이런 특이한 무구를 찾았군요. 자동 방어형 초월무구라면 조건도 특이할 것 같은데.”
“이 친구가 실없어 보여도 오러유저에 7서클 마법사다. 이만한 인재라면 특별한 초월무구를 얻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
“하, 하하. 예, 뭐. 다행히도…….”
아르곤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동글이의 사용 조건에, ‘마흔 이전 7서클 달성’뿐만 아니라 ‘극도의 위험 회피형 성정’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제국 최고의 기사 둘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그의 바람대로 화제는 초월무구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시간이 허락했다면 저희도 황궁에 들러서 폐하께…….”
“아서라. 네 그 검, 북극의 바람을 찾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리지 않았느냐? 당장 조건에 맞는 초월무구를 찾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그만! 제나스, 약해졌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나도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니. 하지만 알아 두거라. 초월무구는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많으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예?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만?”
“아, 타이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자연히 이어진 둘의 대화에서 자신이 아는 얘기가 나오자, 아르곤이 얼른 끼어들었다.
“음?”
“보통의 초인이라면 둘 이상의 초월무구는 몸과 영혼에 과부하만 주게 되니, 오히려 부작용이 더 클 수도 있다고요. 타이니 그 녀석이 자신에게도 3개가 딱 적당할 것 같다고, 더는 욕심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녀석이 그런 말을……?”
“예. 그래서 저와 루나 양이 고른 초월무구도 그 녀석이 점검해 줬습니다. 과부하가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까지도요.”
“……그 녀석도 참, 그런 건 미리 공유 좀 해 주지. 그 악마추종자들이 썼다는 무기도 얼마 후면 보급이 될 거라면서? 그것도 그놈이 찾았는데, 왜 내가 그걸 건너 건너 들어야 하나?”
검제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자, 아르곤이 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 그게 타이니 녀석이 일이 바빠서 바로 엘븐…….”
어라?
내가 왜 그 녀석 변명을 해 주고 있지?
그런 자각이 드는 순간 말끝이 흐려졌지만, 다행히도 검제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을 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쩌저저적.
멀리 랑켄 평야의 동쪽에서, 허공에 검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으니까.
“전군 전투 준비!!!!”
대번에 인상을 굳힌 검제가 하늘을 향해 붉은 오러를 쏘아 올리는 순간.
- 전투 준비!!!
- 전투 준비!!
- 움직여! 움직이라고!
사방에서 복창 소리가 들려오며, 평야 전체에 거대한 인간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성역 선포]
오렌 평야에서 쏟아졌었던 성물의 빛이, 균열이 시작된 곳을 강타했다.
스아아아아아아.
새어 나오는 마기 탓에 어둑해지려던 하늘이 성물의 힘에 의해 다시금 밝아지는데.
그것을 본 연합군의 수뇌부, 초인들은 일시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 그때만 못하다.
오렌 평야에서의 격전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 쏟아지는 빛의 힘이 그때보다 모자라다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대적으로 마법에 조예가 깊은 자는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구조는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바뀌었는데, 위력은 더 모자라다니…….’
아르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본능은 이미 ‘X 된 거 같다’라는 신호를 보내 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몸은 균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성을 꽉 붙들어 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타이니에 의해 마물 앞에 내던져지며 단련된 습관.
- 도망쳐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자신을 한계까지 미친 듯이 몰아붙이던 괴물 친구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 네가 몸을 사리는 만큼, 그보다 많은 사람이 죽는다. 명심해, 넌 초인이야.
그 녀석 말에 의하면, 전생의 자신은 혼자 숨으려다가도 고아원을 보호하기 위해 마수병단 앞에 나섰었다고 했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겁쟁이 초인이라는 오명이 사라지고, 대신 마도 기사라는 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던가.
지금도 과분하게 느껴지는 이명이었지만, 타이니 녀석이 그렇게 부른 뒤로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솔직히 전생의 그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뜨끔했다.
모르긴 몰라도, 전생에 자신이 그렇게 나선 이유는 타이니가 생각한 것처럼 의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란 의심이 들었으니까.
최근에는 혹시나 해서 확인도 해 봤다.
- 어디라고?
- 왕국 연합 남쪽 어디였는데?
- 혹시 로스트 폴이란 도시 아냐?
- 아, 맞다!
거긴 자신이 자란 도시였다.
아마 자신이 보호했다는 고아원도, 마탑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신이 신세를 졌던 롬멜 고아원이었을 것이다.
-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엄마가 백 밤만 자고 난 뒤에 찾으러 올 거야. 알겠지, 아르곤? 그때까지 울면 안 돼. 자, 약속.
- ……응.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 가족에 대한 마지막 단서가 남아 있는 곳.
과연 전생의 자신은 아이들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추억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 하. 겁쟁이 초인이라더니, 마도에서 태어난 기사구먼.
오크의 대전사 저릭이 했다는 그 과분한 평은 정말 마땅한 것이었을까.
만약 아니라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균열이 열리자마자 최전선에서 돌진하는 검제와 북풍의 기사.
남쪽 가장 선두에서 뛰어오고 있는 문나이트,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달려오는 저릭과 웨폰 마스터, 어느새 균열 근처에서 대기 중인 기갑왕 하이넨과 성령 기사 갓 핸드까지.
‘모두 나랑 달라. 정말…….’
겁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패기만만한 기세를 내뿜는 저 당당한 초인들의 옆에 자신의 이름을 더할 자격이 있을까?
마도 기사.
스스로 부르기는 낯부끄러운, 그 명예로운 이름을 자처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그 생각에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데.
문득 이런 복잡한 생각은 전혀 관심 없을 녀석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광휘의 기사라는 별명이 부담 안 되냐고? 전혀. 좋은 뜻이잖아.
- 아, 과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너 지금 나 머리 나쁘다고 시비 거는 거……. 아, 아니라고? 흠…….
- 뭐, 이해는 못 하겠다만…… 설령 지금 당장 과분하게 보이면 어때? 어떤 말이 따라붙건, 난 어차피 삶으로써 내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건데.
정말 생각 없어서 좋겠다 하고 웃어넘겼던 그 이야기가, 이 순간 가슴에 콕 박히는 것 같았다.
- 삶으로 그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
그 자신감이 솟구치다 못해 하늘을 뚫을 것 같은 패기는 흉내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 미친놈처럼 마왕의 골통을 깨고 세상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새기는 일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보다 작은 목표라면.
‘이름에 걸맞은 사람 정도야, 뭐…….’
마도 기사.
혹 그 이름이 설령 진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진실로 만들면 된다.”
각오를 굳힌 순간, 아르곤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加速(가속)]
그가 마도 검술의 힘으로 폭발적으로 가속하는 순간.
쩌저저저저적.
파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타원형으로 벌어진 균열 안에서 몰려나온 새까만 박쥐 떼가, 쏟아지는 신성한 빛을 뚫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