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두 번째 강림
“X발, 어째 정중하게 나온다 했다!”
“아니, 제 말은……!”
쾅!
갑작스러운 굉음이 퍼지자, 벌목과 마물 사냥 작업에 열중하던 주변의 엘프와 오크들의 시선까지 모두 그들을 향해 모였다.
두 번째 강림을 고작 며칠 앞둔 지금, 그들의 가장 큰 창이자 방패가 되어야 할 초인들이 자중지란을 벌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 와중에도 다행히.
“그냥 고려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속도만큼은 확실히 엄청난 크롬벨은 반격 없이 타이니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고.
“차, 참아, 타이니!”
“상대해, 주지 마.”
흥분한 타이니를 뜯어말릴 수 있는 유이한 두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덕분에 타이니는 콧김을 뿜으면서도 결국 돌아섰지만, 끝내 들으란 듯이 불만을 숨김 없이 토해 냈다.
“아우, 저 새끼는 진짜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누가 봐도 여전히 속이 끓고 있는 상태.
거기에.
“솜누스가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명심해 주세요, 타이니 경!”
“하! 이 새……!”
크롬벨이 한 번 더 기름을 붓자, 다시금 대수림의 일각에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쿵. 쾅!
“설마 벌써 변한 겁니까!?”
“미친놈이……!”
콰콰콰콰콰콰콰콰.
“아니, 저는 그냥 주의하라는 의미로……!”
“이 쥐새끼가!”
우르르르르릉.
그리고 그런 두 초인의 공방은.
“진작 자기들이 하지…….”
“그러게…….”
가히 수천 명분의 벌목과 사냥을 한순간에 해치우며, 엘프와 오크가 하나 되어 고개를 끄덕이는 진풍경을 만들어 냈다.
* * *
“하…… 하여간 빠르긴 빨라.”
결국 크롬벨을 잡지 못한 타이니가 아쉬움에 혀를 찼다.
그러자 루나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진심으로 한 거, 아니잖아.”
“음?”
“그랬으면, 변신부터 했겠지.”
루나의 지적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사실 크롬벨에 대한 경계심이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고 있던 터라, 솔직히 좀 전의 소란도 전생에 저릭이나 실버 팽이랑 하던 푸닥거리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내가? 그놈을?’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변명이 나왔다.
“뭐, 그래도 확실히 선은 그어 놓자는 거지. 아무리 경험자라 해도 과도한 간섭이었으니까. 솔직히 그 녀석 개인의 욕심도 아예 없진 않은 것 같고.”
“그 말이, 아예 거짓 같지는, 않다는 거네?”
“음? 아, 뭐. 그래도 제정신이라면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헛소리를 하진 않았을 테니까.”
“……걱정해야, 될 일이야?”
피식.
“아니, 전혀.”
타이니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신감 어린 미소를 보였다.
“애초에 난 뭔지도 모를 것에 휘둘릴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러느니 내 멋대로 날뛰다가 부서지는 게 낫지.”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억! 오, 오러!?”
자신의 옆구리를 쥐어짜듯 꼬집는 손톱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타이니가 기겁하며 펄쩍 뛰어오르는데.
“이젠 마나로도, 안 돼서. 괴물 동생.”
검은빛 상서로운 오러를 손끝에 두른 루나가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리고 의외의 말을 보탰다.
“신경 써.”
“음?”
“저 사람, 지금, 이상해.”
“이상해? 어, 저놈 원래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야.”
루나가 안색을 굳히는 순간, 타이니 역시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웠다.
그러자 루나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언젠가부터, 모두에게 존대해. 나 그런 사람, 한 명 알아.”
“응? 아, 제나스 경? 그러고 보니…… 씁, 저놈이 언제부터 존대만 했지?”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적대적인 기색을 내보이던 때에는 분명 꽤 거친 말투도 사용했던 것 같은데.
좀 전에는 일방적으로 몰리면서도 반격도 안 하고 내내 존댓말을 썼다.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인가 싶은데.
“제나스 경은 습관. 자연스러워. 그런데 저 용사, 억지로 연기해.”
“음?”
다소 뜬금없는 주장이었지만, 그는 루나의 직관에 종종 감탄하곤 했기에 그 말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설마 저 새끼가 아직도 음흉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나? 그런데 내가 못 느꼈다고?’
자연스레 타이니의 미간이 좁아지는데.
그 생각을 짐작한 듯이 루나가 그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조금 달라. 저거 인격 조율. 긴가민가했는데, 맞는 거 같아.”
“음? 인격 조율?”
“……억지로 캐릭터 만들어. 스스로 만든 성격, 그대로 지키려 해.”
점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음흉한 생각으로 연기한다는 거 아냐?”
그 말에 루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달라.”
“……어떻게?”
“음…….”
두 모르스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간 인상을 쓰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루나가 먼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탁 쳤다.
“내면의 무언가, 억누르려는 듯해. 존대를 하면서. 예의를 지키고, 선을 넘지 않으려 해.”
“아까 그놈 말은 충분히 선을 넘었는데?”
“……그러니까. 아으으. 내면의 감정을 죽이고, 이성만 따르려 해. 그 수련, 스스로를 깎아 내는 과정.”
“응?”
“아까 그 말도, 해야 한다는 이성으로, 한 걸 거야. 감성을 배제해서, 그런 말이 나온 거야.”
“그렇다기엔 표정이 너무 변화무쌍한데?”
“그것도 연기. 원래는 안 그랬어.”
“그렇……긴 하지.”
생각해 보면, 본래는 상당히 무표정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싶어 생각에 빠지려던 그때, 루나가 정답을 제시했다.
“살육의 광기, 제어하기 위해, 하는 수련이기도 해. 그리고…….”
“신전의 용사가 왜?”
“……몰라.”
하지만 루나의 직관을 믿더라도 근거가 터무니없이 빈약했다.
이래서야 대화가 겉돈다 싶던 그 순간.
“저기. 봐.”
루나가 갑자기 가리킨 곳.
스각.
- 꾸에에에에!
그곳에는 어디선가 튀어나온 거대 멧돼지 형태의 마물을 그대로 베어 버린 크롬벨이 있었다.
그 옆에서 마물의 습격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엘프가 감사의 말을 꺼내는데.
“가, 감사합니다.”
그 순간 크롬벨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하더니, 한 박자 늦게 다시 웃으며 엘프의 인사를 받았다.
“별말씀을.”
조금 어색하지만, 크게 이상하지는 않은 풍경.
그런데 그때.
그 잠깐 사이 크롬벨이 스스로의 손을 역방향으로 우드득 꺾어 버렸다가 다시 원위치시키는 것이, 초인인 두 사람의 눈에만 보였다.
동시에 그 손목에 맺히는 성스러운 빛.
그 행동은 분명 스스로 손목을 부수고 다시 치유하는 것 같았다.
‘하…… 저게 뭔 미친 짓이야?’
도무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광경에 당연히 의문이 들었는데.
“스스로 정해 둔 캐릭터, 행동 틀리면, 자체적으로 자학.”
“뭐?”
“인격 조율한 지, 얼마 안 됐어. 격한 행동 많이 할 때, 자주 틀려. 아까 너한테 쫓길 때도, 한 번. 갑자기 하는 존대도 과해.”
“허…….”
“목표에 맞춰, 인격을 조율하는 거야. 미세한 버릇, 의식마저도 그 목표에 완벽하게 맞춰지도록. 인격 조율 방식.”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그 전에, 그렇다 쳐도 쟤가 왜 저러냐고!”
“하지만, 굉장히 효율적인, 수련 방법이기도 해.”
“응?”
“목표가 인물이 아닌, 관념이 되면,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다른 생각, 행동 못 하도록 제어. 완벽한 수련 방법이자, 금제. 부가적으로, 목표와 상관없는 정신 공격에도, 거의 면역.”
“……잘 아네?”
“당연히. 모르스 비전이니까.”
“응?”
“다른 말로, 마인드 킬링(Mind Killing).”
“뭐!?”
“저자, 우리 선조와 관련이 있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지만, 타이니는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크롬벨을 다시 보았다.
루나의 말이야 대략 이해가 됐지만, 애초에 그에게 모르스 가문에 대한 애착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정작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루나의 말을 듣고 문득 떠올린 전생의 사신의 모습이었다.
“누나, 저 수법 절대 쓰지 마. 부작용이 심각할 테니.”
“이 수법 알아? 말해 준 적 없…….”
“아무래도 전생의 누나 상태가 저 짓의 부작용 같거든. 저것만 봐도 정상이 아니잖아.”
“……나도, 저랬어?”
“내가 볼 때 저러진 않았지만, 거의 감정이 없는 듯했지. 마인드 킬링이라니, 딱 그 이름 그대로였어.”
“아마, 그랬을 거야.”
“알아?!”
“짐작.”
루나도 긍정했듯이, 아마도 저 괴상한 짓거리는 궁극적으로 영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다만, 덕분에 조금 전 녀석이 했던 말도 납득할 수 있었다.
- 저는 엄연한 여신의 사도이니 결코 창조주의 파편으로 인해 인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여신이 어쩌고저쩌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영혼을 갈아 넣은 거라면…….’
녀석이 충분히 자신할 만도 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짓이기도 했다.
수련에 도움이 된다?
그거야 하수일 때나 그렇겠지.
‘영혼의 힘은 모든 이능의 근간이다. 저 녀석 정도면 그걸 알 텐데, 왜?’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효율을 위해 그 근간을 갈아 넣어 버리다니, 스스로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 포기한 자나 할 만한 일이었다.
더욱이 스스로의 인격까지 망가트리는 일일 텐데.
반신의 경지에 닿으려면 신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학에 가까운 짓을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 시대의 사람도 아닌 자가, 수천 년을 거슬러 와서 사실상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는다.
당대에 특별히 혈육이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만약 존재한다 해도 2천 년이나 지났으면 남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럼 대체 저 용사 크롬벨은 무슨 동력으로 저렇게까지 하는가.
새삼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더 믿어도 되겠네.”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타이니는 마음속으로 크롬벨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물론 아직은 최저에서 바로 위 단계로 올라갔을 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순간, 그 대화의 대상은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악을 쓰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살짝 떨리는 왼손을 억지로 붙잡아 가며, 좀 전에 엘프가 하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 애썼다.
- 망할 여신이 진짜 창조주라면, 이런 시련 따위 없어야 하잖아.
감히 하늘에 계신 그분을 모독하는 엘프의 목을 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참…….
‘아니, 아니야!!’
엘프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마물을 욕한 것뿐인데, 그에 반응한 심장이 충동적인 감정을 일으킨 것이다.
거짓된 기억까지 심어 주면서.
인격이 변한 것 같다는 자각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때부터 오히려 내면의 폭력성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슴속에 형성되다 만 9번째 마기 서클이 그 폭력성을 부추기는 듯했다.
하지만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성녀가 나를 위해 자기 운명을 갈아 넣었다. 고작 부활 마법의 부작용 따위에 모든 걸 망칠까 보냐!’
그래서 그는 성녀가 개발한 수법을 썼다. 영혼에 끼치는 부작용이 막대하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더 나아갈 길은 운명의 파편뿐이야.’
그러니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칠죄종과 솜누스, 그리고 마왕의 목을 친다.”
나직이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목표를 때려 박는다.
자신이 과거에 완전히 이루지 못했던 과업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것만이 오직 최선의 가치이니, 만약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 모두 배제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웃음을 연기한다.
연기가 익숙해질수록, 가슴속에 날뛰는 폭력성은 점차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강제로 조형된 이성이, 감정과 상관없이 목표를 향해서만 움직이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된다.’
이글거리는 살기를 눈동자 깊숙한 곳에 품은 채, 크롬벨은 모든 힘과 부작용까지 자신의 칼을 벼리는 재료로 삼았다.
사흘 뒤.
“그렇습니까? 그 폭뢰라는 게 있었으면 좀 더 편했을 텐데요.”
“적어도 이번 강림을 무사히 막아 낼 때쯤이면 보급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인류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악마추종자들이 만들어 낸 무기로 악마를 상대한다……. 흠, 좋군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은 무난히 이겨 내야겠죠. 그리고 타이니 경, 제가 말씀드린 군단의 특색에 관한 건 다 외웠겠죠?”
“뭐, 충분할 정도로……요.”
“좋습니다. 만약 질투나 탐욕의 군세가 아니더라도 절대 당황하면 안 됩니다. 타이니 경 덕분에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까요.”
“물론, 너……만 잘하면 돼.”
“맡겨 두시죠.”
크롬벨의 말에 대답하는 타이니의 말투는 존대와 반말을 오가느라 넘치도록 어색했다.
에스티나가 황당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크롬벨은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그저 빙글빙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는 타이니와 루나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맞지?
- 맞아.
‘이 녀석, 확실히 어딘가 살짝 어긋났어.’
차라리 전생의 사신처럼 항상 무표정한 게 낫다 싶어 한숨이 나올 때.
“집중합시다, 타이니 경.”
콰지직.
그들이 지켜보고 있던 방향의 허공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