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발견
대수림의 거대한 나무들 사이.
그곳에 웅크려 있던 마수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사냥감의 냄새에 코를 씰룩였다.
최근 털 없는 길쭉한 원숭이들이 단체로 숲속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도통 굴에서 나올 수가 없었는데.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나와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홀로 돌아다니는 먹잇감이 있었던 것이다.
꾸르륵.
마수는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흠칫하다가 바람을 등지고 서서히 수풀 속을 움직였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일단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다.
- 먹는다. 먹자. 사냥.
다행히도 저 먹잇감은 그 위험한, 귀가 길고 털 없는 원숭이들과는 형태가 조금 달랐다.
껍질은 좀 더 크고 두꺼운 것 같았지만, 귀가 짧고 둔중해 보였다.
저런 놈들은 대체로 귀가 긴 것들보다 약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홀로 다니는 주제에 멍하니 다른 쪽을 보며 정신을 팔고 있기까지 했다.
더없이 완벽한 사냥감이었다.
- 먹는다.
저 종류의 원숭이들은 갑각만 벗겨내면 속살은 야들야들한 고기로 가득할 터.
그 맛을 상상하며 소리도 없이 그 뒤를 덮치는데.
“또야?”
꽈아아아아앙!
짜증스러운 음성과 함께, 한순간에 마수의 의식이 날아갔다.
“집중을 못 하게 만드네.”
씁.
타이니는 머리가 사라진 거대 표범 비슷한 마수의 시체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 앞으로 강림까지 7일. 그러니 사흘 안에 균열이 열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겠어.
에스티나에게 호언장담을 하고 나온 기한이 벌써 다 되어 간다.
차원의 벽이 얇아지는 지점을 느낄 수 있다 자신했지만, 뒤져 봐야 하는 범위가 생각보다 넓었다.
‘차원벽을 느껴야 하니, 이동 속도도 제한되고.’
그래도 장담한 것이 있으니 3일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성과가 보이지 않아 슬슬 초조한 마음이 들던 참이었다.
‘지금쯤이면 오크 전사들도 엘븐하임에 모여들기 시작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많이 모이더라도 훈련할 시간은 없을 터이고, 오렌 평야에 모였던 정예들에 비하면 그 수도 능력도 많이 모자랄 것이다.
앞으로 4일 뒤, 차원문이 열린다.
반드시 열릴 위치를 찾아내 함정을 파고 기다려야 하는데…….
- 아무리 우리가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지만…….
- 사기를 높……? 아. 그, 그렇지. 암, 그런 의도였지. 하, 하하.
- ……폭식의 군단 때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타이니 경.
- 나도 알아.
- 꽤 위험한 상황입니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현재 다른 칠죄종과 악마급 마족들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잖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밉살스러운 녀석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니, 한숨만 나왔다.
“안다고. 알아.”
연합군의 정예에 비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한참 부족한 군대를 움직여 칠죄종의 군단을 상대하려면, 지금쯤은 정확한 강림 위치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런데, 아오씨. 제엔장!!!!”
쿵.
- 제엔장!!!!
신경질적으로 내지른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퍼져 나가고.
푸르르륵.
크르르르.
컹!
대수림의 곳곳에서 그 목소리에 반응한 소란이 일어나며 다시 한번 타이니의 신경을 건드렸다.
괜히 고함을 질렀다가 더욱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버린 악수.
하지만 이미 스트레스가 가득한 타이니는, 그 소란을 방금보다 더한 고함으로 맞받아쳤다.
“전부, 닥쳐!!”
쿵.
우르르르르릉.
- 닥쳐어어어어어!!!!!
노골적으로 마나까지 싣고 퍼져 나가는 음파.
보통의 사람이 그랬다면, 아니 설령 초인이라 한들 괜히 더 큰 소란만 부추겼을 어리석은 짓이었겠지만.
스아아아아아.
이미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육체에 극강의 마나까지 품은 괴물이 존재감을 실어서 내지른 기세는 대수림의 소란을 한순간에 잠재웠다.
거대한 숲이 일순간 적막에 잠기고.
근거리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작은 벌레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데.
“진작 이럴 걸……. 어?”
그렇게 숲에 어울리지 않는 적막을 만들어 낸 포식자는, 그 적막 속에서 미약한 이질감을 느꼈다.
대수림의 전방위로 퍼져 나갔던 기세를 회수하다 보니 감각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찾았다!”
타이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순간.
콰아아아앙!
녹턴에서 뿜어진 노을빛 오러가 하늘 높이 솟구쳐 구름까지 뻗어 나갔다.
약속된 신호였다.
* * *
쩌어어어억.
“또 넘어간다!!”
쿠우우우웅.
우르르르릉.
“으…….”
대수림의 지킴이를 자청하는 엘프들이 벌목을 하는 광경.
그 낯선 광경은 그 누구보다도 세계수의 수호자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주고 있었다.
“……이거 맞는 거겠지, 타이니?”
“그래.”
타이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엘프들만 끼고 싸울 거면 몰라도, 이쪽엔 오크들까지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오크 전사들은 분명 강력하지만 대수림의 수풀 속은 익숙하지 않을 터.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런 그들이 최전선에 나설 수 있게 사방 수 킬로미터 면적을 아예 갈아엎는 작업이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크롬벨 역시 말을 보탰다.
“그늘이 우거진 숲속. 만약 이곳에 강림할 군단이 탐욕의 그림자 군단이라면 놈들에겐 아주 좋은 전장이 될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눈에 보이는 나무를 싹 다 베어 버리고 싶…….”
“뭐요!? 당신 설마 또?!”
“아, 아니, 물론 당연히 세계수는 아닙니다! 대수림의 숲을 정말 싹 밀어 버리자는 것도 아니고요. 그랬다간 마역의 침습을 못 막을 텐데, 당연히 농담…… 농담입니다! 하. 하.”
말이 길어질수록 에스티나의 시선이 사나워지자, 크롬벨은 결국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대다수의 엘프는 모르고 있지만, 과거에 세계수를 대미궁에 처박은 적이 있는 크롬벨에게 엘프들의 적의 어린 시선은 양심을 콕콕 찌르는 비수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만만한 사람(?)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그나저나 차원의 벽이 얇아진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군요. 역시 당신도 벽 너머를 보고 계십니까?”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타이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크롬벨과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도?”
“아, 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안타까워서요.”
“뭐?”
“며칠만 더 일찍 알았으면 가리온에 날아갔다 올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거긴 지금 장소를 특정 못 한 채로 넓게 포위망을 짜고 있을 텐데.”
“……이쪽도 쉽게 찾은 게 아니야. 운이 따라 줬지.”
“그렇겠죠. 뭐 어쨌건, 개인의 역량만 따져 봐도 당신이 차원벽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뭐가?”
“당신이 솜누스와는 다르다는 것은 이제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혹시나 자의로 그 파편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된다면, 부디 인류 전체를 위한 결단을 내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크롬벨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타이니로선 얘가 또 왜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그의 말에는 유독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놈…….’
마치 그가 운명의 파편을 자의로 움직이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타이니의 반문에 크롬벨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바로 엉뚱한 말로 답했다.
“세간에는 전해지지 않았겠지만, 사실 고대 마계 대전에서 처음 인류를 규합했던 것은 신전이나 제가 아닌 솜누스라는 인간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백.
뒤이어 크롬벨의 입에서, 그가 여태까지 타이니를 적대했던 이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밝혀진 비사는 무척 놀라웠다.
“흠…….”
펜릴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던 타이니는 그냥 눈썹을 씰룩이고 말았을 뿐이었지만.
“그게……?”
“……진짜!?”
에스티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고, 루나는 어느새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롬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크롬벨은 인상을 쓰며 아주 옛날, 고대의 처참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솜누스는 차원의 벽을 느끼게 되고 나서부터 얼마 안 가 파편이 개화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는 오러마스터를 앞둔 최강의 전사였지요. 순수 전사로서의 역량만큼은 저를 확실히 상회하는 영웅이었습니다.”
“음?”
단순한 인류의 배신자가 아니라, 그 정도의 천재였다?
타이니가 놀란 눈으로 크롬벨을 바라보는데.
“당시에는 온갖 신화의 축복이 저와 동료들에게 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회귀했다는 솜누스 역시 이미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에 그대가 이룬 성취는 실로 놀라운 수준입니다.”
“으음.”
갑자기 그가 자신을 칭찬하는 꼴이 되자, 괜한 어색함에 온몸에 닭살이 돋는 듯했다.
그런 타이니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크롬벨은 한숨을 내쉬며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그리고 이제는 당사자도 느끼고 있을 파편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 어쨌건, 솜누스는 그 파편이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했다고 저희에게 말했었습니다.”
“두 개?”
“긴 고행의 시간을 거쳐 스스로 반신으로 거듭나는 길과, 큰 희생을 치르고 빠르게 거듭나는 길.”
“그걸 직접 말했다고?”
“심지어 희생만 있다면 확실히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자의로 목숨을 바칠 백만 명의 인명을 원하기까지 했죠.”
듣고 있던 모두가 멍해지는 숫자.
그에 가만히 듣고 있던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토해 냈다.
“……미친놈.”
“예, 미친놈이었죠. 당시에는 우리가 화를 내자 농담이라며 얼버무렸었습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군.”
“그렇죠. 어쩌면, 아니 확실히 그때부터 놈은 신이 되고 싶은 열망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의적 제물 백만이 아닌, 수천만 명의 강제 희생자를 만들어 낼 생각을 품은 채로요.”
“그래도 마계 대전을 확실히 이길 수 있다면 혹하는 지배자도 있었을 법한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길 자신이 있었나 보지.”
갑자기 끼어든 에스티나의 말을 크롬벨은 긍정했다.
“예, 솜누스가 배신만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천계의 군단장들도 잠깐씩 강림해서 힘을 빌려주는 것이 가능하던 때였으니까요.”
그 말을 꺼내는 크롬벨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그놈만 아니었어도…….”
우드득.
생각만으로도 분기가 치미는 듯 이를 가는 크롬벨.
인류 수천만을 제물로 바치고 불멸을 얻은 배신자.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그 행태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타이니는, 현생에 부활한 그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지도 약간은, 아주 약간은 알 것 같았다.
하는 짓이 밉상이었기에 괜히 얄미워 보이던 잘생긴 얼굴도 조금 불쌍해 보이려 하는데.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크롬벨은 억지로 인상을 펴며 다시 하려던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듯, 결국 놈은 수천만의 동족을 제물로 바치고 즉시 반신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적으로서. 그런데…….”
잘근잘근 입술을 씹는 크롬벨은 잠시간 말을 멈췄다.
마치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 말을 꺼내도 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
“솜누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원래 썩어 있었다고 치더라도 10년 가까이 우리 일행 모두를 속일 정도의 연기력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음?”
“저는, 어쩌면 그 파편이라는 것이 개화하면서 그를 변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
그 말은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타이니로선 그저 실소하며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런 욕망이 있었던 거겠지. 어떻게 그런 수준의 전사가 한 번에 확 변할까.”
“그래도 새겨들어 주십시오, 타이니 경. 혹시나 만약 그 파편이 개화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겨졌을 때, 그것이 강제로 그대를 변화시키려 한다면…….”
말을 잇던 크롬벨이 또다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이번엔 타이니가 그 뒷말을 재촉했다.
“한다면?”
“저 역시 벽을 넘을 준비가 된 자이니, 차라리 제게 넘기십시오. 여신과의 연결은 끊겼지만, 저는 엄연한 여신의 사도이니 결코 창조주의 파편으로 인해 인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여신께서 그렇게 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 정중한 말에 타이니가 돌려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지랄하고 있네.”