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추적 (1)
두두두두.
마나가 약간이나마 회복되자마자, 타이니는 월랑을 소환해 탐지기를 들고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파바박.
주변의 경물들이 빠르게 지나쳐 갔지만, 평소보다는 확연히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회복과 이동을 동시에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주력이 신성력인 크롬벨은 가장 먼저 힘을 회복하여 바로 대미궁을 향해 떠나갔고, 회복이 느린 에스티나는 기력을 되찾는 대로 카일룸을 타고 날아서 이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차원문은 발이 빠른 엘프 레인저들이 교대로 감시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했다.
‘빌어먹을 마족들. 치사하게 도망을 쳐?’
타이니는 이를 갈았다.
그림자 군단의 최정예들이 짧은 시간 내에 일으킨 참사는 실로 끔찍했다. 만약 균열이 열리는 위치를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 인류는 약자다.
그 대명제를 다시금 확실하게 일깨워 준 것.
그러니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칠죄종의 각 군단에 비해 조금이나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초인 전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뿐이었다.
- 도플갱어가 숨어들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연합군이야. 질투의 군세와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뒤통수를 맞게 되면, 인류는 치명타를 입을 테니까.
- 아뇨, 마계 군단들끼리는 지속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면, 아마 서로 돕지는 않을 겁니다.
에스티나와 크롬벨의 말이 머릿속에서 교차하며 타이니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어차피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각국 왕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연합군에 합류해서 질투의 군단에 최대한 타격을 입힌다. 그리고 40일 내에 다시 대수림의 차원문으로 돌아가서 탐욕의 강림을 견제한다.’
기간 대비 말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있는데 안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그보다 훨씬 뛰어난 기동력을 가진 에스티나는, 그 전에 탐지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아직 완전히 대상을 잡아먹지 못한 도플갱어들을 모두 사냥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맡은 역할은 사실상 그 후에도 남아서 연합군에 균열을 일으킬지 모르는 변수, 즉 인류의 지도자를 완전히 잡아 먹고 변신해서 탐지기에도 걸리지 않을 도플갱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선을 짜야 해.”
타이니는 머릿속에서 대륙의 지도를 그려 가며, 각 왕실과 현재 연합군의 위치를 고려해 이동 경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경로는 직선.
방해가 되는 지형 따위, 넘든지 뚫든지 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고도 안 되면 어쩔 수…… 아니, 안 되도 되게 한다.’
까득.
이를 악물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지는데.
그 순간, 달려 나가던 그의 그림자 안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흡!?’
그그그그극.
의지가 움직이는 순간 월랑이 달리던 자세 그대로 반전했고, 타이니가 그림자를 향해 녹턴을 휘두르려는데.
“타이니!!”
다급한 표정의 루나가 녹턴의 코앞에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머리를 축축하게 적신 피가 턱 끝까지 흘러내리고, 팔다리는 한쪽씩 괴상한 각도로 꺾여있는 모습.
얼핏 보기에도 심각해 보이는 상태에, 타이니는 휘두르던 녹턴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몇 마리, 제거 못 했어. 미안…….”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기대 오는 그녀.
“루나!”
놀란 듯한 타이니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 듯이 다가가더니.
푸우우욱.
그대로 손으로 가슴을 꿰뚫었다.
“커, 꺼윽!?”
크게 떠진 보랏빛 눈동자, 입가에 흘러내리는 핏물.
“네, 네가? 나를?”
한없이 억울한 눈빛의 루나가 피를 흘리며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흥.”
코웃음을 친 타이니가 루나의 가슴을 관통한 손을 그대로 빼내며, 검은 혈관이 두근거리는 완전한 구체의 ‘핵’을 꺼내 드는 순간.
흘러내리던 시뻘건 핏물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검게 변했고, 루나의 입가가 찢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알았……?”
“잘!”
콰드득!
이내 타이니가 손에 쥔 도플갱어의 핵을 그대로 터트리는 순간, 그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던 루나의 몸체가 형태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고.
콰아아아앙!
이어진 녹턴의 일격이 그 잔해조차 한순간에 지워 버렸다.
“흥. 이런 놈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 예상했지.”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내뱉고 그대로 돌아서는 타이니의 모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또 있을까?’
이놈이 바로 자신을 기습하지 않고 연기를 해 준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몸의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오버리바운드로 인한 내상은 온전히 낫지 않았다. 덕분에 광범위를 살피는 감각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오러를 움직이는 데도 문제가 있었으니.
혹시나 다른 도플갱어가 또 있을까 봐 허장성세를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흘깃 살펴 본 수정구, 아르곤의 탐지기에는 다른 개체가 감지되지 않았다.
루나가 잡아먹힌 것이 아니라면, 근처에는 초월급 마물이 없다는 뜻.
하지만 루나를 흉내 낸 괴물을 마주하고 나니, 다시금 그녀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때문이라 자책했으니, 장군급 하나를 쫓지는 않았을 거야. 초월급들을 사냥하러 간 거겠지.’
- 최악의 경우는 루나 양이 잡아먹히고…….
문득 떠오른 크롬벨의 불길한 말 때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괴물들에게 포위당한 채 쓰러지는 루나의 모습이 상상되었지만.
‘아니, 아니, 그럴 리는 없어.’
그렇게 무모하게 덤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움직이자.”
“컹!”
은빛 늑대와 기수는 그때부터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여전히,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 * *
‘나 때문이야.’
오크와 엘프의 모습으로 변신한 초월급 마족들을 열 마리째 격살하던 순간 벌어진 재앙.
자신의 모습으로 변신한 놈들이 그림자 도약과 사신투, 처형인(處刑刃)까지 똑같이 써 가며 대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루나는 암살자답지 않게 심장이 덜컥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비명이 전부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 도플갱어는 최우선적으로 자신이 베낀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으려 합니다.
용사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자신을 흉내 낸 것들은 직접 덤벼들지 않았다.
극에 달한 그림자 은신과 이번에 황궁에서 받은 초월무구 망토, 그림자 장막의 효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더욱 눈앞에 벌어진 재앙이 자신의 탓 같았다.
‘괜히 눈에 띄게 나섰어.’
그때부터 루나는 철저하게 숨어 다니며 놈들에게 ‘표식’을 남기는 데 집중했다.
- 모르스 비기, 사신의 부름.
다행인지 불행인지, 초월무구의 능력으로 100% 증폭된 그림자 속성력과 은폐 기술 효율 덕분에 극의에 달한 그림자 은신술은 자신의 기술을 베낀 적들조차 속일 수 있었다.
다만, 싸울 수는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채 전투를 벌이면 놈들이 죽음의 오러까지 베껴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그러기 시작한다면, 엘프와 오크의 군세가 순식간에 전멸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이 전투가 일단락된 후에 그 초월급들을 하나하나 암살하기 위해, 놈들에게 자신의 오러를 심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간혹 전장의 변두리로 튀어 나가는 놈들을 격살했지만, 죄책감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나 때문이야.’
타이니가 그렇게 위기라 강조해 왔던 말세.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자신은 오러익시더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랬기에 악마급을 사냥하는 임무에도 배정되지 못했고, ‘고작’ 초월급 마족들이 자신을 복사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수많은 오크와 엘프의 전사들, 인류의 힘이 되어야 할 이들이 자신의 기술에 순식간에 대량으로 죽어 넘어졌다.
‘나 때문이야.’
그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놈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서슴없이 따라붙는다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정에 휩쓸려 무작정 적을 쳐 죽이려 쫓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책하고 분노했다 하더라도, 자신은 암살자 가문 모르스의 총화를 모아 키워진 정수.
루나는 차분하게 이 전투가 끝난 후의 암살을 예비했다.
‘내가 정리해야 해.’
그렇게 모두 열다섯 마리의 초월급 마수를 제거하고, 남은 백일곱 마리의 마족 중 아흔 마리에게 표식을 남겼을 때.
놈들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할 수 있어!’
오러의 발현과 유지가 필요한 ‘사신의 부름’을 남발한 탓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표식을 남긴 놈들만 다 처리해도, 죄책감 없이 동생한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천천히 기회를 노렸다.
‘한 놈씩, 따로 떨어지는 놈들부터 하나씩.’
자신을 다독여 가며, 멀찌감치 떨어져서 놈들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 첫 기회가 왔다.
“ущцлварыдф?!”
뼈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오크 특유의 건축물이 가득한 산맥 도시에서 늙은 오크로 변신해 있는 놈.
그놈이 뭐라 호통을 치며 도시의 오크들을 움직이려 할 때, 루나는 그대로 놈의 목을 쳤다.
그 순간, 도시 전체에 난리가 났다.
“влфелацлул!(암살자다!)”
“влфелацлкл ущцлварыдфвьа цтквгЕул!(암살자가 대장로님을 죽였다!)”
“цлварыдфвьд едсзкл елалцгЕул. вдкоы…….(장로님 시체가 사라졌다. 이건…….)”
“еоафл…….(설마…….)”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똑똑한 동생이 수습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가장 가까운 다른 흔적을 쫓아 이동했다.
그곳에서 가까운, 또 다른 오크의 도시.
무슨 기준으로 대상을 골랐는지는 몰라도, 역시나 이번에도 늙은 오크를 잡아먹고 변신해 있는 놈이 있었다.
“вдыклывд втадаьа ерквгЕул!(인간이 우리를 속였다!)”
“втадвьд цркцлвкрл втадвьд цоыелуьавьа пьдещведягЕул!(우리의 족장과 우리의 전사들을 희생시켰다!)”
“втадыьы флУлвпд йркетпщвш плыул!(우리는 마땅히 복수해야 한다!)”
놈이 연달아 목소리를 높이자, 그 말에 다른 오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втадвьд вьывдывд втадаьа ерквгЕулыьы флавдйыдКл?(우리의 은인이 우리를 속였다는 말입니까?)”
“флаур влыурдйыдул!(말도 안 됩니다!)”
“цоур кьврл плфКз цоыцлввз вдЕвоЕеьйыдул!(저는 그와 함께 전장에 있었습니다!)”
“вьывдывьы кьаоа елалфвд влыдйыдул!(은인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오크들을 선동하는 것일 터였다.
- 놈들은 인류의 균열을 일으키려 수작을 부릴 것이다.
이미 용사와 동생에게 귀에 박히도록 들은 얘기가 있었다.
그 수상한 분위기가 더욱 나빠지기 전에, 바로 놈의 목을 쳤다.
“влфелацлул!(암살자다!)”
“влфелацлкл ущцлварыдфвьа цтквгЕул!(암살자가 대장로님을 죽였다!)”
“вдкоевьы……?(이것은……?)”
“ыл, ыл йры цоквд вдЕво!(나, 나 본 적이 있어!)”
“ылур! вифгвплы етйойвдцлыпвл, цтквьфвьд врао!(나도! 유명한 수법이잖아, 죽음의 오러!)”
“вьывдывьд урванвды еледывьд етйой! еоафл цлварыдфвьд флавд цдыЦл……?(은인의 동료인 사신의 수법! 설마 장로님의 말이 진짜……?)”
그 뒤에 일어난 소란은 신경 쓰지 않았다.
루나는 그저 다음 목표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는 데만 집중했다.
‘표식을 남긴 놈이라도 다 죽인다.’
오직 그 생각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세 번째 늙은 오크의 목을 치고 다음 목표를 향하던 그때.
생각지 못한 이변이 생겼다.
‘이런…….’
표식을 남긴 놈 중 무려 스무 마리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